성명 | 토머스 퍼시 Thomas Percy | |
생몰년도 | 1343년 ~ 1403년 7월 23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슈롭셔 주 슈루즈버리 | |
아버지 | 헨리 퍼시 | |
어머니 | 랭커스터의 메리 | |
형제자매 | 헨리, 모드 | |
직위 | 우스터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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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으며, 헨리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숨을 잃었다.2. 생애
1343년경 제3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와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 플랜태저넷의 딸인 메리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제4대 퍼시 남작이자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인 헨리 퍼시가 있었고, 누이로 모드[1]가 있었다. 1367년 흑태자 에드워드의 이베리아 원정에 함께 해 나헤라 전투에 참여했으며, 1369년 라 로셸의 세네샬을 역임했다. 또한 존 챈더스의 지휘하에 로버트 놀스의 도르도뉴 및 케르시 원정에 참여했으며, 존 첸도스의 지휘하에 푸아투의 라로슈쉬르용 시를 공략했다.1369년 12월 챈더스가 전투 도중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둔 뒤 그를 대신해 푸아투의 세네샬이 되었다. 1370년 9월 흑태자 에드워드의 리모주 공방전에 참여한 것을 포함해 1370년과 1371년에 아키텐에서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흑태자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연간 급료 100파운드를 지급했으며, 아키텐의 점령지 일부를 영지로 삼게 했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토머스를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기사로 묘사했다.
1372년 프랑스군이 아키텐의 항구 도시인 라 로셸을 포위하자, 장 3세 드 그레일리와 함께 이를 구원하고자 출진했다. 그러나 수비즈 요새를 포위하던 프랑스군을 공격했다가 오웨인 로고치가 이끄는 웨일스 용병대의 역습으로 패배를 면치 못하고 장 3세 드 그레일리와 함께 생포되었다. 1373년 몸값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76년 4월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1375년 12월 곤트의 존의 메신저가 되어 브뤼헤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휴전 협상에 대한 보고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377년 1월에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로부터 플란데런으로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가라는 특별 요청을 받기도 했다.
1378년 형제 헨리와 함께 잉글랜드의 새 국왕 리처드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1378년 10월 곤트의 존의 지시에 따라 궁정의 다른 기사들과 함께 교회 개혁가인 존 위클리프를 하원으로 호위했다.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발발했을 때 에식스와 세인트 알반스에서 벌어진 농민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지만 그다지 열성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 그해 6월 마일 엔드에서 와트 타일러 등 반군 수뇌부와 대면한 리처드 2세와 동행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1378년, 1384년, 1398년에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및 휴전 협상에서 대표단의 일원을 맡았으며, 1377년부터 1380년까지 스코틀랜드에 고립된 록스버그 성주가 되었지만 이 요새에 거의 가보지 않았다. 1377년부터 1378년까지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함대에서 복무하며 영국 해협에서 카스티야 함대와 교전했으며, 1378년 곤트의 존의 해상 원정에 참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78년 11월 5일 제독으로 임명되어 1380년 4월 8일까지 재직했다. 1379년 초대 아룬델 남작 존 피츠앨런의 해상 원정에 동행했다가 폭풍에 직면했는데, 피츠앨런의 배가 침몰해 피츠앨런이 익사하는 동안 그의 배는 사상자 없이 폭풍을 이겨내고 귀환했다. 또한 휴 칼블리와 함께 브레스트의 보안관에 선임되었지만 브르타뉴에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1381년부터 해상 원정이 별로 일어나지 않자 제독 직임에서 물러났지만, 1385년 1월 29일부터 1386년 2월 22일까지 재차 제독을 맡았고, 1385년 5월부터 7월까지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해 슬로이스 항구에 집결한 프랑스 함대에 맞서 30척이 넘는 함대를 이끌었다. 이후 리처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지만, 스코틀랜드군이 교전을 회피하고 산악 지대에 숨는 바람에 텅 빈 더블린을 점거한 것 외에는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환했다.
1386년 7월 7일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국왕이 되기 위해 플리머스 항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출발할 때 함대의 제독을 맡았으며, 갈리시아에 상륙한 뒤 존의 원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전투 자체보다는 외교 활동에 전념했다. 1387년 6월 10일 카스티야에 대한 존의 권리에 관해 카스티야 사절과 협상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협상은 포르투갈의 트란코소에서 이뤄졌고, 1387년 7월 평화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에 따르면, 곤트의 존은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의 권리를 인정하기로 했고, 후안 1세는 곤트의 존의 딸인 캐서린을 자기 아들인 엔리케 3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후 곤트의 존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온 토머스는 1390년 2월 2일 리처드 2세에 의해 왕실 시종장에 선임되었으며, 1393년 3월 24일 왕실 청지기로 임명되었다. 또한 사우스 웨일스의 판사에 선임되었으며, 1390년 뉴캐슬 에믈린 성의 수입을 죽을 때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고, 1393년에는 하버포드 웨스트 성의 종신 수입을 보장받았다. 또한 토머스는 리처드 2세가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기 위해 칼레로 갔을 때 함께 했다. 1397년 9월 의회에서 왕이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반역 혐의에 관한 재판을 단행했을 때 평결과 처벌을 검토하는 법관으로 활동했다. 1397년 9월 29일 우스터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왕이 반역자들로부터 압수한 광대한 땅을 받았다. 10월에는 형제 헨리 와 함께 제드버그의 성, 마을, 숲을 제공받았고, 1398년 초에 칼레의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398년 2월 3일, 곤트의 존은 눈을 감으면서 토머스를 유언 집행자로 지명했다. 1399년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가, 지난날 리처드 2세에게 추방당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몰래 귀국한 뒤 반란을 일으키고 대귀족들이 헨리 편을 들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그 쪽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형 헨리 퍼시와 조카 헨리 '핫스퍼' 퍼시가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왕으로 올리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한 데 비해 이렇다할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1397년에 받았던 토지를 이전 소유자에게 반환해야 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500파운드의 연금을 보상받았고, 직함을 유지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1399년 10월 12일, 헨리 4세는 휴전 지속과 리차드 2세의 아내인 발루아의 이자벨 왕비의 귀환에 관한 프랑스와의 어려운 협상을 이끌 특사로 토머스를 지명했다. 협상은 1401년까지 이어졌고, 1401년 7월 31일 토머스 본인이 이자벨 전 왕비를 칼레에서 프랑스 사절인 리니와 생폴 백작 발레랑 3세 드 뤽상부르리니에게 넘겼다. 1401년 3월 1일부터 1402년 3월 초까지 왕실의 청지기를 재차 맡았으며, 왕위 계승권자인 헨리 왕자의 가정 교사가 되었다. 또한 오와인 글린두르의 반란이 일어난 웨일스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1403년 1월 헨리 4세의 신부가 될 나바라의 잔을 잉글랜드로 데려온 사절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오와인 글린두르와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헨리 4세에게 협상을 통해 반란을 약화시키라고 조언했지만 거부당했다. 여기에 웨일스인들에게 포로로 잡힌 에드먼드 모티머의 석방을 조카 헨리 '핫스퍼' 퍼시와 함께 추진했지만, 헨리 4세는 모티머가 오와인 글린두르와 내통해 패배를 초래한 혐의가 있다며, 몸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퍼시 가문과 모티머 가문의 헨리 4세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었다. 1403년 4월, 헨리 왕자가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노스 웨일스로 원정을 떠났을 때, 토머스는 기사 1명, 중장병 38명, 궁수 200명으로 구성된 부대와 함께 참여했다.
1403년 7월 초 체스터에서 조카 헨리 '핫스퍼' 퍼시와 체스터에서 만난 뒤, 헨리 4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7월 20일 슈루즈버리 시에 도착했을 때, 왕의 군대가 이미 헨리 왕자의 군대와 합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슈루즈버리 인근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헨리 '핫스퍼' 퍼시는 전사했고, 토머스는 생포되었다. 뒤이은 짧은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았고, 7월 23일에 슈루즈버리 시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유해는 슈루즈버리에 있는 성 피터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머리는 런던으로 보내져 런던 브리지 위에 전시되었다. 이후 의회는 1404년 1월 그의 반역을 반역죄로 선고했고, 모든 직함과 영지를 몰수했다. 훗날 형 헨리 퍼시의 증손자이자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리처드 3세 통치 기간인 1484년에 이 판결을 무효로 처리했다. 토머스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