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남작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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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체스터 공방전 영어: Siege of Rochester | ||
시기 | 1215년 10월 13일 ~ 11월 30일 | |
장소 | 잉글랜드 왕국 켄트주 로체스터 | |
원인 | 존 왕의 마그나 카르타 추인 거부로 인한 내전 발발 | |
교전국 | 존 왕 지지 세력 | 신성교회군 |
지휘관 | 존 왕 | 윌리엄 도비니 |
병력 | 수천 명 | 95 ~ 145명 기사 및 석궁병, 종자 수십 명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존 왕 세력의 승리. | |
영향 | 존 왕의 맹공과 신성교회군 세력의 루이 왕자 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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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남작 전쟁 시기인 1215년 10월 13일 ~ 11월 30일, 존 왕이 이끄는 잉글랜드 왕실군이 신성교회군이 장악한 로체스터 성을 포위 공격한 공성전2. 배경
1204년, 잉글랜드의 존 왕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의 맹공으로 노르망디 공국, 렌 백국, 앙주 백국을 상실했다.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노르망디를 탈환하기 위해 막대한 군자금을 조속히 마련하려 했다. 그는 왕으로 재위한 17년 동안 세금 징수금은 11번 부과했다. 많은 경우 실제 군사 작전이 없는 상황에서 세금 징수금을 부과했는데, 이는 세금 징수금이 실제 군 복무의 대안이라는 원래의 생각과 상치되었다. 존은 영지와 성을 상속받았을 때 구제금 지급을 요구할 권리를 최대한 활용했으며, 때로는 남작의 지급 능력을 넘어서는 엄청난 금액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에 귀족과 자유민 모두 막대한 재산을 강탈당하고 있다며 불만을 품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존 왕이 "탐욕스럽고, 인색하고, 강탈적이며, 돈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간주했다.또한, 존 왕은 자신에게 도전할 만큼 충분한 권력과 부를 가진 귀족들을 깊이 의심했다. 초대 펨브로크 백작이며 충성심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유명한 기사 윌리엄 마셜은 존의 견제와 의심에 시달려야 했으며, 아일랜드에 영지를 소유했던 제4대 브램버 영주 윌리엄 드 브라오스는 40,000마크에 달하는 거액을 지불하라는 왕명을 거부했다가 왕의 군대에 쫓겨 해외로 망명했다가 1211년 사망했고, 아내 모드와 자식 한 명은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그의 손자들은 1218년까지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왕에게 충성하는 영주들 역시 존의 의심과 질투에 시달려야 했다. 상황이 이러니 귀족들이 존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 만무했다.
그러던 1214년 2월, 존 왕은 필리프 2세로부터 노르망디 공국을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많은 영주들이 군 복무를 거부했기 때문에, 용병 기사들을 대거 고용해야 했다. 그는 푸아투에 상륙한 뒤 북동쪽으로 파리를 향해 진군하고, 동맹 세력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 불로뉴 백작 르노, 플란데런 백작 페랑이 윌리엄 롱케스피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와 합세한 뒤 플란데런에서 프랑스 북동부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전이 잘 먹히면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양분할 수밖에 없으니, 연합군은 적을 성공적으로 협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원정은 초기엔 잘 진행되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의 중앙 집권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위그 9세 드 뤼지냥과 화해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느베르 백작 에르베도 그의 편애 섰다. 그 후 존은 3월에 푸아투를 장악한 뒤 루아르강을 건너 앙주를 침공했다. 필리프 2세는 이를 막기 위해 아들 루이 왕자과 함께 정예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는 소뮈르와 쉬농을 거쳐 아키텐으로 향하는 존의 퇴각로를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존 왕은 이를 알게 되자 앙주를 버리고 남쪽으로 재빨리 이동해 4월 3일 리모주에 도착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를 가능한 남쪽으로 유인해, 연합군이 플란데런에서 프랑스 북동부를 실컷 유린하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필리프 2세는 존 왕을 더 이상 쫓기를 거부하고, 푸아투의 반란 세력이 지닌 영지를 약탈한 후, 샤토루에서 수천 병력을 아들에게 넘긴 뒤 파리로 귀환했다. 존 왕은 필리프 2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방향을 바꿔서 5월에 푸아투로 이동했다. 이후 루아르강을 빠르게 건너 앙주를 재차 침공했고, 루이 왕자의 추격을 교묘하게 따돌려 많은 마을을 접수한 뒤 6월 19일 로슈오무앵 성을 포위했다. 이후 15일간 공방전을 이어가고 있을 때, 루이 왕자가 기욤 드 로슈와 아이머리 1세 드 크라옹이 이끄는 앙주 징집병들의 지원을 받아 인근으로 진군했다.
존 왕은 이들을 요격하려 했지만, 앙주에서 모집한 귀족과 장병들이 그를 위해 프랑스 왕자와 싸우길 거부했다. 결국 존 왕은 7월 3일에 루아르강을 다시 건너 라 로셀로 후퇴했는데, 그 과정에서 후위대가 루이 왕자의 군대에 요격되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얼마 후, 존 왕은 1214년 7월 27일 부빈 전투에서 오토 4세, 르노 1세, 페랑이 이끄는 연합군이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에게 완패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 후 존 왕은 필리프 2세와 협상한 끝에 앙주를 필리프 2세에게 반환하고 보상금을 지불하며, 6년간 휴전을 맺는 평화 협약을 맺고 1214년 10월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존 왕이 잉글랜드로 돌아온 직후, 잉글랜드 북부와 동부에서 귀족들이 왕의 무자비한 통치와 무능을 성토하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연합군을 형성한 뒤 런던으로 진군했다. 존 왕은 1215년 1월 런던에서 회의를 열어 잠재적 개혁을 논의했고 봄 동안 옥스퍼드에서 그의 대리인과 반군 간의 논의를 후원했다. 그러면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십자군을 이끌 테니 자신에게 지지를 표명하는 편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교황의 서신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인노첸시오 3세의 서한은 1215년 4월에 도착했지만, 그때는 이미 반군 귀족들이 강력한 위세를 구축한 뒤였다. 그들은 5월에 노샘프턴에 집결해 존과의 봉건적 관계를 포기하고 에식스주 리틀던모의 봉건 귀족이자 베이너드 성의 치안관인 로버트 피츠월터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느님의 군대"라고 자칭하면서 런던으로 진군해 런던시와 링컨, 엑서터를 접수했다. 이에 존을 따르던 왕당파 귀족들이 대거 이탈했고, 존은 별수 없이 캔터베리 대주교 랭턴에게 반군 귀족들과 평화 회담을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1215년 6월 15일, 존은 윈저성 근처의 러니미드에서 반군 지도자들과 접견했다. 랭턴의 중재 노력으로 제안된 평화 협정을 담은 헌장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이다. 이 헌장은 단순히 귀족들의 특정 불만 사항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농노나 비자유 노동이 아닌 자유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춘 광범위한 정치 개혁안을 제시했다. 헌장은 교회 권리 보호, 불법 투옥으로부터의 보호, 신속한 사법 접근, 귀족의 동의가 있어야만 하는 새로운 과세, 봉건적 봉건 지급에 대한 제한을 약속했다. 또한 25명의 귀족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존이 앞으로 헌장을 준수하는지 감시할 것이었다. 또한 런던은 존 왕에게 돌아가고, 반란군은 해산하기로 했다.
그러나 양측은 상대방의 진의를 의심했다. 반군 귀족들은 귀족 위원회를 강경파로 채우고, 합의한 대로 군대를 해산하거나 런던을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존 왕은 이에 대응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도움을 호소하면서, 헌장이 교황청이 존의 주군이 된 1213년 협정에 따른 교황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존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고, 헌장을 "부끄럽고 모욕적일 뿐만 아니라 불법적이고 부당하다"고 선언하고 반군 귀족들을 파문했다. 반란군 지도부는 인노첸시오 3세의 파문을 유도한 존 왕에 반발하여 본격적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3. 경과
로체스터 성채는 본래 캔터베리 대주교의 관활이었는데, 존 왕이 캔터베리 대주교 선임을 놓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오랫동안 갈등을 벌인 끝에 교황이 지명한 스티븐 랭턴을 새 대주교로 세우는 걸 받아들이는 대가로 로체스터 성의 통제권을 왕실 무관장인 레지널드 드 콘힐에게 임시로 넘기게 했다. 그 대신 그 성은 1215년 부활절이 대주교의 통제로 돌아가야 했지만, 국내에서 반란이 발발하자 로체스터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로 1216년 부활절로 연장되었다.마그나 카르타가 체결된 후, 로체스터 성은 캔터베리 대주교 관할로 돌아갔다. 그러나 왕실과 반란군 진영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내전이 발발할 조짐이 보이자, 존 왕은 스티븐 랭턴에게 로체스터 성을 다시 왕실군에게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따. 하지만 반란군은 랭턴이 왕의 압력에 굴복하여 로체스터 성을 넘길 거로 여기고, 랭턴을 설득해 로체스터 성을 자기들에게 넘기게 했다. 랭턴은 곧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로 이동했고, 로체스터 성이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존 왕은 켄트 백작이자 최고 재판관 휴버트 드 버그에게 보낸 서신에서 랭턴에 대한 좌절감을 표현하며, 그를 "우리의 로체스터 성을 우리에게 크게 필요한 시기에 내주지 않은 악명 높은 반역자"라고 칭했다.
13세기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로체스터 성에 주둔한 반군은 벨부아르 영주 윌리엄 도비니가 이끌었다. 로체스터 수비대에 소속된 기사는 연대기에 따라 95 ~ 145명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외에 석궁병 및 종자 수십 명이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 남동부에서 반란군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용병을 모집하던 존 왕은 수천 병력을 이끌고 로체스터로 진군했다. 선봉대가 10월 11일에 로체스터 시를 기습 점령했고, 10월 13일 존 왕이 도착한 뒤 로체스터 성채를 포위했다. 그 후 존 왕은 반란군이 집결한 런던에서 구원군이 오는 걸 막기 위해 다리를 허물었다.
존 왕은 성 남쪽의 볼리 힐을 본부로 사용한 뒤 성채 공격을 진두지휘했다. 반웰 연대기에 따르면, 우수한 공병대가 제작한 투석기 5개가 성벽에 밤낮으로 돌을 퍼부었고, 궁수들이 활과 석궁을 성벽을 향해 쏟아부으며 지원했다. 그 결과 외벽에 큰 구벙을 냈다고 한다. 반면에,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투석기 공격은 효과가 없었고, 존 왕은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곡괭이를 생산해 땅굴을 판 뒤 성벽에 구멍을 냈다고 한다. 반란군은 10월 26일 런던에서 기병대 700명을 파견해 로체스터 성을 도우려 했지만, 존 왕이 중간에서 이들을 요격하려 하자 물러났다.
이윽고 외벽이 무너지자, 수비대는 내성으로 후퇴했다. 내성이 투석기의 공격을 견뎌내자, 존 왕은 땅굴을 파서 성벽을 무너뜨리려 했다. 존 왕은 11월 25일 휴버트 드 버그에게 아래의 지시가 담긴 서신을 보냈다.
낮과 밤으로 가장 살찐 돼지 40마리를 최대한 빨리 보내어 탑 아래에 불을 가져오게 하라."
장병들은 존 왕의 독려에 힘입어 성의 남동쪽 모서리 아래까지 판 뒤, 땅굴을 지탱하는 나무 받침대에 불을 붙여 땅굴을 무너뜨리고 성의 한 모소리를 무너뜨렸다. 그래도 수비대는 버텼고 성의 돌 칸막이 또는 십자벽 뒤에 숨어서 저항을 이어갔다. 반웰 연대기에 따르면, 성채의 구조가 매우 튼튼해서 무너진 절반을 다른 절반과 분리하는 매우 튼튼한 벽이 있었고, 이 때문에 토벌대는 도시 절반을 차지하고도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기 위해 공세를 이어가야 했다.
이후 요새 내부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수비대는 말고기를 먹어야 할 정도로 식량난에 시달렸다. 윌리엄 도버니는 식량 수요를 줄이기 위해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을 요새에서 내보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토벌대는 성벾 밖으로 나온 그들의 손과 발을 절단했다고 한다. 1215년 11월 30일, 수비대는 결국 전원 항복한 뒤 생포되었다. 존은 처음에 수비대가 길고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을 강요했을 때의 전통에 따라 수비대를 전원 처형하려 했다. 이때 투아르 자작이자 몰레옹 영주인 사바리 드 몰레옹이 존에게 반란군이 왕실 수비대에게도 비슷한 대우를 할 거라며 그러지 말라고 설득했다. 존은 그 말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섬겼다가 배신한 석궁수 한 명을 교수형에 처한 것을 뺀 나머지를 포박해 코프 성 등으로 보내져 안전하게 보호되었다. 반웰 연대기 작가는 로체스터 공방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시대는 그렇게 힘들게 압박을 받고 강력하게 저항한 포위 공격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중략) 이후로는 성을 신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4. 이후
로체스터를 공략한 뒤, 존 왕은 군대를 분할하여 윌리엄 롱게스피에게 1개 분견대를 보내 런던 북쪽과 동부 앵글리아를 탈환하도록 했고, 본인은 노팅엄을 거쳐 북쪽으로 향해 북부 남작들의 영지를 공격했다. 두 작전 모두 성공적이었고, 반군 대부분은 런던에서 꼼짝 못 했다. 1216년 1월, 존은 반군과 동맹을 맺은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2세의 잉글랜드 북부 침공에 신속하게 대응했다. 그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알락산더르 2세의 영지를 공략하고, 10일 만에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를 포위했다.존 왕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공세로 궁지에 몰린 반란 귀족들은 프랑스 왕국에 사절을 보내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고 싶으니, 군대를 이끌고 와달라고 요청했다. 루이 왕자는 헨리 2세의 손녀인 카스티야의 블랑카와 결혼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루이 왕자는 즉시 이에 응해 함대를 조성하여 잉글랜드로 건너갈 준비에 착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존 왕은 루이가 이대로 건너가서 반란군에게 필요한 군함과 공성 무기를 가져오면 일이 틀어져 버린다고 여기고, 알락산더르 2세와 휴전 협약을 맺은 뒤 남쪽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1216년 5월, 루이 왕자는 영국해협으로 출항했다. 존 왕은 그를 막기 위해 해군을 항구에 집결했지만, 불행히도 심한 폭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흩어졌다. 그 사이, 루이 왕자는 켄트주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다. 이리하여 내전은 존 왕을 계속 받드는 세력과 루이 왕자를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으로 모시려는 세력 간의 전면전으로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