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02 18:27:57

로버트 피츠월터

파일:로버트 피츠월터.jpg
성명 로버트 피츠월터
Robert Fitzwalter
생몰년도 미상 ~ 1235년 12월 9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주 리틀 던모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주 리틀 던모
아버지 우드햄의 월터 피츠로버트
어머니 모드 드 루시
형제 앨리스, 리처드, 시몬, 월터, 모드
아내 군노르 드 발로뉴, 로헤세
자녀 로버트, 월터, 크리스티나
직위 리틀 던모 영주, 베이너드 성주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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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귀족, 군인. 제1차 남작 전쟁에서 존 왕에 대항하는 귀족 반란군의 수장으로 활약했다.

2. 생애

리틀 던모 영주인 우드햄의 월터 피츠로버트와 헨리 2세 치세 때 에식스 보안관과 잉글랜드 대법원장을 역임한 리처드 드 루시의 딸 모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앨리스[1], 리처드, 시몬, 월터, 모드가 있었다. 증조부 리처드 피츠길버트는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한 뒤 서퍽주 클레어의 초대 영주가 되었으며, 조부 로버트 피츠리처드는 헨리 1세의 집사를 맡았으며, 헨리 1셍에게 리틀 던모의 영주권과 런던 근교 베이너드 성의 성주로 선임되었다. 이후 피츠월터 가문은 베이너드 성주로서 런던 시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무역에 종사했는데, 로버트 본인도 무역에 뛰어들었으며, 존 왕으로부터 특별한 특별을 받은 와인 수송선을 소유했다.

출생연도 및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180년 라니쉬르마른에서 청년왕 헨리의 주관하에 열린 마상창시합에서 기사 신분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1198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베닝턴 영주 로버트 드 발로뉴의 딸 군노르와 결혼해 30과 1/2 파운드의 기사 수수료를 받았으며, 아버지로부터 66파운드가량의 기사 수수료를 물려받았다. 또한 군노르의 삼촌인 제프리 드 발로뉴를 통해 2개의 기사 수수료를 얻었고, 1204년에는 삼촌이자 윈체스터 주교인 고드프리 드 루시의 영지 소유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이 시기에 잉글랜드에서 가장 드넓은 영지 소유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200년, 로버트는 왕의 허가 없이 결혼한 혐의로 동생 시몬이 받은 벌금의 절반을 보장했다. 1201년 노소의 숲과 관련한 분쟁과 관련해 세인트 알반스 수도원과 합의했다. 또 다른 소송은 그가 하트퍼드 성의 관리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1202년 8월, 존 왕은 왕실 특허장을 통해 로버트를 허트퍼드 성 관리인으로 임명했으며, 유대인 대금업자에게 진 그 가족의 빚도 면제해 줬다. 1203년 초 노르망디 공국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는 존 왕을 모셨고, 2월과 3월에는 루앙에 있었다.

로버트는 사촌이며 나중에 초대 윈체스터 백작이 되는 세르 드 퀸시와 함께 외르강 어귀의 르 보드뢰유 성의 공동 성주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 2세가 쳐들어오자, 두 사람은 요새화되고 보급품도 잘 갖춰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2세에게 투항했다. 필리프 2세는 그들을 콩피에뉴 감옥에 가뒀다가 5천 마르크에 달하는 막대한 벌금을 받아낸 뒤 풀어줬다. 이에 대해 당대 연대기들은 보드뢰유의 항복은 로버트와 세르 드 퀸시가 비겁했기 때문이라고 맹비난했다.

1203년 7월 5일, 존 왕은 루앙에서 윌리엄 마셜이 증인으로 선 가운데 로버트가 마셜의 명령에 따라 보드뢰유 성을 넘겨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1월 말 로버트의 사촌인 윌리엄 도비니가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그의 땅 일부를 여전히 판매했다. 1206년 10월, 로버트는 투아르에서 존 왕과 필리프2세가 휴전 협정을 맺을 때 증인이 되었다. 그러던 1212년, 로버트는 존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었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존 왕은 그의 장녀를 유혹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다른 원인을 들먹이기도 했으며, 나중에 다른 영주들도 그와 비슷한 비난을 존 왕에게 퍼부었다. 현대 학자들은 웬도버의 수도자이자 당대 연대기 작가 로저가 기술했듯이 "잉글랜드 영주들을 극심한 빈곤으로 몰아넣은 부당한 착취"가 로버트와 같은 영주들 불만의 주된 이유였을 거로 추정한다.

그는 존 왕이 캔터베리 대주교 선임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한 끝에 인노첸시오 3세에게 파문당하자, 존 왕을 축출하기 위해 알윅 성 영주 유스타스 드 베시, 귀네드 왕국의 국왕 허웰린 압 요르웨르스 등의 반란에 호응해 왕을 생포할 계획을 세웠다. 존 왕은 허웰린을 진압하고자 노팅엄으로 군대를 진군할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로버트를 비롯한 귀족들이 존 왕의 군대에 동원되었다가 존 왕을 생포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존 왕은 외국 용병들을 데리고 런던으로 돌아간 뒤 정규군을 해산했으며, 각 귀족에게 친척 한 명씩 인질로 보내도록 했다. 대부분의 귀족은 그렇게 했지만, 로버트와 유스타스는 각각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존 왕은 로버트와 유스타스에게 영구 추방을 선고했고, 1213년 1월 14일 베이너드 성을 무력으로 접수하고 에식스에 있는 로버트의 베닝턴 성과 그 주변 숲을 파괴했다. 그의 누이인 앨리스는 존 왕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길버트 페체와 자기 딸인 앨리스를 인질로 보내야 했다.

1213년 5월 13일, 존 왕은 인노첸시오 3세와 화해했다. 이후 5월 27일에 로버트가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특허장을 발급했으며, 그의 영지는 7월 19일에 회복되었다. 또한 존 왕으로부터 보상으로 100마크를 받았고, 그의 손실에 대한 일반적인 조사를 지시했다. 그해 8월, 로버트는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이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머물면서 헨리 1세가 서명한 헌장을 읽고 영국의 파문이 해제되기 전에 예배드릴 수 있다는 주장에 찬성했다.

1214년 11월 4일, 로버트는 버리 세인트 에드먼드에서 스티븐 랭턴과 다른 귀족들과 비밀리에 회동했다. 그들은 부빈 전투의 패배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된 채 잉글래드로 쓸쓸히 귀환한 존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기로 했고, 수도원 교회 제단에서 크리스마스까지 그들의 헌장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존 왕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맹세했다. 1215년 1월이 되어도 존 왕이 자기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자, 그는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고 다른 귀족 몇 명과 함께 갑옷을 입고 런던에 있는 기사단 본부를 방문해 부활절까지 휴전하고, 거병할 준비를 하자고 밝혔다.

1215년, 로버트는 부활절 주간(4월 19일~26일)에 스탬퍼드에 모인 귀족 명단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었다. 그는 4월 27일 노샘프턴셔의 브랙클리로 진군하는 반란군 영주들과 동행했다. 존 왕이 요구사항을 거부하자, 귀족들은 로버트를 "신과 거룩한 교회의 군대의 원수"라는 칭호와 함께 그를 자신들의 총사령관으로 선포했다. 로버트 등은 존에 대한 충성을 엄숙하게 포기하고 노샘프턴을 포위했다. 그러나 노샘프턴 공방전과 뒤이은 베드퍼드 공방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로버트의 기수가 전투 도중에 전사했다. 하지만 5월 17일, 로버트는 런던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선두에 서서 런던에 입성한 뒤 여전히 런던 탑에서 버티는 존 왕 추종자들을 에워쌌다. 이후 유대인의 파괴된 집에서 가져온 돌을 사용하여 런던의 성벽을 수리했다.

1215년 6월 15일, 존은 러니미드에서 귀족들을 만난 뒤 그들이 제시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기로 했고, 귀족들은 존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갱신했다. 마그나 카르타의 최종 초안에는 합법적인 재판의 결과를 제외하고는 추방형을 선고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로버트의 개인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는 마그나 카르타 조항들이 실제로 수행되는지 감독하기 위해 임명된 25명의 집행자 중 한 명이었다. 이후 평화가 잠시 이뤄졌고, 로버트는 하트퍼드 성의 관리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귀족들은 무장병들을 유지했고, 로버트는 여전히 "신의 군대와 거룩한 교회의 원수"로 활동했으며, 런던을 존 왕에게 순순히 넘기길 거부했다. 로버트는 존 왕이 자신을 암살하려 들 것을 우려해 성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6월 29일) 다음 월요일에 스탬퍼드에서 열릴 토너먼트를 1주일 연기하고, 회의 장소를 하운슬로 히스로 옮겨서 귀족들이 런던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 가깝게 했다. 8월 26일, 존 왕과 귀족들은 스테인스에서 회의를 열어서 서로 간의 입장차를 좁히려 했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자, 로버트 등은 반기를 들기로 했다.

로버트는 캔터베리 대주교 스티븐 랭턴이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존 왕의 요청에 따라 자기들을 파문한 것에 동요해 로체스터 성을 존 왕에게 넘기려 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로체스터 성으로 가서, 로체스터 수비대장인 레지널드 드 콘힐의 동의를 얻고 성을 은밀히 점령했다. 존 왕의 군대가 곧 출진해 로체스터 다리를 끊고 로체스터 요새를 포위했다. 로버트는 한때 로체스터 성을 구하려 했지만, 존 왕의 군세가 워낙 강하자 런던으로 후퇴했다. 결국 로체스터 공방전은 11월 10일 존 왕에게 항복했다.

그 후 존 왕이 맹공을 퍼부으면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윌리엄은 윈체스터 백작과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워주고 인질 24명을 받기로 했다. 윌리엄은 1216년 초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루이 왕자는 5월에 상륙했다. 그 후 로버트는 에식스와 서퍽 주민들이 외국인 왕으로 간주하던 사람을 받들라고 강요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10월 19일 존 왕이 사망하고 9살된 어린 아들 헨리 3세가 왕위에 오르자, 잉글랜드 주민과 귀족들은 존 왕의 살아남은 마지막 아들을 왕위에 오르는 게 루이 왕자를 받드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고 헨리 3세 편으로 대거 귀순했다.

1216년 12월 6일, 루이 왕자는 하트퍼드 성을 공략했다. 로버트는 오랫동안 자신의 보살핌을 받았던 이 성을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주군을 배신한 자는 신뢰할 수 없다고 비난했고, 루이 왕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권했다. 이렇듯 잉글랜드 귀족, 민중에게 점차 경원시되고 프랑스인들이 통제에 불응하는 상황이 이어졌지만, 그는 자기가 루이 왕자에게 너무 깊이 충성했기에 충성 대상을 번복해 봐야 소용없다고 여겨 반란군을 계속 이끌었다.

1217년 4월 30일, 로버트는 런던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지휘해 레스터셔의 마운트 소렐을 포위 공격했다. 그는 도중에 세인트 올번스 수도원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수도원 연대기 작가 매튜 파리스에 따르면 병사들은 매우 굶주려서 수도원의 모든 보급품을 먹어 치웠다고 한다. 그는 마운트 소렐 포위 공격을 해제하고 링컨으로 진군해 도시를 점거하고 링컨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던 1217년 5월 20일 윌리엄 마셜이 이끄는 헨리 3세 충성파 군대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반란군은 이 전투에서 참패했고, 로버트는 아들 로버트 및 대다수 귀족과 함께 생포되었다. 이후 옥고를 치르던 그는 제1차 남작 전쟁이 종결된 직후인 1217년 10월 8일 감옥에서 가택 연금으로 변경되었고, 1218년 1월 24일 가석방되었다.

1219년, 로버트는 윈체스터 백작 세르 드 퀸시, 아룬델 백작 윌리엄 도비니와 함께 제5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십자군 주력이 브린디시를 떠난 직후인 8월에 제노바를 출발해 9월 쯤에 아크레에 도착했다. 이후 1219년 가을에 이집트의 다미에타 공방전을 치르던 십자군과 합류했다. 십자군은 1221년 8월까지 이집트에 머물렀지만, 그는 도중에 병을 앓고 십자군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남은 인생을 잉글랜드에서 평화롭게 보냈고, 헨리 3세 정부와 화해했다. 1225년 2월 11일, 그는 헨리 3세의 대헌장 3차 확인의 증인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1230년 6월 에식스와 하트퍼드셔에서 반포된 군비 조례[2]에 따른 재판을 맡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매튜 파리스에 따르면, 그는 1235년 12월 9일에 사망했고, 리틀 던모에 있는 프리오리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군노르 드 발로뉴(? ~ 1207년 이후): 베닝턴 영주 로버트 드 발로뉴의 딸.
    • 로버트 피츠월터: 링컨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생포되었으며,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 월터: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 로헤세
    • 크리스티나: 제3대 에식스 백작 윌리엄 피츠제프리 드 맨더빌의 부인.


[1] 캠브리지셔 보안관 하몬 페체의 아들 길버트 페체의 부인[2] 모든 영국의 자유민이 왕과 왕국을 위해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의무와 "단순히 그들의 땅이나 동산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그들의 팔다리에 대한 복수"의 고통에 따라 왕에게 충성을 맹세할 의무에 관한 선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