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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700><colcolor=#fff> 예루살렘 왕국 앙주 왕조 초대 국왕 풀크 Foulques | |||
이름 | 풀크 5세 당주 (Foulques V d'Anjou) | ||
출생 | 1089년~1092년 프랑스 왕국 앙제 (Angers) | ||
사망 | 1143년 11월 13일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향년 50~54세) | ||
매장지 |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성묘교회 | ||
가문 | 앙주 가문 | ||
배우자 | 아렝뷔르가 드 라 플레슈[1] (1109년 결혼 / 11126년 사망) | ||
멜리장드 (1129년 결혼) | |||
자녀 | 조프루아 5세, 엘리아, 마틸드, 시빌, 보두앵 3세, 아모리 1세 | ||
부모 | 아버지 풀크 4세 당주 어머니 베르트라드 드몽포르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재위기간 | 1131년 8월 21일 ~ 1143년 11월 13일 (12년 2개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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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루살렘 왕국의 공동 국왕.2. 생애
앙주 백작 풀크 4세와 몽포르의 베르트라드의 아들로 1089년 또는 1092년 태생으로 추정된다. 1109년 아버지 풀크 4세가 죽자 앙주의 백작 지위[2]를 물려받았다. 영지는 프랑스에 있었지만 당시 인근의 노르망디 공국이 잉글랜드 왕의 봉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풀크도 두 나라의 왕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처신을 잘 해야 했다. [3]처음에는 루이 6세를 지지했으나 헨리 1세의 딸 마틸다가 자신의 장남 조프루아 5세[4]와 결혼하면서 헨리 1세의 편에 가담했다. 이는 헨리 1세가 유일한 적자 윌리엄이 예기치 못하게 사망하자[5] 하나 남은 적자녀인 딸 마틸다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주고, 이에 대한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딸이 든든한 지원과 확실한 동맹을 얻을 수 있도록 성사한 정략혼이었다. 그러나 헨리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 스티븐이 마틸다가 여자임을 이유로 왕위를 스틸해버리자 잉글랜드는 내전(무정부시대)에 빠진다. 결국 합의 끝에 스티븐의 왕위는 인정하나 다음 왕위 계승자는 마틸다와 조프루아의 아들로, 풀크의 친손자인 헨리가 이어받기로 하면서 훗날 스티븐의 사후 헨리 2세로 즉위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풀크는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 격이 된다.1120년 풀크는 장남 조프루아에게 영지와 작위를 물려준 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 무훈을 세웠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였던 보두앵 2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장녀인 멜리장드가 왕위 계승자로 부상하였다. 보두앵 2세는 멜리장드와 그 후손이 예루살렘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프랑스의 루이 6세는 풀크를 추천했다. 풀크[6]는 멜리장드와 1129년에 결혼한다. 1130년 풀크는 멜리장드와의 사이에서 장남 보두앵을 낳았고 1131년 보두앵 2세의 사망 후 멜리장드와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를 두고 풀크와 멜리장드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멜리장드는 풀크가 1세대 십자군 세력을 대신해 자신의 세력을 끌어 들이려 하는데 불만을 가졌고, 풀크는 야파 백작 위그 2세와 멜리장드의 추문을 문제삼았다. 위그는 보두앵 2세의 충신이었으며 멜리장드의 사촌으로 왕실의 일원이기도 했다. 위그는 공동왕 중 멜리장드에게만 충성을 맹세했고 풀크에게는 충성 맹세를 거부했으며 급기야는 1134년 풀크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반란 와중에 위그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 배후로 풀크가 의심 받았다. 위그의 반란은 위그 개인의 반란일 뿐 아니라 풀크에 불만이 팽배해 있던 1세대 십자군과 2세대들의 불만이 배후에 있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풀크는 주도권을 잃고 멜리장드와 화해할 수밖에 없었으며 1136년 차남 아모리를 낳았다. 1143년 풀크는 멜리장드와 함께 아크레에서 사냥을 하다 낙마하고 만다. 워낙 심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콧구멍으로 뇌수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결국 사흘 동안 혼수상태로 있다가 사망했고 멜리장드는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고 한다.
3. 매체에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3권에서 배 불룩 나온 못생긴 대머리 아저씨로 나온다. 크게 악랄하게 묘사되진 않지만 작중 다른 서유럽인들의 묘사가 다 그렇듯이 정복욕에 눈이 먼 우매한 인간으로 나오고 멜리장드와의 관계는 억지로 맺어진 정략결혼으로 묘사된다. 멜리장드랑 화해하는 묘사도 풀크가 죽었을 때 멜리장드가 슬퍼하는 연출도 안 나온다. 역사대로 낙마로 죽는데 다름아닌 자신에게 사과하러 온 보에몽 2세의 유령을 보고 놀라서 죽은 것으로 묘사된다.(...) 여러모로 김태권다운 연출.[1] 멘의 아렝뷔르가(Eremburga del Maine)라고도 한다. 멘(Maine) 백작령의 상속녀로 풀크와의 사이에서 조프루아, 엘리아, 마틸드, 시빌 등, 총 4명의 자녀를 낳았다.[2] 앙주 백작으로서는 '풀크 5세'로 명명된다.[3] 물론 이당시는 풀크의 손자때처럼 서프랑크 전역 수준의 강대함은 아닌 노르망디공국 일대 한정이라 그렇게 위협적은 아니엇다.[4] 첫번째 아내인 아렝뷔르가 드 라 플레슈와의 아들이며 미남 백작이라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미남으로 유명했다.[5] 1120년에 타고 있던 배가 암초에 걸려 침몰하여 익사했다.[6] 앙주 백작으로서는 풀크 5세로 불린다. 예루살렘 왕으로서는 이름 그대로 그냥 풀크 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