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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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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2대 국왕
루이 13세
Louis XIII
파일:1280px-Luis_XIII,_rey_de_Francia_(Philippe_de_Champaigne).jpg
출생 1601년 9월 27일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궁전
사망 1643년 5월 14일 (향년 41세)
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610년 5월 14일 ~ 1643년 5월 14일
나바라 국왕
1610년 5월 14일 ~ 1620년
서명 파일:루이 13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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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부르봉 가문
이름 루이 드 프랑스
(Louis de France)
아버지 앙리 4세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
형제자매 엘리자베트[1], 크리스틴, 니콜라 앙리, 가스통, 앙리에트 마리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아나[2] (1615년 결혼)
자녀 루이 14세, 필리프 1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3. 평가4. 창작물에서5. 특이사항6. 가족관계
6.1. 조상6.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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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제2대 국왕 이자 나바라 왕국의 마지막 국왕, 그의 시대에 나바라 왕국위는 프랑스에 통합되어 사라졌고 이후 명목상으로 합쳐져 내려온다.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 4세가 토스카나 대공국의 마리 드 메디시스[3][4] 대공녀와 결혼하여 얻은 맏아들이다. 다만 그보다 먼저 태어난 이복 형제는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모두 앙리 4세가 정부에게서 낳은 사생아뿐이였으며, 정식 혼인관계에서 태어난 적장남은 루이 13세였기에 왕위를 계승했다.

그 외에 남동생이 둘 있었고 그중 둘째는 어릴 때 사망했으며 셋째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은 장남 루이 14세가 태어나기 전까지 왕위 계승 1순위로 몇 차례 반란에 연루되어 형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여자 형제도 몇몇 있었는데 첫째 여동생 엘리자베트는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4세의 왕비가 되었고, 둘째 여동생 크리스틴 마리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와 결혼해 사보이아 공작부인, 막내 여동생인 앙리에트 마리는 영국 왕 찰스 1세의 왕비가 되었다. 부왕 앙리 4세가 가톨릭 광신도에 의해 암살되었을 때 9세에 지나지 않았기에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을 받았다.

대중적으로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유명한 소설 《삼총사》에 등장하는 프랑스 국왕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0_Louis_XIII_en_costume_de_deuil_-_Frans_Pourbus_le_Jeune_%282%29.jpg
게으르고 놀기를 좋아하는 데다 어머니에게 당한 학대의 영향으로 여자를 싫어하고[5][6] 미소년을 가까이하여 무기력한 왕이 되리라는 것이 주위의 예측이었으나, 1617년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켜 모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폭정을 행하던 콘치노 콘치니[7]를 포함한 세력을 뒤집어 버리고, 모후를 권좌에서 끌어내어 명실상부한 프랑스 왕국의 군주로 군림했다. 이렇게 어머니의 총신들을 전부 숙청하면서 전권을 장악한 이후 모후와 계속 갈등을 겪다가 한때 마리 드 메디시스의 지지자였던 리슐리외를 재상으로 임명하면서[8] 부르봉 왕조 전성기의 기반을 닦았다.

모후의 섭정기간 권신들을 리슐리외 빼고 전부 몰살시키고 천연덕스럽게 "그렇다. 짐이 프랑스의 군주다."라고 말했으며, 학살극에서 도망친 리슐리외를 찾아가서 '등용된다면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만큼 잔인한 시작이었다. 이후로도 마음에 안든다고 대법원장의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고, 궁내장의 손톱을 뽑아버리겠다고 진심으로 윽박질렀다.

한편 어머니 마리는 블루아 성에 유폐되었다가 1619년에 블루아 성에서 탈출해 루이 13세의 남동생인 오를레앙 공 가스통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루이 13세의 반격으로 너무나도 맥없이 진압되었고, 그나마 리슐리외 추기경이 중재하여 마리는 루이 13세와 화해하였으며, 아우 가스통도 유배를 보내는 정도로 관대하게 용서해 줘 52세로 천수를 누리게 해주었다.[9] 그러나 마리는 이후로도 리슐리외와 루이 13세를 내쫓고 권력을 잡으려는 시도를 번번이 행했기 때문에 결국 루이 13세는 1631년에 아예 마리를 프랑스에서 추방시켜 브뤼셀로 망명시켰다. 이후 마리는 해외에서 군대를 빌려 프랑스를 침공할 기회까지 잡았으나 번번이 여러 사정으로 실패하고 결국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한 채 영국과 네덜란드를 전전하다 1642년독일 쾰른에서 죽었다.

루이 13세는 군주로서는 냉철하고 준엄한 인물로, 언뜻 보기에 평범해보여도 실제 국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군주로서의 큰 그릇을 보였다. 일례로 대 합스부르크 전쟁 중 스페인군이 프랑스 깊숙이 치고 들어와 리슐리외조차 절망하여 사직 청원을 냈을 때, 그에게 고난과 정면으로 대치하여 돌파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리슐리외가 파리 시민에게 솔직히 협조를 구했고 그 결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며칠 동안 말에서 한 번도 내리지 않으면서 잠도 자지 않고 전쟁을 지휘하는 등, 책임감을 보였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절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인물의 전형인 듯, 공정왕 루이(Louis le Juste)라는 별명이 있다지만 그 일화들을 들어보면 "어디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사소한 불평불만을 일일이 일기에 써서 금고에 보관했다고 한다.

게다가 막장 부모인 어머니에게 시달린 탓인지 소년 시절부터 여자를 싫어하기로 악명이 높아[10] 부인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안 도트리슈 왕비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11] 처음 신부를 찾은 날도 총애하던 미소년의 안내를 받고서야 간신히 들어갔다. 다만 이복여동생 카트린느가 자신의 초야를 특별히 보고 배우게 허락해서 결혼 몇 년 만에 아내와 첫날밤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건 당시 왕실 비방으로 떠돌던 유언비어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둘 사이에 부부관계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치적인 문제와 안의 불륜 의혹, 계속되는 유산과 사산 때문에 애정이 식어버린 것이 원인이다. 이 때문에 루이 13세는 이혼을 교황청에 신청했으나 스페인의 눈치를 본 교황청이 거부했고 이 때문에 영국의 헨리 8세처럼 프랑스가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갈 상황이 펼쳐질 뻔했으나 신앙심이 깊었던 루이 13세가 이혼을 포기해서 상황은 진정되었다.[12] 어떻게 해서 자식이 태어난 후에도 자신의 사후 안 도트리슈가 섭정을 못하도록 유언장을 남기기도 했다.[13] 때문에 그 아들인 루이 14세의 친부가 맞는지도 언제나 논란의 대상인데, 이건 그가 결혼한 지 무려 23년이나 지나서 태어난 탓도 있다. 다만 그전에 몇 번 임신과 사산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맛깔나는 《삼총사》 덕분에 이미지는 영 좋지 않다.

그러나 리슐리외가 그의 재임 중 사실상 프랑스를 쥐고 휘둘렀음에도, 자신보다 유능한 재상을 질투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리슐리외가 죽을 때까지 전권을 맡겼다는 것도 어찌보면 일종의 비범함인 듯하다.[14] 유능하지만 왕으로서 부리기 어려운 인물이었을 리슐리외와, 그와 같은 지략과 책모는 없었지만 왕으로서의 책임감과 그런 신하를 끝까지 지지할 수 있는 도량을 지닌 루이 13세는 가히 환상적인 군신간의 궁합이었다 볼 수 있다.[15] 부르봉가 특유의 게으름은 있었지만 최소한 할일은 꼬박꼬박했고, 리슐리외에게 전권을 밀어줬지만 그에 대한 견제도 충분히 하고 있었고 오히려 리슐리외가 언제든지 루이에게 제거당할 수 있다는 압박감 속에 살았다.[16] 다만 개인적으로는 둘 다 병약한 체질이었기에 병실 친구처럼 살뜰한 면도 있었다.[17] 이 둘은 프랑스의 번영에 가장 큰 적이었던 합스부르크 약화와 신성 로마 제국의 사실상 해체, 그리고 스페인의 견제라는 엄청난 난제를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대전란을 통해 결국에는 완수해냈다.

3. 평가

종합적으로는 부르봉 왕조 최초이자 최후의 명군이었던 아버지 앙리 4세와 프랑스 절대왕정기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와도 같은 아들 루이 14세 사이에 끼어서 실제보다 과소평가되고 있는 국왕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청나라로 보면 최전성기 3대 중 옹정제와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절대왕정도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없이는 불가능했을 거라는 점으로 볼 때, 그의 통치기간은 프랑스 역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의 직계는 루이 17세까지 이어지다가 끊겼고, 루이 17세의 숙부들인 루이 18세, 샤를 10세에 의해 이어지다가 샤를 10세의 장남 루이 19세, 샤를 10세의 손자 앙리 5세 모두 자손이 없어서 완전히 단절되었다.[18] 이후 루이 13세의 차남 필리프의 5대손인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의 루이필리프 1세가 이어받았고 현재 부르봉 가의 수장으로 그의 후손 장 도를레앙[19]이 있다.

4. 창작물에서

BBC의 드라마 <머스킷티어>에선 원작 소설 때문인지 위와 같은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찌질이로 나온다. 사고칠 때마다 뒷수습하려고 추기경 찾는 루이 13세의 모습이 압권이다. 그래도 전투력 하나만큼은 뛰어나게 묘사된다.

공룡킹 어드벤처 2기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선 아예 사탕 같은 단거에 환장하는 배불뚝이 철부지 청소년으로 등장한다. 그래도 왕으로서 어머니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왕의 권위를 주장하며 전쟁을 최대한 피하고 아이들에게 필요하다는 이유로 코스모스톤을 순순히 넘겨주는 등 왕다운 모습도 보여준다.

5. 특이사항

코냑을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그런 이유로 레미 쿠앵트로에서 제조한 세계 최고의 코냑에는 그의 이름인 루이 13세가 붙어 있다.

생모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권력욕과 어렸을 때부터 자신에 대한 간섭을 여러 차례를 겪으면서 생모에 대한 증오가 누적되어 왔고, 이에 대한 반발로 앙리 4세의 첫 번째 아내이자 자신의 양모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를 더 좋아했다. 마르그리트가 죽었을 때 가족이 죽은 것처럼 매우 애통해했다고 한다.

탈모로 고생한 왕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가발을 착용하였다. 훗날 아들 루이 14세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전유럽에 가발 문화가 200여년동안 퍼지게 되었다. 문화사에 있어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셈.

6. 가족관계

6.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루이 13세
(Louis XIII)
<colbgcolor=#fff3e4,#331c00> 앙리 4세
(Henry II)
<colbgcolor=#ffffe4,#323300> 방돔 공작 앙투안
(Antoine de Bourbon,
Duke of Vendôme)
방돔 공작 샤를
(Charles de Bourbon,
Duke of Vendôme)
프랑수아즈 달랑송
(Françoise d'Alençon)
호아나 3세
(Joanna III)
헨리케 2세
(Henry II)
마르그리트 당굴렘
(Margaret of Angoulême)
마리아 데 메디치
(Maria de' Medici)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Francesco I de' Medici,
Grand Duke of Tuscany)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Cosimo I de' Medici,
Grand Duke of Tuscany)
레오노르 데 톨레도
(Eleanor de Toledo)
오스트리아의 요하나 여대공
(Joanna of Austria)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Holy Roman Emperor)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Anna of Bohemia and Hungary)

6.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루이 14세
(Louis XIV)
1638년 9월 5일 1715년 9월 1일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20]
슬하 2남 1녀[21]
맹트농 후작부인
프랑수아즈 도비네
2남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 I, Duke of Orléans)
1640년 9월 21일 1701년 6월 8일 잉글랜드의 헨리에타[22]
슬하 2녀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23]
1남 1녀[24]

[1] 펠리페 4세의 첫번째 왕비.[2] 프랑스식으로는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장녀. 오스트리아라고 하니깐 신성 로마 제국 출신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지만,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와 같은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출신이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가 붙은 것이다.[3] 그 유명한 메디치 가문 출신. 프랑스어로 '메디치'는 '메디시스'라고 읽는다.[4] 앙리 4세는 발루아 왕조의 앙리 2세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먼저 결혼했는데, 사이가 별로 안 좋았고 슬하에 자녀도 없어서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른 뒤 이혼했다.[5] 사실은 루이 13세의 아버지 앙리 4세가 원인을 제공한 부분도 있다. 앙리 4세가 여색을 지나치게 밝힌데다가 두 번째 부인 마리 왕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마리 왕비는 남편의 여색을 불쾌하여 장남 루이 13세를 훈육에 가까운 학대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남편의 호색을 이유로 어린 아들을, 그것도 다 그런 것도 아니고 장남만 골라서 학대한 것은 마리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다.[6] 당시 프랑스에 주재하던 외국 대사들이 본국에 보낸 편지 중에는 루이 13세가 갓난 아기 때 젖을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마리가 혀끝을 잘랐다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외교관들이 본국에 보고할 정도이니 사실 여부를 떠나 그만큼 마리의 학대가 노골적이고 잔인했다는 것이다.[7] 콘치니는 이때 사형을 선고받아 참수되었다.[8] 마리가 아들과 화해할 때 내세운 조건중 하나가 리슐리외의 등용이었다. 그만큼 그를 신임했던 거지만 리슐리외가 정말로 루이 13세 측에 가담해버린다.[9] 다만 가스통은 루이 13세가 죽고 나서 왕이 되기 위해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다가 패배하여 체포되었고 블루아 성에 감금되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사망했다.[10] 루이 13세의 차남이자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는 아예 동성애자였으며 여장하는 취미도 있었다. 다만 필리프의 여장 취미는 루이 13세가 동생 가스통 때문에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은 탓에, 똑같은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 왕실에서 일부러 필리프를 그런 쪽의 취미를 갖도록 부추긴 탓이 크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후손이 번성해서 이후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2세루이필리프 1세 부자가 다 이 사람의 후손이다.[11] 무엇보다 어머니가 강제로 시킨 결혼인 터라 루이 13세는 결혼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이를 굴욕으로 생각해 어머니를 더욱 증오했다. 게다가 아내는 스페인의 첩자 노릇을 한 것이 리슐리외를 통해 들통나면서 루이는 아내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12] 안의 혐의는 불륜, 반역 등 중대한 것 뿐이라 사실 이혼하는 게 맞았긴 하다. 정치적인 사유라면 어지간하면 혼인무효를 받아주는 교황청이 스페인의 눈치를 본 것이라 루이 13세와 프랑스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한 일이었고 프랑스 국교회가 생길 뻔도 했지만 전술한대로 루이 13세의 신앙심, 그리고 교황청과 대립하면서도 신앙 문제에서만큼은 교황의 수장권에 충실했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프랑스 국교회론자를 탄압하는 상황이라 무마된 것이다.[13] 다만 안 도트리슈가 고등법원을 통해 이 유언장을 무효로 해버렸기 때문에 결국 안 도트리슈는 섭정이 되었다.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위인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 데는 중앙집권화와 왕권 강화를 하기 위해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세력이 귀족에 대한 탄압을 강화한터라 그들을 싫어했던 귀족들이 섭정위원회를 구성한 리슐리외 파벌들을 국정에서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안 도트리슈가 지명한 총리는 리슐리외의 분신이라고 일컬어지는 마자랭이었다. 마자랭 임명의 여파는 안 도트리슈가 프랑스 궁정에 교황청의 외교관으로 파견된 마자랭에게 반해 그와 비밀결혼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충격적이었으며 결국 귀족들이 반발하여 프롱드의 반란으로 이어지고 말았다.[14] 덕분에 악역 이미지를 리슐리외에게 뒤집어씌웠다.[15] 이런 점은 빌헬름 1세오토 폰 비스마르크 간의 관계와도 닮았다.[16] 그렇다고 리슐리외 추기경을 신뢰하지 않은 건 아니다. 총리, 항해장관, 브르타뉴 주지사 등 많은 주요 직책을 겸임시켰고 그 외에도 그에게 많은 성직자 봉록을 주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추기경은 막대한 부를 쌓기도 했다. 왕이 그에게 준 여러 혜택을 보면 총신이었던 것임은 틀림없다.[17] 서로의 병세를 묻는 편지가 많이 남아 있다.[18] 다만 샤를 10세의 차남 베리 공작 샤를의 장녀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가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와 결혼해, 현재의 부르봉-파르마 가문으로까지 내려오면서 샤를 10세의 여계 후손은 꽤 남아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 부르봉파르마의 치타도 샤를 10세의 여계 후손이다.[19] 장 4세[20] 펠리페 4세의 장녀.[21] 그랑 도팽 루이 등.[22] 찰스 1세의 막내딸이다.[23]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트비히의 딸로 제임스 1세의 진외증손녀이다.[24]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 등.[25] 앙리 4세의 기일과 루이 13세의 기일이 동일하다. 즉, 앙리 4세가 사망한 날이자 루이 13세가 즉위한 날, 그리고 루이 13세가 사망한 날이 각 연도만 다를 뿐 같은 날이다.[26] 펠리페 4세는 결혼 당시(1615년) 10살. 즉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