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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마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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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6년 혹은 1147년 ~ 1219년 5월 14일)

1. 개요2. 유년기3. 11674. 1173~11835. 1189~1192 3차 십자군6. 1194 프레테발 전투7. 1199 리처드 1세의 죽음8. 12009. 섭정10. 리처드 1세와의 대결11. 여담12. 봉토13. 마샬의 후손

1. 개요

누구보다 위대했던 기사
스티븐 랭턴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기사로 평가받는 인물. 무력은 물론 지략과 인격도 뛰어난 최고의 명장이다.

그는 키가 193cm 였고 공식으로 500회 이상의 마상 창술 대회(joust)에서 승리했다고 전해질 정도의 기사였다

윌리엄은 헨리 2세, 리처드 1세, 존 왕, 헨리 3세등 네 명의 왕을 보좌했고 심지어 존 왕이 사망한 후 어린 헨리 3세를 보호하고 섭정을 맡기도 한다.

리처드 1세의 검술 스승이기도 하며 사실상 인간흉기

2. 유년기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반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영토 분쟁이 첨예했던 시기였다. 당시 잉글랜드는 노르만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들은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지방을 중심으로 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프랑스 왕실은 영토 확장을 도모하며 잉글랜드와 대립하고 있었고. 헨리 2세 리처드 1세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시기에는 두 나라 간 전쟁이 잦았는데, 마셜은 이러한 역학관계 속에서 잉글랜드 왕실을 보좌하며 전장에서 전설을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앵글로-노르만 기사 중 한 명이었던 존 마샬로, 군사적으로는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혼돈의 시기였다. 노르만 왕조의 제3대 왕 헨리 1세는 자신의 딸인 마틸다를 여왕으로 세우려 했고, 사후에 그녀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스티븐이 마틸다가 잠시 해외로 떠난 사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를 알게 된 마틸다는 분노해서 남편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의 군사들을 빌려 그녀의 이복동생이었던 글로스터 백작과 함께 스티븐과 내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존 마샬은 내전 초기에는 스티븐 왕의 편에 서서 싸웠으나 이내 마틸다의 편에 서서 싸웠고 이 사실을 알게된 스티븐이 분노해 존 마샬의 둘째 부인의 어린 아들을 인질로 잡고, 투석기 위에 올려놓은 후 성 밖에 있던 존 마샬을 보고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때 존 마샬은 "나에겐 망치와 모루가 있고, 나는 아직도 더 좋은 아들을 제조할 수 있다."라는 말을 했고 이 말을 들은 스티븐은 어이가 없던지 어린 아이를 살려주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윌리엄 마샬이다. 태어난 해는 1146년 혹은 1147년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년도는 알지 못한다.

3. 1167


이후 윌리엄은 노르망디에 위치한 그의 어머니 시빌 르 마레샬(Sybilla le marshal) 사촌인 기욤 드 탕카르빌의 가문으로 들어가 기사 수업을 받게 되었다. 1167년, 마상창시합에 처음으로 출전해 우승했다.

마상창 시합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서로를 향해 돌진하며 창으로 상대방의 갑옷을 맞혀 점수를 얻는 스포츠였다. 윌리엄은 불과 20세 안팎의 나이로 첫번 째 우승을 시작했고 후에 그는 500회가 넘는 마상창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1168년, 마샬은 외삼촌인 솔즈베리 백작 패트릭을 따라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호위 임무에 참여했는데 엘레오노르를 납치하려던 기 드 뤼지냥의 매복에 걸려 외삼촌은 죽고, 윌리엄은 허벅지에 상처가 나고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1] 당시 포로가 된 기사는 선택지가 두 가지였다. 거액의 돈을 주고 풀려나든지, 죽든지.[2]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고, 기욤 드 탕카르빌은 죽었으며, 돈은 없던 윌리엄은 죽음밖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리처드 1세의 어머니로 유명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포로 교환금을 대신 지불했고, 겨우 살아난 윌리엄은 기사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후 약 2년간 엘레오노르의 가신으로 있는 동안 마상창시합에 나가, 무용을 뽐내며 승리를 밥먹듯이 했다. 이러한 실력에 헨리 2세의 장남이었던 청년왕 헨리[3]가 그에게 기사장 자리를 주었고, 이후 청년왕 헨리가 아버지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윌리엄은 그를 따라 싸웠다.

4. 1173~1183


1173년 헨리 2세의 아들인 젊은 헨리가 1173년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마샬은 여기에서 종군하다, 당시 젊은 헨리의 형제들(리처드, 제프리)와 어머니 엘레오노르 그리고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손을 잡고 헨리 2세에게 대항했다. 이 반란은 1174년에 진압되었다.

체스판 내려치기 사건.
오만했던 청년왕 헨리는 체스를 두다가 왕의 말을 잡히자 체스판을 들어 윌리엄의 머리를 내려쳤다고 한다.
윌리엄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이에 격분한 나머지 매질로 훈육하겠다고 청년 왕에게 달려들었다고 한다. 청년왕 헨리는 곧바로 겁에 질려 도망갔다고.

이후에 사과를 끝까지 받아내지는 못했으나 윌리엄은 군말없이 청년왕 헨리를 잘 모셨다.

1183년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난다. 이번엔 동생 리처드와 대립하면서 시작되었고 여전히 헨리는 거만하고 충동적인 행보를 이어가다 1183년 반란 도중 열병으로 요절한다.

청년 왕은 임종을 앞두고 윌리엄을 불러 자신의 죄를 고해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하며 윌리엄은 끝까지 청년 왕을 위로하며 임종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1186년 여름, 리처드는 아키텐 지방에서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었고. 영토 분쟁이 한창이던 프랑스와의 국경 지대였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와중 과연 어느 날 프랑스군 척후병들의 매복 공격을 받고 말았고, 리처드는 휘하 기사들과 함께 고립되고 만다.

절체절명의 순간. 마셜이 소수 정예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적진을 향해 돌진했고 마셜은 힘으로 적군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윌리엄의 창은 적장의 갑옷을 꿰뚫고, 그의 백병전은 프랑스 기사들조차 압도했다고 한다.

구명에 성공한 마셜의 군마는 곧 죽었고 마셜의 갑옷은 화살과 창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후에 리처드의 신임을 얻은건 덤.

한동안 자유롭게 살아가던 그는 헨리 2세가 귀족의 딸인 이사벨 드 클리어(Isabel de Clare)와의 결혼을 주선해주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라고 하자 헨리 2세를 섬기게 된다.

5. 1189~1192 3차 십자군


1189년 7월에 헨리 2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리처드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리처드 1세는 마샬을 중임하기 위해 이사벨과의 결혼을 허락하고 영지를 하사한다. 그의 나이 40~42세 정도. 당시 이사벨과의 나이차는 25살 정도 어렸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5남 5녀가 태어났고, 마셜은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막대한 부와 권세를 얻게 된다.


여담으로 헨리 2세는 그를 이용하기 위해 "이사벨을 악명높은 런던탑에 가둬놓고 그를 조종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런던탑=감옥이라고 착각한데서 온 잘못된 서술이다. 헨리 2세는 이사벨의 공식 후견인으로, 이사벨이 성년이 될때까지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런던탑은 헨리 2세의 정식 왕궁들 중 하나였지, 교도소가 아니다.[4] 정말 헨리 2세가 이사벨을 악명 높은 감옥에 가두고 괴롭혔다면, 마셜이 헨리 2세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된 뒤에도 끝까지 충성을 바쳤을 리가 없다. 어쨌든 마셜은 헨리 2세의 충복으로 활약하며 리처드의 반란에서도 맹활약하였고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활약에도 전세는 불리해졌고 헨리 2세는 시농 성에서 고립되었는데 이때도 마셜은 국왕군을 지휘하며 헨리 2세를 보좌했고 헨리 2세가 임종하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키며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헨리 2세홧병으로 사망하자 리처드 1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리처드는 자신의 심복으로 삼기 위해 런던탑에 있던 17살(!!!)의 이사벨과 43살의 윌리엄을 결혼시켜주며 영지 몇 개를 하사해 주었다. 헨리 2세가 몰락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충성을 바쳤던 점을 높이 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리처드 1세의 동생이었던 이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에 간 사이 통수를 치기 전까지는 존을 지지해주었으나 존이 역심을 드러내자 리처드에 대한 충성을 분명히 했으며, 이후 노르망디에서도 리처드가 가장 신뢰하는 지휘관으로 맹활약을 했다. 이후 마그나 카르타 당시에도 존 왕에게 직언을 많이 하여 존왕에게 미움을 사 영지를 뺏기고 자식들이 인질로 잡혔음에도 존 왕의 편에 서서 반대파들을 개발살내버리기도 했다. 이런 충성스런 모습에 존 왕도 마셜을 신뢰하며 사망할 때 아직 9살밖에 되지 않은 자신의 후계자를 잘 돌봐 달라며 부탁했고, 윌리엄은 왕의 섭정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어쨌든 헨리가 반란 도중 사망하고 주군을 잃은 기사가 되어버린 그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성전기사단에 합류하게 된다.


마셜은 1190년 6월 리처드 1세와 함께 베젤로에서 출발하여 마르세유를 거쳐 해로로 시칠리아에 도착했다.
이후 키프로스섬을 거쳐 1191년 6월 아크에 도착 성지 탈환 전쟁을 시작한다.

1191년, 3차 십자군이 아크레 성을 포위하던 중에도 그는 이슬람군의 지원군을 상대로 혼자 진두에 서서 싸웠고, 살리딘의 부하 사프 앗 딘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그를 쓰러뜨리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는 십자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는 동시에 이슬람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마셜은 소수의 기사들과 정찰을 나섰다가 많은 수의 이슬람군과 마주쳤을 때에도, 동료들의 후퇴 권유를 무시하고 홀로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가 다수의 적을 물리치고 동료들을 구출해내기도 했다. 이러한 일화들을 통해 마셜은 십자군 내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리처드 1세를 비롯한 지휘관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1192년 9월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평화 협정을 맺고 귀국길에 오르고 중간에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붙잡혀 1년 이상 감금이 된다. 마셜 역시 1192년 12월경에 귀국.

6. 1194 프레테발 전투


리처드 1세가 귀환한 직후 리처드 1세의 동생 존이 형의 부재를 틈타 영국과 노르망디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필리프 2세가 가세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1194년 7월 리처드 1세는 노르망디 지방의 프레테발에서 필리프 2세와 맞닥뜨리게 된다. 프랑스군은 수적으로 우세했는데 당시 리처드 군의 선봉에 섰던게 윌리엄 마셜이었다.

마셜은 선봉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했는데 필리프 2세를 향해 뛰어난 기량으로 돌파한 그는 필리프 2세에게 도달했고 그의 군마를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고 한다.말에서 떨어진 필리프 2세는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덕분에 지휘부의 붕괴로 영국측으로 전세가 기울었고 리처드 1세는 프레테발 전투에서 승리했다.

7. 1199 리처드 1세의 죽음


리처드 1세가 1199년 4월 6일 프랑스 샤루 성 포위전 중에 석궁에 맞아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리처드 1세가 사망할 당시 윌리엄은 노르망디에 있었고 리처드 1세를 대신해 노르망디를 통치중이었다. 이후 마셜은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존에게 리처드의 죽음을 알린다.

그러나 헨리 2세의 세 아들 중 하나였던 제프리가 1186년에 죽었고, 그의 아들 아서가 브리타니아의 후계자가 되었다. 아서는 12살이었고 제프리가 존보다 연장자이기에 적법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필리프 2세는 이를 지지했고 앞으로 일을 생각해보면 아서가 왕이 됐다면 역사가 바꿨겠지만 어쨌든 존은 아서를 제거하기 위해 1202년 아서를 체포할 것을 명령한다. 마셜을 이를 수행한다. 1203년 아서는 행방불명된다. 암살된 것으로 추정.

존의 통치가 전제화되며 마셜도 존과 거리가 두어졌고 결국 폭주한던 존은 1204년 보빈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영국왕중 가장 큰 병크를 터트린다.

8. 1200


마셜은 존 왕의 특사로 영불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갔다 필리프 2세와 노르망디와 앙주 지방을 둘러싼 영투 분쟁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됐다. 마셜은 파리에 도착해서 필리프 2세를 알현하고 노력했으나 일시적인 평화 협정이 체결되는데 그치고 만다.

9. 섭정


1214년 보빈전투에 존 왕이 프랑스 군에 패배해 프랑스 내의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고 60세의 나이에 은퇴하려던 윌리엄 마셜은 부랴부랴 귀족의 봉기를 중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215년 귀족의 봉기는 결국 일어나고 1216년 10월 19일에 존 왕은 왕국 내 분쟁으로 인해 동부 지방을 순회하던 중 dysentery(이질)에 걸렸고, 상당한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링컨셔의 뉴어크 성에서 사망하게 된다.

즉 존 왕이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고 1216년 이후부터 윌리엄 마셜의 섭정이 시작했다

1217년, 프랑스의 루이 8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마셜은 이를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윌리엄 마셜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가장 유명한 것으로 1217년의 링컨 전투이다.
당시 잉글랜드는 내전 상태에 있었다. 존 왕의 사망 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군은 프랑스 루이 왕자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윌리엄은 섭정으로서 어린 헨리 3세를 보호하며 반란군과 프랑스군에 맞서야 했다.

1217년 5월, 링컨 성에 고립된 왕당파 세력을 구원하기 위해, 윌리엄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그의 군대는 약 400~500명의 기사와 수천 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반란군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숫자였다.

그러나 윌리엄은 뛰어난 전술로 이 난국을 타개해낸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세 개의 종대로 나누어, 남쪽과 북쪽, 그리고 성문 근처에 매복시켰고. 프랑스군이 성문으로 쳐들어오자, 윌리엄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는 치열했지만, 윌리엄의 맹공에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다. 결국 프랑스군 사령관인 토마 루이 백작이 전사하고,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포로로 잡히면서 전투는 윌리엄의 완승으로 끝났다.

여기에 대한 내막은 이러한데 왕당파 인사들이 반란군의 인질로 잡혀 있었기에 윌리엄은 반란군이 수성을 하는데다 그의 열세인 병력으로 어쩔수가 없자 양쪽에 매복을 시키고 직접 정면에서 도발하여 격분한 수장들이 군을 이끌고 성문으로 나왔을 때 그 공격을 받으며 뒤로 빠지다가 좌우 측면 기습으로 혼란을 주며 정면 맹공으로 적장의 목을 딴 사건이다...
링컨 전투의 승리로 윌리엄은 "프랑스인들의 공포"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70대 노장임에도 직접 전장에서 지휘한 것, 그리고 열세를 이겨내고 승리를 쟁취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

이렇게 1217년 마샬은 루이 8세를 지지하는 프랑스파 귀족들과 맞붙은 링컨 전투에서 직접 진두에 서서 지휘하며 승리를 거두는 등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고, 마그나 카르타를 수정해서 다시 발행해 존 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봉신들에게도 환영의 표시를 받기도 했다.

윌리엄 마셜은 1219년 5월 14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윌리엄 마셜은 1216년 잉글랜드의 헨리 3세가 즉위했을 때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1219년 초,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섭정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3월, 그는 서서히 쇠약해져 가던 중 캐버샴의 자택에서 황달에 걸렸다.

임종이 다가오자, 윌리엄은 템플 기사단 수도사의 승복을 입고 마지막을 준비했다고. 당시 중세 기사들에게 수도원에 은거하거나 수도사 복장으로 임종을 맞는 것은 경건한 최후를 상징하는 일이었다.

윌리엄은 런던 근교의 레딩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참석했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존경받는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렇게 그는 성전기사단의 영국 본부인 템플 교회에 묻혔다.

10. 리처드 1세와의 대결

정말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리처드 1세와의 대결이 있었다. 다만 이와 관련되어서 국내에는 "리처드 1세가 윌리엄 마샬에게 졌대"라는 단편적인 내용만 알려져 있지 상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리처드의 힘을 약화시키려던 헨리 2세의 정책에 분노한 리처드가 1187년경 반기를 들어 스스로 왕이 되려했을 때, 헨리는 그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연대한 리처드 1세헨리 2세의 베리령을 포위하였을 때, 헨리 2세가 윌리엄 마샬을 불러 가세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1189년, 헨리 2세의 마지막 농성지가 된 르망(Le Mans) 외곽에서 윌리엄 마샬은 리처드를 거의 죽일 뻔 했다고 한다. 헨리 2세가 퇴각하며 윌리엄 마샬에게 후위를 부탁했는데, 이때 리처드가 무리하게 경무장 - 투구와 겹옷만 입고 무장도 검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으로 헨리 2세를 추격하다가 갑옷과 방패,랜스로 풀무장한 윌리엄 마샬과 마주쳤다는 것이다. 리처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경무장을 했으니 자신을 죽이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며 윌리엄에게 목숨을 구명해달라 요청했고, 윌리엄은 리처드 대신 그의 말을 랜스로 찔렀다는 이야기다.[5]

이후 윌리엄은 리처드의 말을 찌른 것을 사과하지 않았지만, 리처드 1세는 그에게 헨리 2세가 약속한 약혼녀 이사벨을 내어주었다.[6] 이후 당연히 둘 간의 정식 대결은 이루어 지지 않았고, 리처드 1세는 이후 이단의 땅으로 건너가 사자심왕으로 거듭났다.

이 사건이 나온 《윌리엄 마셜 연대기》는 동양으로 치면 행장 같은 것이라 믿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는데, 《윌리엄 마셜 연대기》의 대체적인 신뢰성은 교차검증과 여타 역사학적 방법론을 통해 전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흔히 알려진 내용의 문제는 오히려 다른 데에 있는데, 애초에 연대기 자체에서도 이 사건을 서술하는 목적은 "윌리엄 마셜이 이렇게 기사도 있는 기사였고 영명하신 리처드 1세께선 그를 인정해 예전의 대립을 괘념치 않고 등용하셨다"라는 것이지 "윌리엄 마셜이 리처드 1세도 이긴 적 있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히 《윌리엄 마셜 연대기》의 본문에서도 윌리엄이 리처드와 결투 끝에 리처드를 살려보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 리처드가 무장하지 않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마셜이 리처드에게 돌진하자 리처드가 '완전한 무구를 갖추지 못한 나를 죽이는 것은 사악한 행동이 될 것'이라고 말하여, 윌리엄이 그 말이 옳음을 깨닫고 ‘그럼 악마가 그대를 대신 죽이게 하리’ 하며 그의 말을 찌른 것으로 되어있다. 연대기 내에서 이 에피소드의 요점은 비무장자 상대로 퍽치기한 거 자랑하는 게 아니라(...) "급박한 상황에서도 윌리엄 마셜이 기사도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헨리 2세가 끝내 패배, 화병으로 사망한 후 시신을 지키는 마셜과 동료들을 찾아 온 리처드가 '그대는 나를 거의 죽일 뻔했고 내가 피하지 않았으면 진짜로 날 죽였을 것'이라고 떠본 것에 대해[7] 마셜은 '저는 폐하를 죽이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창을 제 뜻대로 움직일 능력이 있고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말을 찌른 것처럼 폐하의 몸통을 찔렀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리처드는 흔쾌하게 '그대에게 악의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단순히 '사과를 안 했음에도 리처드가 용서한 것'이 아니라 '마셜은 왕의 심기를 거스를 것을 각오하고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또 기사로서의 명예를 지킨 훌륭한 기사였고, 리처드 1세는 아부보다 그 양심과 기사도를 중히 여긴 훌륭한 군주였다'라는 게 연대기 저자가 전달하려 하는 메시지이다.

이사벨과의 결혼 허가도 비슷한 내용이다. 부유한 상속녀 이사벨의 후견인은 잉글랜드 왕실이었다. 리처드가 마셜을 인정하자 마셜의 동료 모리스가 '헨리 2세께서 이사벨을 마셜에게 아내로 주셨다'고 말하는데, 리처드는 '아니다'라고 답한다. '선왕은 그러겠다고 약속만 하셨을 뿐, 지금 이사벨과 마셜의 결혼을 허락하는 것은 나'라는 것이다.간지폭풍 이 또한 단순히 이사벨을 내어준 것이 아니라, '리처드 1세께서 헨리 2세에게 끝까지 충성한 기사들을 높이 사 진실로 자신의 신하들로 받아들이셨다'는 에피소드다.

요약하면 (에피소드 자체의 신뢰성이 대체로 인정받는 것과 별개로) 마셜을 높이기 위해 저술된 것은 맞지만[8] 그 높임의 방식이 '리처드도 이긴 적 있는 강력한 기사!!'라는 1차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11. 여담

  • 그의 아들이었던 3남 길버트 마샬(Gilbert Marshal)도 기사였는데 1241년, 마상창시합에서 말발굽에 밟혀 47세 나이에 죽었다. 그의 무덤은 그의 아버지 무덤 바로 옆에 있다.
  • 결혼할 때 당대 기준으로 이미 노년에 접어든 나이(43세)여서, 많은 사람들은 17세의 신부가 곧 과부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30년을 더 살았고, 부부관계도 열정적이었는지 둘 사이에서 총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맏아들 길버트 마샬은 한술 더 떠서 34세에 25세 연하(!), 즉 9세의 신부와 결혼했으나, 불과 7년을 더 살았고 당연히 자녀는 없었다.부자가 쌍으로 로리콘 다른 아들들 역시 위의 길버트 마샬처럼 전쟁이나 사고등으로 장수하지 못했다. 결국 직계 손주는 손녀 1명 뿐, 손자를 갖지 못해 13세기에 이미 그의 직계 후손은 끊겼다. 모계 후손으로는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1세 등이 있다.
  • 장인이 리처드 드 클레어 속칭 스트롱보우 리처드인데 그 역시 소수의 군대로 다수를 격파한 뛰어난 기사였고 당시 군소국가로 난립해있던 아일랜드의 레린스터 왕 망명. 쫓겨난 왕이었던 더못이 헨리 2세에게 지배를 받을 테니 왕위를 되찾는데 도와달라고 요청. 그 도움 요청으로 파견된 스트롱보우가 브라이아 왕을 더블린 전투에서 격파. 아일랜드는 기사 돌진 위주의 전투였는데 방진전투로 받아내어 조직적으로 이겨냈다고 함.
    스트롱 보우는 이후 더못의 사위가 되어 그의 딸인 애이프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 애이프는 아들을 출산후에 죽어버리고 남은 어린 딸이 윌리엄 마셜의 부인이 된 어렸던 이사벨 클레어다. 스트롱 보우는 영토 문제 때문에 더못과 갈등이 심해졌고 1171년 5월 병사했다고 하고 더못도 1171년 괴뢰국가의 왕이 되어 헨리 2세가 귀국길에 오를 때 같이 올랐다가 1172년에 의문사했다고 한다. 독살설, 자연사설 둘다 있음.
    이 일로 아일랜드는 교황의 정복 승인까지 받아낸 잉글랜드의 침공을 받게 되고 마샬은 이사벨 클레어와 결혼. 따지고 보면 헨리 2세가 원인이고 그걸 기사 두명까지 연이어 악착까지 부려먹었다. 후에 마샬은 아일랜드 점령에도 큰 공이 있다고 한다
  • 중세사학자 조르주 뒤비(Georges Duby)가 쓴 《Guillaume le Maréchal, ou Le meilleur chevalier du monde》라는 전기가 있다. 한국에서는 《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셜》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절판되었다.

12. 봉토


윌리엄 마셜 1세는 웨일스 남동부의 펨브루크셔를 중심으로 한 광대한 영지를 보유했다. 이는 마셜 가문이 이른바 '웨일스의 군주'로 불릴 만큼 광대한 토지였다.

우선 윌리엄은 헨리 2세로부터 펨브루크 백작 작위와 함께 웨일스 남부의 광대한 영토를 받았다. 이는 그가 헨리 2세를 위해 펼친 무훈에 대한 보상이었고. 특히 펨브루크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기에, 이를 다스리는 자는 사실상 웨일스 남부 지역의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또한 리처드 1세는 윌리엄에게 글로스터셔와 햄프셔 등지의 영지를 추가로 하사했다. 이는 윌리엄이 왕의 십자군 원정 기간 동안 섭정으로서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펼친 데 대한 보답이었다.

하지만 마셜 가문이 명실상부한 거대 세력으로 도약하는 데는 클레어 가문과의 혼맥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윌리엄은 클레어 가문의 상속녀 이사벨 드 클레어와 결혼했는데, 이를 통해 클레어 가문이 잉글랜드와 웨일스, 아일랜드에 보유한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특히 웨일스 남동부의 스트리굴 로더 로즈와 아일랜드 레인스터 지방의 영지는 마셜 가문의 세력 확장에 큰 도움이 됐다.

대략 마셜 가문의 영토가 당시 잉글랜드 전체 영토의 5~10% 에 이를 정도.

13. 마샬의 후손

  • 장남 윌리엄 마셜 2세(William Marshal the Younger)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페므브로크 백작이 되었다. 그는 1224년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1231년 4월, 런던 타워에 감금되어 있던 중 병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42세였다.
    • 윌리엄 마셜 2세는 페므브로크 백작으로서 웨일스 접경 지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의 가문은 이 지역에 광대한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윌리엄 본인도 웨일스와의 국경 문제에 깊이 관여해 왔다. 1220년대에 들어서면서 웨일스와의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당시 웨일스는 여러 소국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이들은 종종 잉글랜드의 영토를 침범하곤 했다. 이에 헨리 3세는 웨일스 정벌을 추진하려 했고, 윌리엄 마셜 2세에게도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윌리엄은 파워스(Powys) 지방의 영주 르웰린 앱 이오르워스(Llywelyn ap Iorwerth)와 가까운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 1227년, 윌리엄이 허브포드셔의 몽고메리 성을 방문하면서 시작됐다. 이 성은 웨일스와의 접경에 위치한 요충지로, 당시 휴버트 드 버그(Hubert de Burgh)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버트가 윌리엄의 방문을 거부하면서 둘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 사태가 악화되자 윌리엄은 웨일스의 영주들을 불러모아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그는 아마도 웨일스 세력을 등에 업고 휴버트를 압박하려 했던 것 같았지만.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휴버트는 윌리엄이 왕을 배신하고 웨일스와 내통하고 있다고 헨리 3세에게 고했다. 이에 윌리엄은 반역 혐의를 받게 되었고, 왕의 신임을 잃고 말았다.
    • 윌리엄에게는 여러 딸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이사벨(Isabel Marshal)이었다. 이사벨은 1222년경 윌리엄의 동료 귀족이자 친구였던 길버트 베이스콘(Gilbert Basset)과 약혼한 상태였다.
    • 그러나 1230년, 상황이 급변한다. 윌리엄은 갑작스레 약혼을 파기하고, 이사벨을 리처드 콘월(Richard of Cornwall)과 결혼시키려 했던 것이다. 리처드 콘월은 헨리 3세의 동생으로, 당시 콘월 백작의 작위를 가진 인물이었고. 문제는 이 결혼이 헨리 3세의 허락 없이 이루어졌다는 데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귀족의 결혼, 특히 왕실 구성원과의 결혼에는 왕의 동의가 필수적이었는데. 그런데 윌리엄은 이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결혼을 추진한 셈. 이에 헨리 3세는 크게 분노한다. 그는 이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윌리엄에게 이사벨과 리처드를 분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이를 거부하고 결혼식을 강행한다.
    • 물론 결과는 좋지 않았다. 윌리엄은 결국 체포되어 런던 타워에 갇히게 되고, 거기서 요절하고 만다. 아마도 암살의 가능성도 크다. 이사벨과 리처드의 결혼도 왕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당시 콘월 백작도 웨일스를 장악하고 있던 윌리엄과의 혼약을 적극 추진해 서남부를 장악하려고 했는데 헨리 3세 입장에서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 차남 리처드 마셜(Richard Marshal)은 형 윌리엄이 후사 없이 죽자 페므브로크 백작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헨리 3세와 충돌하며 반역자로 몰리게 되었고, 1234년 아일랜드에서 전사하고 만다. 향년 39세.
    • 윌리엄 마셜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리처드 마셜은 페므브로크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리처드는 형의 뒤를 이어 헨리 3세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당연히도 형에 대한 원한이 있었을 것이었다. 당시 헨리 3세는 외국인 측근들, 특히 푸아티에 출신의 귀족들을 등용하며 이들에게 특혜를 베풀고 있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잉글랜드 귀족들은 리처드 마셜을 중심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마셜 가문은 이미 웨일즈 지역의 거대 봉신이었다.
    • 1233년, 리처드는 귀족들을 규합해 왕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헨리 3세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리처드를 왕실 모독죄로 몰아세웠다. 분노한 리처드는 웨일스와 아일랜드의 영지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킬 태세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에 헨리 3세는 리처드의 영지인 펨브루크셔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리처드는 웨일스인들과 연합해 왕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오히려 그는 왕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의 영지까지 위협하기에 이른다.
      • 리처드 마셜이 헨리 3세에게 반기를 들자, 왕은 즉각 그의 영지인 펨브루크셔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윌리엄 드 루시(William de Lucy)와 존 오브 몬머스(John of Monmouth) 등이 이끄는 왕군이 펨브루크셔로 진격하게 되고. 그러나 리처드는 웨일스 군주들, 특히 그윈네드(Gwynedd)의 군주 르웰린 아프 이오르워스(Llywelyn ap Iorwerth)와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르웰린은 이미 잉글랜드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리처드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 1233년 4월, 리처드는 르웰린과의 동맹을 바탕으로 반격에 나선다. 이들은 우선 헤이 온 와이(Hay on Wye) 성을 공격해 함락시킨다. 이곳은 웨일스와 잉글랜드의 국경에 위치한 요새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어 5월에는 카이어펠레 성(Caerphilly Castle)을 공격한다.
      • 존 오브 몬머스는 당시 헨리 3세의 충성파 귀족으로, 웨일스 국경 지대의 방어를 맡고 있었다. 그는 리처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몬머스 인근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리처드군이 다가오자, 존 오브 몬머스는 즉각 기병대를 풀어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르웰린이 이끄는 웨일스 군대는 이미 주변의 산악 지형에 매복하고 있었고.
      • 존 오브 몬머스의 기병대가 무모하게 돌진하자, 웨일스군은 이를 산악 지대로 유인했다. 그리고는 매복해 있던 부대를 풀어 기병대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형의 이점을 살린 웨일스군의 공격에 왕군 기병대는 격파되고 말았다. 리처드군의 주력부대마저 합세하면서, 존 오브 몬머스 휘하의 왕군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를 틈타 리처드군과 웨일스군은 협공을 펼쳤고, 왕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존 오브 몬머스는 부하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리처드군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 이 성은 당시 왕군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리처드군은 르웰린의 지원을 받아 성을 에워싸고 공성전을 펼쳤다. 결국 왕군은 항복했고, 카이어펠레 성은 리처드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다.
      • 6월에는 몬머스 근처에서 존 오브 몬머스가 이끄는 왕군과 크게 맞붙는다. 이 전투에서 리처드군은 또다시 승리를 거두는데, 특히 르웰린의 웨일스군이 큰 활약을 펼쳤다고 한다. 존 오브 몬머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왕군은 큰 타격을 입는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는데, 대부분 리처드군의 우세 속에 진행됐다. 7월에는 뉴포트(Newport) 성이 함락되었고, 8월에는 카디프(Cardiff) 성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 리처드군은 잉글랜드 내부로 깊숙이 진격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우선 콘월 백작 리처드의 영지를 위협했는데, 실제로 콘월 백작령 내의 몇 개 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1233년 한 해 동안 리처드와 르웰린의 연합군은 잉글랜드-웨일스 접경 지대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왕군을 압박해 나갔다. 헤이, 카이어펠레, 뉴포트 등의 요충지가 모두 이들의 수중에 들어갔고, 이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큰 의미가 있는 성과였다. 특히 웨일스군의 가담은 이들의 전력을 배가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웨일스인들은 산악 지대에서의 전투에 능숙했고, 게릴라전 등 비정규전에도 익숙했다
    • 상황이 불리해지자, 헨리 3세는 계략을 꾸민다. 그는 리처드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며 아일랜드로 오라고 제안했다. 속임수에 넘어간 리처드가 아일랜드로 건너가자, 헨리 3세는 그를 반역자로 몰아 체포하려 했던 것. 1234년 4월 1일, 리처드는 아일랜드의 커래 근처에서 왕의 부하들과 조우하게 된다. 그는 왕의 음모를 눈치채고 부하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숫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사한다.
  • 3남 길버트 마셜(Gilbert Marshal)은 리처드의 뒤를 이어 페므브로크 백작이 되었지만, 1241년 토너먼트 경기 중 말에 떨어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
  • 4남 월터 마셜(Walter Marshal)은 재임 기간이 매우 짧았다. 1245년 길버트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 구체적인 사인은 전해지지 않는다.
  • 막내 앤셀름 마셜(Anselm Marshal)은 월터 사후 페므브로크 백작이 되었지만, 그도 1252년 후사 없이 사망했다. 아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마셜의 딸들은 모두 건재했고, 명문가와의 혼인을 통해 마셜의 혈통은 이어질 수 있었다.

  • 첫째 딸 메이틸다(Maud)는 노퍽 백작 휴 비고드(Hugh Bigod)와 결혼했다. 이들의 후손들은 후일 노퍽 공작이 되었고, 영국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 둘째 딸 이사벨(Isabel)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Gilbert de Clare)와 결혼했다. 글로스터 가문 역시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 셋째 딸 시빌(Sybil)은 데스먼드의 윌리엄 페러스(William Ferrers)와 결혼했다. 페러스 가문은 더비 백작 작위를 세습했다.
  • 넷째 딸 에바(Eva)는 라일 경 윌리엄 드 브로즈(William de Braose)와 결혼했다. 브로즈 가문은 웨일스 국경 지대의 강력한 영주였다.
  • 마지막 딸 조안(Joan)은 몬트헤르메르의 워린(Warin de Montchensy)과 결혼했다.

[1] 그래도 다행히 엘레오노르는 무사히 탈출하였다.[2] 충성의 서약을 자신을 사로잡은 이에게 할 수 있었지만 당시 분위기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3] 헨리 2세와 공동 국왕이었다.[4] 런던탑은 정복왕 윌리엄이 지은 정식 왕궁이었다. 다만 신분이 높은 정치범을 수용할 경우가 종종 있었을 뿐 헨리 7세와 왕후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출산까지 했다.[5] 출처: 외국 인터넷 기사 William Marshal - The Flower of Chivary[6] 말을 박탈당한다거나 하는 것은 당시 기사에게 있어선 커다란 손실이었다. 경제력이 떨어지는 기사라면 자신의 신분자체에 변동이 생길 정도의 일이다. 경제력에 문제가 없더라도 대단한 망신으로 두고두고 명예에 누가 될 수 있다.[7] 맞장구 친다면 리처드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지만, 동시에 마셜은 리처드를 죽이려한 확신범이자 기사도 없는 쓰레기가 된다. 거짓말이란 죄를 짓는 건 물론이다.[8] 전근대 문헌 중 그렇지 않은 것이 드물다. 높이는 것과 낮추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9] 인크레더블 헐크썬더볼트 로스 장군 역을 맡은 그 배우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