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1:38:46

청년왕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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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청년왕 헨리.jpg
<colbgcolor=#810000> 이름 헨리
(Henry of England)
별칭 청년왕 (The Young/Le Jeune)
항해자 (Sailor/Mariniers)
출생 1155년 2월 28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사망 1183년 6월 11일 (향년 28세)
프랑스 왕국
지위 잉글랜드 왕공동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154-1189).svg.png
노르망디 공작, 앙주·멘 백작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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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dcdc,#333> 대관식 1차 1170년 6월 14일
2차 1172년 8월 27일
공동왕 1170년 6월 14일 - 1183년 6월 11일
전임 헨리 2세
후임 헨리 2세 }}}}}}}}}
배우자 파일:Blason_pays_fr_FranceAncien.svg.png 프랑스의 마르가리트
자녀 기욤
부왕 헨리 2세
모친 파일:아키텐 공국 국장.svg 엘레오노르 다키텐

1. 개요2. 생애3. 사적인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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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앙주/멘 백작인 헨리 2세와 아키텐과 가스코뉴 여공작, 푸아티에 여백작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차남[1]으로 1155년 2월 28일에 출생했다.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제프리), 존 왕의 형.

잉글랜드 왕국공동왕이자 사실상 왕위 계승자였으나 부친에게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됐고 이후 화해했으나 부친보다 먼저 사망했다.

2. 생애

헨리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부터 철저히 정치적인 체스판에 올려진 말처럼 살아야 했는데 겨우 5살 되던 해에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전 남편이었던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갓 2살이 된 마르그리트 공주와[2] 결혼을 해야 했다. 이른 결혼의 이유는 벡생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던 헨리 2세와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헨리 2세의 부친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에게서 루이 7세가 벡생 지역을 취득한 이후 이 지역의 영유를 둘러싸고 분쟁이 계속되었는데 딸 마르그리트가 헨리와 결혼하면서 지참금 형식으로 이 지역을 가져가게 함으로써 분쟁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었다.

헨리는 15살이 되던 1170년에는 공동왕으로서 즉위하였다. 헨리 2세 역시 스티븐월링포드 조약을 맺은 뒤 공동왕으로 활동했었고, 프랑스 카페 왕조도 초기에 빈약한 정통성 때문에 오랫동안 공동왕 제도를 활용해 후사를 튼튼히 하고자 했었기에 그리 낯선 제도는 아니었다. 플랜태저넷 왕조를 개창한 헨리 2세 역시 왕조의 정착 및 프랑스와의 복잡한 영토 분쟁들을 감안하여 이른 시기에 후계자를 확실히 해두길 원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부터 헨리는 '청년왕'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부자가 이름이 똑같았기 때문에 둘을 구분하기 위해 사람들이 부른 별명이다.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있고, 현직 왕이었기 때문에 헨리 3세라고 부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인 헨리 2세는 그와 대비되어 '노왕(the old king)'이라고 불렸다. 문제는 이때 헨리 2세는 여전히 30대의 젊고 팔팔한 나이라 전혀 노인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무늬만 왕이었지, 실질적인 권한은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었으며, 헨리에게 주어진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차라리 고유한 영지를 갖고 있던 동생 리처드 1세가, 영지에 한해서는, 더 자신만의 일을 할 권한이 많았다. 그러한 그에게 위안거리는 마상창시합이었는데 헨리는 이를 위해서라면 몸도 돈도 마음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그를 항상 따르던 기사단장 윌리엄 마셜[3]과 함께 프랑스 전역을 종횡무진으로 다니며 각종 마상창시합을 후원하고, 대회에 참가하였다. 특히 1179년 11월에는 랭스에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마상창시합이 라니쉬르마른에서 열리자 500여 명의 수행 인원을 데리고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마상창시합에 아낌 없는 투자는 그의 생전과 사후에도 계속 논해지는데 그가 죽은 뒤로 마상창시합의 위세가 꺾이기 시작했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또한 오늘날의 스포츠 스타처럼 마상창시합으로 유명세를 얻은 기사는 전 유럽의 스타였고, 헨리 뿐 아니라 많은 왕족[4]과 귀족들이 마상창시합에 참여하였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조부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도 마상창시합의 스타였다.

문제는 마상창시합 참가에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고, 헨리의 큰 씀씀이까지 보태져 하룻밤 만에 200파운드씩 지출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씀씀이는 헨리의 재정을 갉아 먹었고, 빈약한 재정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부왕 헨리 2세는 정사에만 매달려 자녀들을 소홀히 했고 그나마 보이는 관심은 막내 에게만 집중되었다. 불안한 헨리의 심리적 갈등에 프랑스 왕의 부추김까지 더해져 결국 헨리는 1173년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어머니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동생 제프리, 리처드, 스코틀랜드의 사자왕 윌리엄 1세와 헨리 2세에게 불만을 품은 여러 영주들까지 반란에 참여한다. 반란의 규모는 순식간에 불어났고, 헨리 2세의 패배는 거의 확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영주들은 헨리 2세를 확고히 지지했고, 이를 바탕으로 헨리 2세는 반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왕을 포로로 잡고 프랑스의 반란도 진압하기에 이른다. 결국 헨리를 비롯한 패배한 아들들은 아버지에게 충성맹세를 해야 했으며 영지 중 일부는 막내 존에게 넘겨줘야 했다. 그래도 무늬만 왕이었던 아들이 불쌍했는지 헨리 2세는 헨리에게 지불할 연금을 대폭 늘려준다. 이로써 헨리는 재정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돈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 즉 왕으로서 더 많은 권한을 바라던 헨리는 결국 1183년 재차 아버지 헨리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왕으로서의 권한 확대 및 비옥한 아키텐 지역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반란은 부왕 헨리 2세와 삼남 리처드[5] VS 청년왕 헨리, 사남 제프리 2세의 구도로 이어졌다. 하지만 반란 와중인 1183년 6월 헨리는 이질에 걸렸고, 이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전승에 따르면 헨리는 죽기 전에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었고, 아버지에게 임종 전에 자신을 만나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함정일 것을 우려한 헨리 2세는 헨리의 진중으로 가는 대신 용서의 의미로 자신의 반지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헨리는 그 반지를 꼭 쥔 채로 사망했고 아들의 부고를 들은 헨리 2세는 "헨리는 나를 많이 괴롭게 만들었지만, 나를 더 괴롭혀도 좋으니 그가 살아있기만 하면 좋겠다."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헨리는 자신의 장기[6]는 샤루 수도원에 안치하고, 유해는 루앙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는데 운구 도중 르망에서 주민들이 그의 유해를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루앙 주민들은 르망에 몰려가 왕의 유해를 내놓지 않으면 르망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했고, 헨리 2세의 중재 하에 헨리의 유언대로 유해를 루앙에 묻어주기로 결정했다. 헨리의 유해는 루앙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며 지금도 같은 자리에 위치해 있다.

3. 사적인 면

상당한 미남이었다.(조부 조프루아 5세도 미남백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의 미남이었다.) 키가 동생 리처드 1세와 닮았다고 한다.
키가 크고 외모가 뛰어났다. 얼굴에서 미덕과 성숙하고 훌륭한 판단력이 드러났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모두에게 사랑받고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았다. 전쟁, 용기, 관대함에서 맞수가 없었다.
- 동시대인인 틸버리의 저베이스


[1] 헨리 2세엘레오노르 사이에는 5남 3녀가 태어났는데 그중에서 두 번째 자녀이다. 하지만 형 윌리엄이 2살 때 사망했으므로 사실상 헨리가 장남이었다.[2]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카스티야 공주 콩스탕스의 장녀[3] 영화 기사 윌리엄과 오버랩 되는 장면이다. 마상창시합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왕자와 그의 후원으로 기사가 되어 마상창시합에 참여하는 윌리엄이라는 점, 그리고 왕자가 활약하는 전장이 프랑스 지역인 것까지도 영화 내용과 똑같다. 하지만 영화에서 실존 인물인 제프리 초서가 나오므로 시대적 배경은 전혀 맞지 않다. 제프리 초서가 활동하던 시기는 14세기이므로. 영화에 나오는 왕자도 흑태자 에드워드이다. 실제 에드워드 흑태자도 청년왕 헨리처럼 마상창시합에 관심이 많았고, 헨리가 프랑스에서 아버지에 반란을 일으켜 여러 전쟁에 참여한 것처럼 에드워드도 백년전쟁 때 프랑스 전역에서 맹활약한 바 있다. 또한 에드워드 흑태자도 부왕 에드워드 3세보다 먼저 사망하는 것까지 청년왕 헨리와 똑같다. 200년을 사이에 둔 평행이론인 셈이다.[4] 헨리의 동생 제프리도 마상창시합을 하다 사고로 사망했다는 이설도 있다. 정설은 병사. 말 그대로 마상창시합에 살고 죽는 시대였던 것이다. 마상창시합의 인기가 중세 때보다 후퇴했던 400년 후에도 프랑스 국왕이 마상창시합을 하다 사망하기도 했다.[5] 1172년부터 아키텐은 리처드의 영지였다.[6] 유럽에서는 출생지 못지 않게 사망하는 장소도 중요하게 여겼는데 사망지에는 장기를 묻고, 평소 활동하던 곳이나 출생지에는 유해를 묻는 일이 왕왕 있었다. 이러한 풍습은 19세기까지도 일부 남아 있었는데 탐험가 리빙스턴도 자신이 활동하고 사망한 아프리카에는 심장을 묻고, 유해는 유럽으로 옮겨 장사지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