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21:26:01

링컨 전투(1217년)

제1차 남작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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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전투
영어: battle of Lincoln
파일:링컨 전투(1217).jpg[1]
시기 1217년 5월 20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링컨
원인 루이 왕자에게 점령된 링컨을 탈환하기 위한 윌리엄 마셜의 공세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헨리 3세 지지 세력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프랑스 왕국
파일:800px-Blason_fam_uk_FitzWalter.svg.png 신성교회군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윌리엄 마셜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윌리엄 롱게스피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라눌프 드 블론드빌
파일:잉글랜드 국장.svg피터 데 로슈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윌리엄 드 페러스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팔케스 드 브레오테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니콜라 드 라 에이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토마 뒤 페르슈
파일:800px-Blason_fam_uk_FitzWalter.svg.png 로버트 피츠월터
파일:800px-Blason_fam_uk_FitzWalter.svg.png 세르 드 퀸시
파일:800px-Blason_fam_uk_FitzWalter.svg.png길버트 드 클레어
파일:800px-Blason_fam_uk_FitzWalter.svg.png 헨리 드 보훈
병력 기사 400명, 석궁병 250명, 기병 및 보병 수백 명 기사 611명, 보병 1,000명
피해 불명 기사 300명 생포, 토마 뒤 페르슈 전사.
결과 헨리 3세 지지 세력의 승리.
영향 프랑스-신성교회군 세력의 위축.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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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남작 전쟁 시기인 1217년 5월 20일,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헨리 3세 지지 세력이 루이 왕자와 반란군 세력에 장악된 링컨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전투. 제1차 남작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로 손꼽힌다.

2. 배경

1216년 5월, 존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잉글랜드 귀족들의 초대로 런던에 입성한 루이 왕자는 자신을 잉글랜드 국왕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루이 왕자는 존 왕의 독선적인 정치에 환멸을 느낀 잉글랜드 귀족들의 투항을 받아내면서 잉글랜드 남동부와 북부 일부를 성공적으로 장악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도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8월에 칼라일을 점령한 뒤 남쪽으로 파고들면서, 잉글랜드 왕국 내 토지의 영주로서 루이 왕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1216년 9월, 존 왕은 코츠월드에서 새로운 병력을 집결한 뒤 반란군에게 포위된 윈저성을 돕는 척하다가, 방향을 틀어서 런던을 우회한 뒤 동쪽으로 케임브리지까지 공격하여 링컨셔와 동앵글리아의 반군 지역을 분리했다. 이후 북쪽으로 진군하여 링컨 성을 포위한 반란군을 격파했고, 뒤이어 린으로 이동해 더 많은 보급품을 대륙으로부터 공급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린에서 이질에 걸렸고, 노팅엄셔의 뉴어크 성에 이르렀다가 증세가 악화되어 1216년 10월 18일 밤에 사망했다.

존 왕이 사망하자, 그의 9살된 어린 아들 헨리 3세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고, 윌리엄 마셜섭정을 맡았다. 이 소식이 전국에 퍼지자, 존 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귀족들은 헨리 3세까지 적대하는 걸 망설였다. 그들은 존 왕을 증오했지만, 잉글랜드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어린 아이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까지 적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여겼다. 여기에 윌리엄 마셜이 공정하고 정당한 통치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새로운 왕의 이름으로 마그나 카르타를 재발행하자, 많은 귀족이 이에 감화되어 헨리 3세 지지로 선회했다. 그러나 루이 왕자는 자신만이 잉글랜드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고 헨리 3세를 타도하려 했다. 마셜은 루이를 잉글랜드에서 몰아내기 위해 공세를 개시하기로 하고, 먼저 레스터셔로 진군해 루이가 손에 넣었던 성들을 공략한 뒤 링컨으로 방향을 돌렸다.

3. 전개

링컨은 잉글랜드 중심부에 있는 성채 도시로, 로마식 고속도로인 에르민 스트리트와 포스 웨이의 교차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링컨을 장악한다면, 국가 무역과 세금 수급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당시 루이의 군대는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링컨 시를 접수했지만, 링건 성채는 니콜라 드 라 에이라는 이름의 귀족 여성이 몇년 전에 사망한 남편 제라드 드 켄빌을 대신해 지켰다. 마셜의 군대는 링컨에서 북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스토우 마을로 이동했다. 이때 마셜의 군대에 동행하던 윈체스터 주교 피터 데 로슈가 비밀 통로를 통해 링컨 성에 잠입한 뒤 니콜라에게 곧 왕실군이 포위군을 공격할 거라고 알렸고, 니콜라는 이에 고무되어 저항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당시 링컨 성을 포위하던 페르슈 백작 토마 뒤 페르슈도 적군이 인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적군의 규모는 파악하지 못했다. 조언자들의 의견은 2개로 나뉘었다. 마샬의 군대가 비교적 적다고 믿은 이들은 개활지에서 마셜과 전면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반면, 마셜이 많은 병력을 끌고 왔다고 여긴 이들은 일부 병력이 마셜을 저지하는 동안, 나머지 병력은 링컨 성채를 총공격해 함락하자고 주장했다. 치열한 논쟁을 거친 끝에, 페르슈 백작은 방어선을 구축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1217년 5월 20일, 마셜은 링컨 시의 북문으로 진군했고, 기사 팔케스 드 브레오테가 이끄는 석궁병들이 돌격해 적의 미약한 저항을 분쇄하고 북문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페르슈 백작은 성 공격에 전념하느라 미처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후 마셜의 주력군이 북문을 통해 링컨 거리를 질주하며 적군과 맞서 싸웠고, 브레오테의 석궁병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적을 향해 석궁을 발사했다. 적군이 이렇게 신속하게 쳐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프랑스-신성교회군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다가 6시간 만에 붕괴되었다. 페르슈 백작은 항복을 제안받았지만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했고, 신성교회군 수뇌부 대다수가 생포되었다. 포로가 되지 않은 루이의 군대는 링컨 시 남문을 통해 런던으로 도주했지만, 도중에 링컨과 런던 사이의 마을 주민들의 매복 공격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4. 결과

연대기 기록에 따르면, 기사 300명이 링컨 전투에서 생포되었다고 한다. 링컨 시는 루이에게 충성한 대가로 마샬의 군대에게 철저히 약탈당했다. 이때 성당과 수도원도 약탈을 면치 못했는데,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파문된 루이 왕자를 따랐으니 정당한 교회 건물로 볼 수 없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병사들에게 유린되는 걸 모면하려고 아이들과 함께 배를 타고 도시를 탈출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나중에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루이 왕자는 링컨 전투에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루이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받들고 그의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고 조직하고 지휘하는 데 도움을 준 귀족들이 이 전투에서 한꺼번에 생포되어 버렸다. 이후 루이는 프랑스 왕국에서 보내오는 물자에 의존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프랑스 해군이 잉글랜드 해군에게 샌드위치 해전에서 궤멸되면서 더 이상 기대기 힘들었다. 결국 1217년 9월. 루이 왕자는 램버스 조약을 통해 헨리 3세의 잉글랜드 왕위 등극을 받아들인 뒤 프랑스로 귀환했다.


[1] 13세기 연대기 작가 매튜 파리스의 연대기에 그려진 링컨 전투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