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윌리엄 롱게스피 William Longespée | |
생몰년도 | 1167년경 ~ 1226년 3월 7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미상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솔즈베리 | |
아버지 | 헨리 2세 | |
어머니 | 아이다 드 토시니 | |
아내 | 솔즈베리의 엘라 | |
자녀 | 윌리엄 2세, 스티븐, 리처드, 니콜라스, 이사벨라, 엘라, 아이다, 메리, 페트로닐라, 페르넬 | |
직위 | 제3대 솔즈베리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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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담 해전에서 필리프 2세의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으며, 제1차 남작 전쟁 시기에 존 왕과 헨리 3세 부자를 따랐다.2. 생애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2세와 토시니 가문의 일원인 아이다 드 토시니의 사생아이다. 헨리 2세는 윌리엄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1188년 링컨셔의 애플비를 영지로 수여했다. 8년 후, 이복형인 리처드 1세는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피츠패트릭의 외동딸이자 상속녀인 엘라를 그의 반려자로 삼아줬다. 그는 이를 통해 제3대 솔즈베리 백작이 되었으며, 솔즈베리 백작령에 속한 광활한 영지를 얻었다.리처드 1세 치세에 발간된 헌장에 따르면, 그는 리처드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난 사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빼앗은 땅을 회복하기 위한 리처드 1세의 원정 당시 노르망디에 있었다. 이후 존 왕의 치세 동안 여러 중요한 의례 행사에 참석했으며, 윌트셔의 고위 순회판사, 가스코뉴 보안관, 도버 순회판사, 잉글랜드 남동부 5개 항구 감독관, 웨일스 변경 순회판사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았다. 1205년 존 왕의 지시에 따라 소규모 기사들을 이끌고 푸아투로 향해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1210 ~ 1212년 웨일스와 아일랜드 원정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210년 노리치 주교 존 드 그레이와 함께 아일랜드 총독을 역임했고, 서퍽주의 아이 마을을 영지로 수여받았다.
1205년 ~ 1212년 캔터베리 대주교 선임 문제로 존 왕과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간의 갈등이 심화된 끝에 존 왕이 파문에 처해졌다. 그러나 존 왕이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 뜻을 고집하자, 인노첸시오 3세는 1213년 1월 필리프 2세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해 존 왕을 폐위하라고 권고했다. 필리프 2세는 교황의 지시에 순종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수아송에서 프랑스 귀족들을 소집한 뒤 교황 특사 판둘프 베라치오의 격려하에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위한 대규모 함대를 소집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존 왕은 프랑스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 교황과 타협하기로 했고, 교황청은 잉글랜드 전체를 봉헌하고 십자군 원정에 나서겠다는 존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파문을 취소했다.
1213년 5월 존 왕과 교황청 간의 합의가 비준되자, 필리프 2세는 판둘프 베라치오의 권유에 따라 잉글랜드에 대한 원정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 대신, 존 왕이 아직 파문 중이었을 때 수아송에서 소집한 회의에 불참하고 잉글랜드 원정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불충한 봉신인 플란데런 백작 페랑을 응징하기로 하고, 당초 잉글랜드를 치려던 대규모 함대를 플란데런 침공으로 돌렸다. 이 소식을 접한 존 왕은 윌리엄 롱게스피에게 플란데런 백작을 도우라고 명령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 및 플란데런 무장병 700명과 수행원 수백 명, 많은 용병을 수백 척 함대에 태운 뒤 5월 28일 출항해 5월 30일 즈윈강 어귀에 이르렀다. 이때 프랑스 함대는 잉글랜드 함대가 플란데런에 온다는 걸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함선을 담 해변에 정박하고 겐트를 포위했으며, 많은 선원들은 주변 마을들을 약탈했다.
윌리엄 롱게스피는 프랑스 함대와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 몰랐기에, 처음에는 플란데런 함대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정찰선을 보내 살펴본 결과 프랑스 함대임을 인지했고, 함선들이 거의 텅 빈 상태인 걸 알게 되자 즉시 공격해 정박해 있던 함선 300척을 나포하고 100척을 불태웠으며, 배에 남아있던 선원들을 약탈했다. 다음 날 육지에 상륙한 뒤 담 시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자 남은 프랑스 함선들을 사냥하려 들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 2세는 매우 격노해 6월 2일 담에 도착한 뒤 잉글랜드군을 축출했다. 이후 다수의 선원이 최근까지 잉글랜드의 영토였던 푸아티에나 노르망디 출신인 점을 의심해 살아남은 선박을 불태우고 담 마을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렇듯 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윌리엄 롱게스피는 1214년 프랑스 북동부를 침공한 존 왕의 동맹자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를 돕고자 분견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그는 부빈 전투에서 우익 부대를 지휘했지만, 참패를 면치 못하고 보베 주교 필리프 드뢰가 휘두른 철퇴에 맞아 무력화된 뒤 생포되었다. 그 후 몸값을 지불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때, 잉글랜드에서는 제1차 남작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잉글랜드 남부에서 왕실군을 지휘해 반란군과 맞섰고, 윌트셔의 종신 대법원관을 역임했다.
1215년 11월, 존은 강력한 공병대를 동원해 우수한 공성 무기를 대량으로 만든 후 반군 남작 윌리엄 도비니가 지배하던 로체스터 성을 집중적으로 타격한 끝에 탈환했다.(로체스터 공방전) 그 후 군대를 분할하여 윌리엄 롱게스피에게 1개 분견대를 보내 런던 북쪽과 동부 앵글리아를 탈환하도록 했고, 본인은 노팅엄을 거쳐 북쪽으로 향해 북부 남작들의 영지를 공격했다. 두 작전 모두 성공적이었고, 반군 대부분은 런던에서 꼼짝 못 했다. 그러나 1216년 5월 루이 왕자가 강력한 프랑스군을 거느리고 런던에 입성한 뒤 반란 세력에 의해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되고 존 왕이 잉글랜드 서부로 후퇴하자, 윌리엄은 여러 추종자와 함께 반군에 투항했다.
1216년 10월 18일, 존 왕이 이질에 시달리다가 병사했다. 그 후 9살의 헨리 3세가 왕위에 오르고 윌리엄 마셜이 섭정을 맡은 뒤 마그나 카르타를 따르겠다고 선언하자, 윌리엄은 헨리 3세 편으로 돌아섰다. 1217년 5월 20일 링컨 전투에 참여해 반란 세력 수장들을 모조리 체포하는 데 공헌했다. 1217년 데번의 대법원장으로 선임되었고, 1224년 스태퍼드셔와 슈럽셔의 대법원장에 임명되었다. 1225년 가스코뉴로 파견되어 푸아투 탈환 작전을 지휘하다가 잉글랜드로 돌아오던 중 폭풍에 휘말려 배가 침몰해 버렸고,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프랑스의 레 섬에 있는 수도원에서 몇 달간 피난 생활을 하다가 구조되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226년 3월 7일 솔즈베리 성에서 사망했다. 연대기 작가 웬도버의 로저는 그가 권력 독점을 꾀한 휴버트 드 버그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신빙성은 불분명하다. 사후 솔즈베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솔즈베리의 엘라(1187 ~ 1261): 제3대 솔즈베리 여백작.
- 윌리엄 2세 롱게스피(1209 ~ 1250): 제4대 솔즈베리 백작.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알 만수라 전투에서 전사했다.
- 리처드 롱게스피: 솔즈베리 서기이자 사제.
- 스티븐 롱게스피(1216 ~ 1260): 가스코뉴 총독, 아일랜드 재판관.
- 니콜라스 롱게스피(? ~ 1297): 솔즈베리 주교.
- 이사벨라 롱게스피(? ~ 1244년 이전): 알닉의 영주 윌리엄 드 베시의 부인.
- 페트로닐라 롱게스피: 미혼인 채 사망.
- 엘라 롱게스피: 제6대 워릭 백작 토머스 드 보몬트와 초혼, 와이컴의 영주이자 판사 필립 바셋과 재혼.
- 아이다 롱게스피: 더들리 남작 랄프 드 소머리의 아들 랄프와 초혼, 베드퍼드 남작 윌리엄 드 뷰챔프와 재혼.
- 메리 롱게스피: 미혼인 채 사망.
- 페르넬 롱게스피: 이름만 언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