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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프랑스 카페 왕조 제8대 국왕 루이 8세 Louis VIII | |||
출생 | 1187년 9월 5일 |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226년 11월 8일 (향년 39세) | ||
프랑스 왕국 상파뉴 | |||
재위기간 | 프랑스 국왕 | ||
1223년 7월 14일 ~ 1226년 11월 8일 | |||
잉글랜드 국왕 (논란) | |||
1216년 6월 2일 ~ 1217년 9월 22일 | |||
아르투아 백작 | |||
1190년 3월 15일 ~ 1226년 11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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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필리프 2세 | ||
어머니 | 에노의 이사벨 | ||
배우자 | 카스티야의 블랑카 (1200년 결혼) | ||
자녀 | 필리프, 알퐁스, 장, 루이 9세, 로베르 1세[1], 장 트리스탄, 알퐁스[2], 필리프 다고베르, 이자벨[3], 에티엔, 카를루 1세[4] | ||
종교 | 가톨릭 | ||
별칭 | 사자왕(Le Lion/The Lion)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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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이자 카페 왕조 제8대 왕.2. 생애
'존엄왕' 필리프 2세와 에노의 이사벨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모후의 지참금인 아르투아 백작령의 백작을 겸임했다.1200년에 카스티야의 공주 블랑카와 결혼했으며, 잉글랜드 왕국의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및 존 왕은 처숙부였다. 정치적으로 수틀리면 언제라도 며느리를 갈아치우기 위한 부왕 필리프 2세의 반대 때문에, 결혼식을 하고도 긴 시일이 지나도록 블랑카와 첫날밤을 치르지 않았다.
부왕 필리프 2세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었고, 모후 이사벨을 4세때 여읜 탓에 부친으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필리프 2세의 자식 사랑은 훗날 장성한 루이 8세가 정복자의 자신감을 내비치는 정서적 기반이 되었으며, 루이 8세 또한 부친을 각별히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필리프 2세가 루이의 마상창시합 출전을 금했을 때에도 루이는 착실히 따랐다고 한다.[5] 그는 부친보다 가차없고 냉혹한 성품에 전쟁터에선 잔인무도했으며, 탐욕스러웠고 섬뜩하리만치 분노를 다스릴 줄 알았으며 속임수에 능하고 표리부동했다고 한다.
아버지 필리프 2세를 대신해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잦았고, 결정적으로 로슈 오무안 공방전에서는 존 왕을 성공적으로 격파해, 부빈 전투(1214)의 승리에 일조했다.
왕세자 시절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위한 정복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존 왕의 막장 통치에 질린 대립 제후들이 프랑스 왕세자 루이에게 존 왕을 대신해 잉글랜드를 다스려 달라고 청원한 것에 따라 이뤄졌으며, 이는 그의 왕세자비인 카스티야의 블랑카에게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216년 잉글랜드로 원정을 떠나 세인트 폴 성당과 윈체스터 성당 및 왕궁의 절반을 빼앗는 등 연전연승을 거뒀고, 삽시간에 잉글랜드 남부를 정복했다. 그러나 루이의 본대가 후방의 도버 성을 공략하기 위해 공성을 치르는 동안, 친프랑스파 귀족들이 링컨 전투에서 격파되고, 바다에서도 패배한데 이어, 존 왕의 급사로 어린 헨리가 즉위하자 잉글랜드 제후들이 태도를 돌변하여 그에게 철군을 요구해왔다.
1223년 프랑스 국왕에 즉위한 뒤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던 알비즈와 십자군 원정을 통해 프랑스 남부에 광대한 왕령지를 가지게 되었지만 파리로 돌아오던 도중 이질에 걸려 병사했다. 비록 요절했고 왕으로서의 즉위기간 또한 짧지만, 왕세자 시절부터 사망하기 직전까지 무수한 전공을 세웠다. 업적을 이룬 영역이 문과 무로 차이가 있지만, 이 점은 조선의 문종과 비슷한 점이다.
카페-앙주 왕가가 루이 8세의 대에서 갈라져 나왔다. 유복자 샤를이 앙주와 멘의 영주가 되었고, 이후 시칠리아 왕위까지 손에 넣으면서 그의 자손은 유럽의 유력한 왕가가 되었다.
3. 카스티야의 블랑카
1200년의 르굴레 조약으로 루이는 존 왕의 조카 중 하나와 결혼이 결정되었다. 존 왕의 모후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 8세에게 시집을 보낸 차녀 엘레오노르의 장녀 우라카와 차녀 블랑카 중에서 루이의 배필를 간택했다. 14~15세기에 스페인의 역사학자가 블랑카가 언니인 우라카의 외모에 뒤떨어졌으며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우라카가 블랑카보다 아름답다는 걸 인정했다고 적었다. 그의 역사서에 따르면 필리프 2세의 사절이 가장 아름다운 딸을 간택해야 한다고 당부했으나 프랑스에 온 건 블랑카였는데 엘레오노르 다키텐은 우라카가 이름이 못생기고, 블랑카가 이름이 아름답지 않냐고 설명했다.[7][8]루이 8세와 블랑카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둘 사이에서 총 12명의 자식들이 출생했다. 그러나 첫 딸 블랑슈와 쌍둥이 형제 알퐁스와 장, 9남 스테판은 태어난 직후 사망했고 장남 필리프와 6남 장 트리스탄, 8남 필리프 다고베르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결과적으로는 5명만이 성인이 되었다,
11남 샤를에 대해서 지오바니 빌라니가 이렇게 말했다. "특출난 거구에 머리칼과 수염이 검은색이며 피부색이 짙고 코가 남자다웠다Dal macicho naso." 앙주 백작위를 상속받고 시칠리아 왕국의 카를루 1세로 즉위했다.[9]
4남 루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늘씬하고 광채가 흐르는 금발이고 피부가 하얗고 천사같이 아름다웠다." 프랑스 왕국의 루이 9세로 즉위했고, 형제들 중 모후 블랑카의 광적이고 집착적인 사랑을 받았다. 남편을 일찍 여읜 블랑카가 남편을 빼닮은 루이 9세를 그 대신으로 의지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1226년에 루이 8세가 유언을 통해 아내인 블랑카를 루이 9세의 섭정으로 명령하고 급사했다. 블랑카는 루이 9세의 치세 초기 위그 카페 시절로 돌아가 프랑스 왕을 선거로 선출하자는 군벌들의 반란을 성공리에 쳐부수고 루이 9세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4. 그 외
(외가인) 에노 가문의 친족을 닮은 금발과 파란눈의 소유자였다.
-필립 무스케스
-필립 무스케스
- 루이 8세의 외조부인 에노 백작 보두앵 5세는 눈이 인상적일 정도로 짙은 파란색이었기 때문에 별칭이 '파란 눈'이었으며 루이 8세는 이런 외조부의 파란 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전해진다.
- 엄청난 미남이었던 아들 성왕 루이 9세가 부친의 외모를 빼닮았다고 하는 걸 보면, 루이 8세의 외모 또한 미남이었던 아버지 필리프 2세 존엄왕을 이어받아 매우 뛰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미숙아로 태어나서 키가 평균에 그쳤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코에이 역사시뮬레이션 게임 징기스칸 4에서 등장한다. 다만,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아들보다도 능력치가 낮다. 정치 57, 전투 57, 지모 45.
징기스칸 3에서는 2번 시나리오 카페조의 필립2세의 아들로 등장하며 정치C 전투B 지도B 매력C라는 전쟁에는 능한 능력치로 등장한다.
[1] 아르투아 백작이자 아르투아 가문의 중시조.[2] 푸아티에와 툴루즈 백작. 1271년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3] 프랑스의 성 이자벨이 바로 이 사람이다.[4] 앙주 백작이자 시칠리아 왕, 나폴리의 왕, 카페-앙주 가문의 시조.[5] 이복동생 불로뉴 백작 필리프는 마상창시합에서 죽었다.[6] 이때의 도버 공성전은 BBC 다큐멘터리 배틀 캐슬 Ep3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7] 여담으로 당대에 신부가 시집을 가면 신랑의 문화적 정서에 맞춰 개명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필리프 2세의 친여동생 프랑스의 아녜스도 동로마로 시집갔을 때 '안나'로 개명했다.[8] 엘리슨 위어를 비롯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전기문을 펴낸 작가들은 엘레오노르의 신화를 좆아 그녀가 블랑슈의 인품이 프랑스 왕비 자리에 더 적합했다고 믿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즐겨쓰는 편이다.[9] 샤를 1세는 모계를 통한 앙주 가문의 일족들을 닮아 음유 시인을 후원하고 음악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카페 직계 일족들은 음유 시인과의 교류를 향유하지 않았던 점이 특징적인데 상당히 대조적인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