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04 14:36:36

존 위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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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ycliff (?[1]~1384)

1. 개요2. 생애3. 유산

1. 개요

한번 보십시오. 고위 성직자들이 세상의 사치와 악덕에 얼마나 지독하게 물들었는지, 그래서 세상의 눈에 그들이 얼마나 부자로 비치게 되었는지.

잉글랜드의 철학자, 신학자로 마르틴 루터보다 150년이나 앞선 종교개혁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생전에는 탄압을 받았고, 사후에는 부관참시되어 화형을 당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체코)의 얀 후스, 독일 작센 지방의 마르틴 루터, 스위스의 츠빙글리가 차례로 나타나며 그의 행적과 주장에 대해여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현재에는 마르틴 루터에 앞선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 생애

1320년대경 잉글랜드 요크셔 지방에서 출생한걸로 보인다. 정확한 생년은 현재 알수 없다.

1340년대 잉글랜드에 흑사병이 돌아서 잠시 학업을 중단한걸 제외하면 어린시절부터 조기교육을 받았으며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계속해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했다. 1354년엔 메르톤 대학의 강사로 부임, 1360~1361년경엔 발리올 대학 교수로 사역했다. 1365~1367년경엔 옥스퍼드의 켄터베리홀 교수를 지냈다.

1377년경 에드워드 3세가 사망하자 흑태자라 불린 장남 에드워드는 1년전에 이미 사망했고, 에드워드 3세의 장손자이며 , 흑태자의 외동아들 리처드 2세가 즉위하는데 10살에 불과한 미성년이라 에드워드 3세의 4남이며 리처드 2세의 삼촌인 랭커스터 공작(곤트의 존)이 섭정을 했다. 섭정은 잉글랜드 학계에서 위클리프의 명망을 듣고 궁정으로 초빙했다. 당시 유럽 정세는 교황청이 양분된 상태라 아비뇽과 로마에서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었고 유럽 각 나라들이 서로 양측으로 갈라서서 편먹고 이래저래 외교전 중이었다.

그런데 잉글랜드는 과거 아비뇽 교황이 유일한 교황이며 정통성이 있던시절에도 백년전쟁 중 프랑스편만 드는 꼭두각시로 보고 대놓고 무시했으며 한때 전황이 잉글랜드에 유리할땐 아비뇽 교황청 앞에가서 대포를 들이대고 무력시위로 교황을 위협하거나 삥을 뜯을 정도로 아비뇽 교황과는 사이가 험악했다.
그런데 아비뇽 교황청이 다시 로마로 복귀하고나서, 이탈리아에서 그동안 위세를 누린 프랑스 추기경들을 숙청하자 친프랑스 추기경들은 로마에서 탈출하여 자체로 교황을 뽑았고 이전 교황청 조직이 있던 아비뇽에서 교황을 만든다. 이때문에 전유럽이 국익에 따라 편을 나눠서 한쪽은 로마편 한쪽은 아비뇽편 먹고 갈라졌는데 당연히 잉글랜드는 프랑스가 밀은 아비뇽교황은 거절하고 로마의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다. 이 당시에 위클리프는 이런 유럽 상황에서 외교관과 논쟁가로 궁정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이때 위클리프는 교황과 교회에 대한 혐오감을 생기면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위클리프는 아비뇽과 로마교황청의 이전투구 모습을 보면서 교회와 세속의 합법적 통치자들이 통치권을 어떻게 행사해야되는지 정당성과 필연성을 제시 했는데 통치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 받아 섬김받는 존재가 아니라 섬기는 존재가 되어야한다. 지배자의 이득이 아닌 피지배자의 이득을 추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렇지 못한 통치차라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고 교회권력이 영적 한계를 벗어나 세속 권력을 추구하고 확장하는것은 비합법적이다. 라고 보았다.
전근대에 이런 생각을 주장했다면 코렁탕 몇 사발을 먹어도 부족했을테지만, 당시 잉글랜드에선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이젠 양쪽에서 세금만 뜯어가려는 두 교황청(아비뇽, 로마)에 신물이 났기 때문에 잉글랜드 통치자와 지배층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위클리프는 이미 수준 이하의 병림픽을 벌이는 두 교황과 그 조직들에 대해서 도덕적인 비판에서 그친게 아니라, 현재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이 교회의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두 교황청이 성경해석 권한을 독점하며 서로를 항해 또 역사상 개혁을 요구하는 움직임까지 너 이단 타령을 하는걸 보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것이지 부패한 성직자들이 독점하라고 준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는 교황보다 위에 있다. 오직 성경만이 기독교세계의 유일한 표준이며 교황의 권위나 제도는 성경상 전혀 근거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성경을 민중들에게 나눠주려 성경 번역은 시도했으나 불가타 직역 수준이었고 이마저도 살아생전 완성하지 못했다.)

위클리프가 탄핵을 받은것은 1381년경이다. 위클리프는 1215년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가톨릭의 성만찬 교리로 확정한 화체설을 비판했는데 이는 그의 지지자였던 잉글랜드 권력자와 귀족계층 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에서 물질이 그리스도의 시제적 살과 피로 변한다는 주장을 미신을 조장하며, 성육신 원칙을 부인한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에 따르면 화체설은 가현설과 대동소이하다. 가현설 주창자들은 그리스도가 참 인간으로 오셨음을 부인한다.[2] 화체설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참 물질로 된 빵과 포도주에 임재하는것을 부인한다. 축사가 끝난 후에도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다.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지만 빵의 본질은 파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신비적 형태로 성찬에 임재하므로 빵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에 권력자들 뿐만 아니라 옥스포드대학 학자들도 의문을 제기했다. 위클리프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소수였다. 옥스퍼드에서 1381년경 그의 이론을 이단으로 선고했고 런던에서 열린 지역공의회에서도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위클리프는 궁정에서 나올수 밖에 없었고, 은퇴하여 조용히 저술에만 집중했다. 생활고 때문에 왕실에서 하사한 전택이나 개인소유의 교구를 팔아치워야했다. (당시 교구 매매, 성직매매는 만연했기에 매우 일반적이었다. 오죽하면 위클리프까지도 매매했다.)

1384년 병으로 사망하는데 이후 리처드 2세가 쫓겨나고, 섭정이었던 곤트의 존의 아들인 헨리 4세가 왕위를 찬탈했고, 그의 아들 헨리 5세시절 위클리프를 따르는 무리들은 화체설을 부인했기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결국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립교황 요한 23세[3]가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은 얀 후스를 이단으로 선고했고, 그에게 영향을 준 위클리프도 부관참시한 후 그의 저작들과 함께 태워졌다. 이단은 거룩한 땅에 묻혀선 안된다라는 이유에서였다

3. 유산

위클리프를 찬성하고 따르는 무리들은 당시 롤라드파(Lollards)로 불렸다. 위클리프는 '가난한 선교자'라 불리는 설교자들을 시골지역에 파송했다. 롤라즈 무리들은 성경에 따라 예정설을 강조했다. 위클리프와 롤라드파는 교황이 성경을 사유화하여 무기로 삼고 교회만이 성서를 해석한다는 기존 질서를 거부했다. 교회는 오히려 모든 택함 받은 사람들이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 이며 성서는 그들의 손에 들어가야하고 그러기 위해선 성서를 교육해야했고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해야했다. 이러한 운동은 영어 성경 번역의 움직임으로 마르틴 루터보다 140년이 빠르며 종교개혁시기 윌리엄 틴데일이 시도했고, 훗날 킹 제임스 성경으로 이어진다.

롤라드파의 인적구성은 대부분 중하층민이었다. 귀족들은 매우 소수만이 지지했다. 그런데 귀족중에 존 올드캐슬이 1413년 반란으로 처형되자 롤라드파 전체가 탄압을 받으며 점차 극단적 성향으로 나가게된다. 1431년에도 롤라드파 음모라는 사건으로 대거 체포하여 간련자들이 고문과 처형을 당했음에도 지하에선 저변이 오히려 확대되었다. 이들은 16세기 종교개혁시기 다시 수면으로 나와 영국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밑으로 가라앉아있던 롤라드파들이 대륙의 개혁신앙과 기존의 성서중심 신앙을 근거로 종교개혁의 지지자들이 되었다.특히나 대륙의 개혁신학이 화체설을 부인하는데 있어서 열렬한 환영을 했는데 기존 가톨릭 미사의 화체설은 빵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여겼다. 이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도 가톨릭 신학에서 벗어나지 못한 헨리 8세에게 또 다시 탄압을 받았다.

위클리프는 보헤미아의 개혁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영국 국왕은 리처드 2세의 왕비가 보헤미아 출신 안나 였는데 왕비를 따라 영국에 건너온 보헤미아인들이 위클리프의 학문과 신학을 열성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얀 후스에게도 이어진다.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불릴만 한데 100여년후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인 성서중시, 전통주의 반대, 성인 성유물 성상 숭배 반대, 죽은자에 대한 미사, 등등 주장이 비슷하기도 하지만, 중세 교회개혁 운동이 신비주의건 수도회주의건 간에 기존질서를 인정하며 도덕성회복에 치중한반면 위클리프와 그의 뒤를이은 얀 후스와 마르틴 루터는 중세 신학이 잘못되었고 잘못된 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고 주장함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일찍이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무렵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의 대표적 학자 잉글랜드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c. 1290–1349)의 영향을 받아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학문을 위주로 공부했는데, 당시 유럽에 만연했던 토머스 아퀴나스의 학문과는 다른 길 이었다. 일찌기 영국은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같은 학자들은 파리대학의 스콜라주의 즉 아퀴나스의 신학에 강한 비판자였는데 토머스 브래드워딘은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의 방식인 방법론을 받아들였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 칭의론으로 돌아갈것을 주장했으며 중세 신학이 펠라기우스주의에 물들었다며 신학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주의를 주장했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모두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에 영향을 받아 중세신학과 교회를 비판했고 종교개혁의 모토가 스콜라 철학에 오염된 신학을 바로 세운다는 취지였는걸 감안하면 절대로 우연한 일은 아니다.



[1] 문헌에 따라 1330, 1324등으로 엇갈린다.[2] 가현설은 교부시대 이단으로 선고되었는데 실제로 신이 인간의 몸으로 온것이 아니라며, 성육신과 십자가의 고난을 인정하지 않았고 바꿔치기나 환영(?)을 통해 그렇게 보여진 것이라 주장했다.[3] 1409년 피사공의회에서 로마와 아비뇽 교황을 퇴위 시키고 선출한 교황. 1413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에게 공의회를 요청하여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렸으나 정작 요한 23세가 폐위된다. 당시로 보면 정통성에선 앞섰으나 행실에 문제가 심했기에 황제도 요한 23세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