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21:38:53

윈저 공방전

제1차 남작 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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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 공방전
영어: Siege of Windsor
시기 1216년 7월 ~ 9월
장소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주 윈저
원인 존 왕에게 반기를 든 신성 교회군과 프랑스군의 윈저 성 장악 시도.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존 왕 지지 세력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프랑스 왕국
파일:800px-Blason_fam_uk_FitzWalter.svg.png 신성교회군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앵겔라르 드 시고니 파일:800px-Arms_of_the_Kings_of_France_(France_Ancien).svg.png 느베르 백작 에르베 4세
병력 기사 60명과 종자 및 석궁병 수십 명 수천 명
결과 존 왕 세력의 승리.
영향 프랑스-신성교회군 세력의 위축.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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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남작 전쟁 시기인 1216년 7월 ~ 9월, 존 왕에게 반기를 든 신성교회군과 프랑스 연합군이 런던 근교의 윈저 성을 포위하면서 벌어진 공성전.

2. 상세

1215년 6월 15일, 윈저 성채에서 런던을 장악한 반란군과 대치하던 존 왕은 윈저성 근처의 러니미드에서 반군 지도자들과 접견했다. 이후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의 중재로 평화 협정을 담은 헌장이 작성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이다. 이 헌장은 단순히 귀족들의 특정 불만 사항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농노나 비자유 노동이 아닌 자유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춘 광범위한 정치 개혁안을 제시했다. 헌장은 교회 권리 보호, 불법 투옥으로부터의 보호, 신속한 사법 접근, 귀족의 동의가 있어야만 하는 새로운 과세, 봉건적 봉건 지급에 대한 제한을 약속했다. 또한 25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존이 앞으로 헌장을 준수하는지 감시할 것이었다. 또한 런던은 존 왕에게 돌아가고, 반란군은 해산하기로 했다.

그러나 양측은 상대방의 진의를 의심했다. 반군 귀족들은 귀족 위원회를 강경파로 채우고, 합의한 대로 군대를 해산하거나 런던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존 왕은 이에 대응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도움을 호소하면서, 헌장이 교황청이 존의 주군이 된 1213년 협정에 따른 교황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존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고, 헌장을 "부끄럽고 모욕적일 뿐만 아니라 불법적이고 부당하다"고 선언하고 반군 귀족들을 파문했다. 반란군 지도부는 인노첸시오 3세의 파문을 유도한 존 왕에 반발하여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존 왕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공세로 궁지에 몰린 반란 귀족들은 프랑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고 싶으니, 군대를 이끌고 와달라고 요청했다. 루이 왕자는 헨리 2세의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카와 결혼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루이 왕자는 즉시 이에 응해 함대를 조성하여 잉글랜드로 건너갈 준비에 착수했다.

1216년 5월, 루이 왕자는 영국해협으로 출항했다. 존 왕은 그를 막기 위해 해군을 항구에 집결했지만, 불행히도 심한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흩어졌다. 그 사이, 루이 왕자는 켄트주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다. 존 왕은 루이 왕자를 즉시 공격할지 고심하다가, 우수한 전투력을 갖춘 프랑스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자기 부하들의 충성심이 의심되기도 했기에 루이를 즉시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존은 잉글랜드 서부로 방어를 재편했다. 그러나 그사이에 그동안 그를 따랐던 윌리엄 롱게스피를 포함한 추종자 여럿이 반군에 투항해 버렸다. 그 후 루이 왕자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반란군은 여름이 끝날 무렵에 잉글랜드 남동부와 북부 일부를 장악했으며, 루이 왕자는 귀족들에 의해 런던에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1216년 7월, 느베르 백작 에르베 4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잉글랜드 반란군이 런던 근교의 윈저 성채를 포위했다. 당시 윈저 성채 수비대장은 앵겔라르 드 시고니였다. 그는 투르 바로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시고니 출신으로, 1210년 존 왕에 의해 글로서트셔와 헤리퍼드셔의 순회 판사로 선임되어 행정 및 사법 문제를 전담으로 맡았으며, 존 왕의 뜻에 따라 세금을 거둬들였다. 1215년 반포된 마그나 카르타 제50조는 세금을 무자비하게 거둬들인 대표적인 인물로[1] 지탄받아 대관직에서 영원히 추방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존 왕은 그의 헌신을 잊지 않았고, 1216년 4월 22일에 엥겔라르를 윈저 성주로 선임했다.

느베르 백작은 윈저 성채를 포위한 뒤 투석기를 여러 대 제작하여 성채에 바위를 퍼부었다. 하지만 엥겔라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기사 60명과 함께 반복적으로 출격해 적군을 여러 차례 격퇴했다. 당대 프랑스 연대기에 따르면, 투석기 2대가 수비대에 의해 줄이 절단되었고,기욤 드 세리스라는 이름의 아르투아 기사가 전사했다고 한다. 그렇게 윈저 성이 2개월간 버티는 동안, 잉글랜드 서부에서 전력을 재정비한 존 왕은 9월에 웨일즈 군인들을 이끌고 코프에서 윈저로 진군했다. 그러나 막상 윈저 성채 인근에 이른 그는 일주일간 적군과 대치하하기만 하다가 잉글랜드 동부로 진군하면서 반란군 진영의 영지를 약탈했다.

이후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은 2개로 나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공격군은 존 왕이 물러난 뒤에도 윈저 성을 공격했지만, 캠브리지셔와 에식스에서 존 왕의 군대가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포위를 풀고 존 왕을 추격했다고 한다. 반면 또 다른 작가들은 느베르 백작이 존 왕이나 엥겔라르에게 매수되어 존 왕이 잉글랜드 동부에 있으니 그를 잡으러 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윈저 성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아무튼 윈저 성은 반란군의 공세를 물리쳤고, 윈저 성주 엥겔라르는 전쟁이 끝난 뒤 오스퍼드셔에 있는 벤슨 영지를 수여받았다.


[1] '시고니의 제랄드'로 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