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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올랑드 | 에마뉘엘 마크롱 |
<colbgcolor=#da121a><colcolor=#f2cc0c> 나바라 왕국 제35대 국왕 호아나 3세 Joana III.a Nafarroakoa | |||
이름 | 잔 달브레 (Jeanne d'Albret) | ||
출생 | 1528년 11월 16일 | ||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생제르맹앙레 | |||
사망 | 1572년 6월 9일 (향년 43세) | ||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파리 | |||
재위 | 나바라 왕국의 여왕 | ||
1555년 5월 25일 ~ 1572년 6월 9일 | |||
배우자 |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 빌헬름 (1541년 결혼 / 1545년 무효화) | ||
안토니오 1세(방돔 공작 앙투안) (1548년 결혼 / 1562년 사망) | |||
자녀 | 앙리 4세, 카트린 | ||
아버지 | 헨리케 2세 | ||
어머니 | 앙굴렘의 마르그리트 | ||
형제 | 호아네스 | ||
종교 | 가톨릭 → 칼뱅파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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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제35대 여왕.2. 생애
1528년 11월 16일 프랑스 왕국 일드프랑스 생제르맹앙레에서 나바라 국왕 헨리케 2세와 앙굴렘 백작 샤를의 장녀이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인 마르그리트 당굴렘의 장녀로 출생했다. 형제로 호아네스가 있었지만 태어난 지 5개월만에 사망했기에 사실상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친구인 에메 드 라파예트로부터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그 외에도 여러 학자들로부터 다양한 분야를 배웠다.어머니 마르그리트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으며, 고전 문학을 탐독하면서 스스로 시를 쓰곤 했다. 또한 가톨릭의 부패상을 혐오하며 신앙 개혁을 외치는 인사들과 두루 교류하면서 그들의 뜻에 공감했다. 본인은 가톨릭교회의 일원으로 남아있었지만 개혁주의 작가, 설교자, 신학자들을 후원했으며, 종종 프랑수아 1세를 설득해 그들을 심하게 박해하지 않게 했다. 또한 포 성에서 철학자 및 신학자들을 초대해 자유 토론을 벌이게 하곤 했다. 호아나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라면서 교회 개혁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1537년, 헨리케 2세는 결혼 정책을 통해 스페인에게 빼앗긴 상 나바라를 회복하기로 하고, 딸을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와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이 그렇게 했다가는 알브레 가의 영토가 스페인의 손에 넘어가서 자국에 큰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이를 막았다. 프랑수아 1세는 그 대신에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 클레베의 앤의 형제인 클레베 공작 빌헬름과 결혼하라고 제안했다. 헨리케 2세는 이를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프랑수아 1세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고, 마르그리트가 남동생을 설득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호아나는 1541년 6월 빌헬름 공작과 결혼했다. 그녀 역시 가족들이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하게 된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결혼식 때 성당으로 걸어가기를 거부했다가 프랑스 치안장관 안 드 몽모랑시에게 붙들려 성당 앞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가족에게 보낸 서면 편지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 잔느 드 나바르는 내가 이미 한 항의를 계속하고 있으며, 클레베 공작과 나 자신 사이에 계약하기를 원하는 결혼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항의한다. 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다. 나는 결코 그것에 동의한 적이 없으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내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내가 동의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도될 수 있다. 왕과 내 아버지 왕과 가정교사더러 나를 채찍질하도록 시키겠다고 위협하는 내 어머니 왕비님 말이다.
그녀는 결혼 후 갖은 핑계를 대며 남편이 있는 클레베 공국으로 가지 않았고, 마르그리트는 프랑수아 1세에게 딸의 행위를 변명하는 편지를 여러 번 보냈다. 그렇게 그녀는 결혼식 이후로 4년 동안 빌헬름 공작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 1545년 빌헬름 공작이 카를 5세로부터 헬러 공국을 받는 대가로 프랑스와의 동맹을 끊기로 하자, 그가 쓸모없어졌다고 여긴 프랑수아 1세는 그녀가 남편과 헤어지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에 그녀는 교황청에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결혼해야 했으니 혼인무효화를 해달라고 신청해 승인을 얻어냈다.
이후 어머니의 궁정에서 함께 살면서 여성 종교개혁가 마리 당티에르를 포함한 어머니의 친구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종교개혁 사상에 깊이 빠져들던 호아나는 1547년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한 후 프랑스 왕이 된 앙리 2세의 주선으로 방돔 공작 앙투안 드 부르봉과 약혼했다. 그녀는 이번엔 이 약혼을 받아들였고, 1548년 10월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앙투안 역시 종교개혁에 호의적인 입장을 표했기에, 위그노들은 두 사람의 결합으로 자신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겠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앙투안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궁정에서 시중들던 루이즈 드 라 베라우디에르와 불륜을 맺어 사생아 샤를을 낳는 등 바람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1555년 아버지 헨리케 2세가 사망했고 호아나와 앙투안 부부가 나바라의 공동 왕 '호아나 3세'와 '안토니오 1세'가 되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가톨릭 신자를 자처하면서도 위그노들을 공공연히 옹호했다. 그해 말 개혁적인 전직 수도자이자 설교자인 피에르 다비드와 함께 파리 왕궁으로 찾아갔다가 다비드가 앙리 2세의 위협을 받고 개혁 신앙을 포기하자 크게 실망해 그와의 교류를 끊어버리기도 했다.
1558년 남편과 함께 개신교 예배에 참여한 그녀는 장 칼뱅의 편지에 고무되어 종교 개혁을 완전히 수용했고, 1560년 크리스마스에 자신이 칼뱅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종교 관용 정책을 포기하고 모든 남녀 수도원을 몰수하고 사제와 수도자들을 나바라 왕국에서 추방했으며, 가톨릭 의식을 금지하고 칼뱅파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했다. 또한 신약성경을 바스크어와 베아른 방언으로 번역하게 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문맹 퇴치 정책을 실시했다.
1561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아들 샤를 9세의 섭정을 맡고 안토니오 1세를 프랑스군 중장으로 임명했다. 1562년 3월 가톨릭 교도들이 50명의 위그노를 살해한 바시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 달 말에 호아나와 안토니오는 아들 헨리케와 함께 파리 왕궁으로 향했다. 이때 안토니오는 왕실의 압력에 따라 가톨릭을 수호하고 위그노를 배척하겠다고 맹세했지만, 호아나는 위그노 학살 사건에 항의하면서 미사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자 안토니오는 그녀를 아내로 여기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위그노 세력과 가톨릭 세력의 갈등을 어떻게든 중재하고 싶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호아나에게 평화를 위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간청했지만, 호아나는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남편과 카트린의 분노가 두려워 1562년 3월 파리를 떠나 나바라 왕국으로 향하던 그녀는 도중에 방돔에 들러서 400명의 위그노 폭도들이 가톨릭 교회를 약탈하고 성상을 파괴하도록 허용했다. 안토니오 1세는 이에 분노해 그녀를 체포하고 파리의 수녀원으로 보내려고 군대를 파견했지만 잡지 못했다. 호아나는 나바라 왕국에 도착한 뒤 위그노 군대를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왕실군의 침략에 대비해 나바라 전역을 요새화했다. 장 칼뱅 역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안토니오의 배신은 진리를 배신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올바른 신앙을 이룩하는 데 전념하라고 촉구했다.
안토니오 1세는 방돔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1562년 10월 나바라 왕국으로 진격했지만, 루앙 공방전 도중 치명상을 입었다. 남편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호아나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적진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직접 간호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지만, 안토니오는 이를 듣지 않고 정부 루이즈 드 라 베아루디에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호아나 3세는 왕실군의 침략에 맞서 방어전을 수행했다. 전쟁은 1563년 3월까지 이어지다가 카트린과 호아나가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일단 소강 상태가 되었었지만, 양자는 휴전 기간 중에도 서로를 꺾기 위해 병장기를 가능한 한 많이 모으고 병력을 징발했다.
교황 비오 4세는 사절을 보내 가톨릭으로 돌아오고 이단을 폐지하도록 권고했지만, 호아나는 "베른에서는 교황 사절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답하며 거부했다. 비오 4세는 이에 분노해 호아나를 체포해 종교재판에 넘기고 나바라 왕국을 프랑스와 스페인에 분할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바라 왕국을 자기 영토로 여기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프랑스 섭정 카트린 모두 교황이 부당한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교황청에 항의 서신을 보냈고, 비오 4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다.
1568년, 위그노 전쟁이 재발했다.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동시에 압박하면서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호아나는 아들 헨리케와 함께 위그노의 본거지인 라로셸로 피난했다. 이후 자신에게 동정적인 외국 통치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작성했다. 그녀는 라로셸이 위치한 기옌 지방을 "프로테스탄트의 고향"으로 상징화하면서, 올바른 신앙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요새화 작업을 감독하고 군대 유지를 위한 재정 마련에 골몰하는 한편, 정보 수집 및 민간인 규율 유지를 담당했다. 여기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거액의 돈을 대출받으면서 자신의 보석을 담보로 사용했고, 라로셸에 피난한 수많은 난민들의 복지를 감독했다. 그녀는 종종 콜로니 장군과 함께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전장을 시찰했고, 방어 시설을 감독하고 위그노 군대를 사열했다. 여기에 라로셸에 칼뱅파 신학교를 세우고 학식이 뛰어난 위그노들을 교사로 세웠다.
1570년 가톨릭 진영과 위그노 진영간의 화해를 논하는 생제르맹앙레이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 체결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그녀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만나서 자신의 아들인 헨리케와 카트린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 문제를 논의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이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다. 왕위 후계자인 헨리케가 가톨릭 신자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트린의 설득에 결국 승낙했고, 4월 11일 헨리케와 함께 파리로 향했다.
그 후 다가오는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쇼핑하다가 결혼식이 열리기 2달 전인 1572년 6월 4일 몸이 좋지 않아 쇼핑을 일찌감치 마치고 거주지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부터 고열과 심한 통증에 시달렸고 5일간 앓다가 6월 9일에 사망했다. 이에 카트린이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지만[1] 학계에서는 몸을 지나치게 혹사한 여파로 사망에 이르렀을 거라고 추정한다. 호아나의 유해는 생 조르주 뒤칼 교회에 안장된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두 사람의 무덤은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이던 1793년 교회가 약탈당했을 때 파괴되었다. 사후 아들 헨리케가 헨리케 3세로서 나바라 왕이 되었고, 훗날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
- 클레베 공작 빌헬름(1516 ~ 1592):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작 요한 3세의 외아들.
- 안토니오 1세(1518 ~ 1562): 방돔 공작, 나바라 국왕.
- 앙리 드 부르봉(1551 ~ 1553): 요절
- 앙리 4세(1553 ~ 1610): 나바라 국왕, 프랑스 국왕.
- 루이 샤를 드 부르봉(1555 ~ 1557): 요절
- 마들렌 드 부르봉(1556 ~ 1556): 요절
- 카트린 드 부르봉(1559 ~ 1604): 1599년 로렌 공작 앙리와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