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라눌프 드 블론드빌 Ranulph de Blondeville | |
생몰년도 | 1170년 ~ 1232년 10월 26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몽고메리셔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 월링포드 | |
아버지 | 위그 드 케벨리오크 | |
어머니 | 베르트레이드 드 몽포르 | |
배우자 | 콩스탕스 드 브르타뉴, 푸제르의 클레망스 | |
자녀 | 마거릿 | |
직위 | 체6대 체스터 백작, 초대 링컨 백작, 아브랑챙과 베생 자작. |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남작 전쟁에서 존 왕과 헨리 3세의 편에 서서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한 잉글랜드 반란군과 대적했으며, 제5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고, 휴버트 드 버그와 최고 권력을 놓고 대립했다.2. 생애
<체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라눌프는 1170년에 몽고메리셔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아버지 위그 드 케벨리오크는 제5대 체스터 백작이자 아브랑슈 자작이었으며, 어머니 베르트레이드 드 몽포르는 몽포르 영주 시몽 드 몽포르[1]의 누이였다. 11살이던 1181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제6대 체스터 백작이 되었고, 1188년 또는 1189년에 기사 작위를 맡았다. 그는 부계와 모계 모두 대규모 영지를 보유한 집안이었기에, 기사 61명을 상시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누렸다.1186년 8월 19일,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가 파리 궁정에서 병사했다. 조프루아 2세의 아버지이자 잉글랜드 국왕 겸 노르망디 공작 헨리 2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계속 자기 영향권으로 붙들어놓기 위해 조프루아 2세의 아내이자 브르타뉴 여공작인 콩스탕스 드 브르타뉴에게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인 라눌프와 결혼하라고 강요했다. 결혼식은 1188년 또는 1189년 2월 3일에 거행되었다. 그러나 콩스탕스와 브르타뉴 귀족들은 이를 모욕적인 처사로 여기고, 라눌프가 리치먼드 백작으로서의 영예를 누릴 뿐 브르타뉴 공작을 자처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1191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함께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에서 시칠리아 국왕 탕크레디와 메시나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4살이었던 그의 조카이자 콩스탕스와 조프루아 2세의 아들인 아르튀르 1세는 리처드 1세에 의해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아르튀르가 성년이 되면 탕크레디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이었다. 1196년, 콩스탕스는 브르타뉴 귀족 총회에서 9살된 아들 아르튀르를 공동 공작으로 세웠다. 이에 리처드 1세는 장차 아르튀르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려 했던 자기 계획이 파탄났다며 불만을 품고, 콩스탕스에게 아르튀르를 자기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콩스탕스가 아들을 넘기길 거부하자, 리처드 1세는 그녀에게 바이외로 출두하라고 명령한 뒤, 자기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는 걸 인정하지 않은 콩스탕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라눌프에게 그녀를 납치하라고 명령했다. 라눌프는 콩스탕스가 퐁토르송을 방문했을 때 납치한 뒤 텔레리에 있는 자기 성에 가뒀다. 콩스탕스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르튀르는 급히 브레스트 성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파리로 이동해서 필리프 2세의 보호를 받았고, 브르타뉴 성직자 및 귀족들은 콩스탕스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리처드 1세는 브르타뉴 대귀족들이 인질을 인도하는 대가로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대귀족들이 인질을 데리고 오자, 그는 인질 뿐만 아니라 이들을 이끌고 온 귀족들까지 감옥에 가뒀다. 이에 분노한 브르타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필리프 2세와 전쟁을 치르던 리처드 1세는 1198년 콩스탕스와 브르타뉴 인질들을 전원 석방하고 브르타뉴 귀족들과 화해했다.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가 리모주 성을 공격하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에 콩스탕스는 리처드 1세의 강압으로 이뤄졌던 라눌프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기 드 투아르와 재혼했다. 1200년, 라눌프는 푸제르의 클레망스와 재혼했다. 그녀는 푸제르 영주 기욤의 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마거릿은 로앙 자작 조프루아 1세의 아내가 되었다. 그는 이 결혼으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많은 재산을 확보했다. 한편 라눌프는 아르튀르 1세와 존 왕이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툴 때 존 왕의 편에 섰다. 1199~1204년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내며 존 왕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1204년 ~ 1205년 겨울에 잉글랜드를 상대로 봉기한 웨일스인과 협상하다가, 존왕이 그가 웨일스인들과 손잡고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의심하는 바람에 광대한 영지를 일시적으로 몰수당했다. 하지만 오해가 풀린 뒤 곧 돌려받았으며, 1209 ~ 1212년 존 왕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해 웨일스 평정에 일조했고, 1213 ~ 1214년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를 놓고 존 왕과 분쟁을 벌인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평화를 이루는 데 기여했으며, 1214년 존 왕의 푸아투 원정에 동행했다.
1215년 잉글랜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존 왕의 조언자로서 반란 귀족과 협상한 끝에 마그나 카르타 체결에 기여하고 증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자기 영지 내 소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그들을 달래기 위해 마그나 카르타의 내용을 각색한 체스터 대헌장을 반포했다. 이후 벌어진 제1차 남작 전쟁에서, 그는 광대한 영지와 수많은 성을 거느렸기 때문에 내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라눌프 본인은 윌리엄 마셜과 더비 백작 윌리엄 2세 드 페러스 등과 함께 존 왕을 따랐지만, 그가 거느린 영지 내 귀족 상당수는 반란군에 가담하거나 중립을 고수했다.
1215년 랭커서 주의 주권자로 선임되어 보안관을 임명할 권리를 누렸으며, 1216년 랭커셔의 고위 보안관, 스태퍼드셔의 고위 보안관, 슈롭셔의 고위 보안관을 역임했다. 1216년 10월 존 왕이 사망한 뒤 9세의 어린 아들 헨리 3세가 왕위에 오르자, 많은 이는 라눌프가 헨리 3세의 섭정이 될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라눌프가 딴 곳에 가 있는 사이, 글로스터에 모인 귀족과 성직자들은 윌리엄 마셜을 섭정으로 추대했다. 이에 사람들은 라눌프가 자기가 섭정이 되어야 한다며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지만, 1216년 10월 29일 글로스터에 도착한 라눌프는 마셜이 섭정이 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밝히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라눌프는 마셜이 마그나 카르타의 개정판을 재발행하는 데 협력해 잉글랜드 반란 세력이 대거 귀순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그는 잉글랜드 북부 및 중부 지방에 자리를 잡으면서 북부 귀족들이 반란 귀족들에 의해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된 뒤 잉글랜드 남부에서 활동하던 루이 왕자와 연합하는 걸 막는 임무를 착실히 수행했다. 이때 그는 레스터셔의 마운트소렐에 있는 웬체스터 백작 세르 드 퀸시의 성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는 세르 드 퀸시가 반란에 가담한 걸 응징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지만, 사적으로는 그의 조부인 제4대 체스터 백작 라눌프 드 제르농이 윈체스터군에 의해 쫓겨난 것에 보복하고 영지를 확대하려는 계획을 품었다.
루이 왕자는 윈체스터 백작의 설득을 따라 윈체스터에 구원군을 보냈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라눌프는 이미 군대를 철수하고 링컨으로 진군하는 마셜과 합세했다. 1217년 5월 20일, 라눌프는 마셜이 링컨 전투에서 링컨 성을 포위 공격하던 반란군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1217년 5월 23일, 라눌프는 전투의 승리에 공헌한 대가로 링컨 백작에 선임되었다.
1218년, 라눌프는 제5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제노바에서 네베르와 라 마르슈 백작과 합세했고, 더비, 아룬델, 윈체스터 백작도 동행했다. 그 후 일행과 함께 이집트를 장악하러 출진해 다미에타 항을 봉쇄했다. 그러나 장병들이 얼음처럼 차가운 겨울을 보낸 후 뜨거운 여름에 시달리면서 고통을 겪는 걸 지켜보던 라눌프는 1219년 9월 아이유브 왕조로부터 십자군이 이집트에서의 전쟁을 포기하는 대가로 베들레헴, 나자렛, 예루살렘, 중부 팔레스타인과 갈릴리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총대주교 펠라기우스와 사령부는 이교도와의 협상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후 다미에타 원정이 지지부진하자, 1220년 9월 잉글랜드 귀족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2년여간 십자군에 참여하고 귀환한 라눌프는 윌리엄 마셜이 죽고 켄트 백작 휴버트 드 버그가 최고 권력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 궁정에서는 라눌프를 지지하는 세력과 휴버트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첨예한 갈등이 벌어졌다. 1223년 11월, 팔케스 드 브레오테, 제5대 허트퍼드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함께 런던 탑을 접수하고 휴버트를 타도하려 했다. 새로운 내전은 요크 대주교 사이먼 랭턴의 중재로 벌어지지 않았지만, 12월 양자간의 협상이 실패하면서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다. 그러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왕에게 반기를 들면 파문을 선고하겠다는 위협을 받자 휴버트와 화해하기로 했다.
1225년 헨리 3세가 마그나카르타를 확인하도록 했으며, 1227년 산림법에 관한 분쟁을 성공적으로 중재했고, 1230년 ~ 1231년 헨리 3세의 푸아투 원정에 참여해, 윌리엄 마셜의 아들 윌리엄이 1231년에 급사하자 그가 이끌던 군대를 지휘해 앙주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프랑스군이 브르타뉴 국경에 도착하는 걸 막지 못했다. 1231년 6월, 라눌프는 헨리 3세와 프랑스 왕국간의 3년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이렇듯 잉글랜드 국왕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걸 잊지 않았다. 1220년 자신의 영지 중 일부를 토지세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1229년 교구에 세금 징수원이 들어오는 걸 차단했다. 그러나 1232년 그의 영지에 토지세가 부과하는 걸 피하지 못했다. 1232년 10월 26일 월링포드에서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내장은 월링포드 성에 묻혔고, 심장은 디울라크레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그의 조카인 제9대 헌팅턴 백작 존이 1232년 11월 21일 헨리 3세에 의해 체스터 백작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