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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드 쿠르트네


파일:Agnes of Courtenay.jpg
아모리 1세와의 혼인이 무효화된 아녜스.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아들 보두앵 4세의 재위
3. 평가4. 참고문헌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Agnès de Courtenay(쿠르트네의 아녜스).

1136년 ~ 1184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아모리 1세의 첫 아내이자 보두앵 4세, 시빌라의 모후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에데사 백국의 마지막 백작 조슬랭 2세와 손느의 베아트리체의 장녀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명목상의 에데사 백작 조슬랭 3세와 이사벨라가 있었다.

마라쉬의 레이날드와 초혼했지만 슬하의 자녀는 없었다. 이후 1157년 아모리 1세와 결혼했고 그와의 사이에서 시빌라보두앵을 낳았다.

이후 1162년 아모리 1세가 자녀가 없던 형 보두앵 3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국왕으로 즉위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녜스와의 혼인을 무효화한다. 혼인무효화의 이유로는 두 부부가 근친 관계여서[1] 그렇다거나 아녜스의 품행을 문제시했다는 견해가 잘 알려졌지만 한스 메이어(Hans Mayer)는 다음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평판을 잃은 한 여인이 예루살렘의 왕좌승계를 거의 망칠 뻔했다. 보두앵(보두앵 3세)의 동생 지파와 아슈켈론의 백작 아모리(Amaury)가 계승 후보자였지만 대주교는 그가 아그네스(Agnes)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지 않는 한 대관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대주교는 둘 사이가 너무 가깝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둘 사이에는 이미 아들도 있었다. 어느 신경질적인 역사가는 진짜 문제는 “아그네스가 예루살렘처럼 거룩한 도시에 어울리는 여왕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그네스는 난혼으로 인해 평판이 나쁘긴 했지만 역사가들이 그녀에게 워낙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여왕 자격이 있었는지는 여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그네스는 분명히 누구나 탐낼 만한 트로피였다. 그녀는 집사와 대주교 등을 애인으로 두었고 네 명의 남편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모리는 충실하게도 아그네스와 이혼했고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사이먼 시백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Mayer has demonstrated that the option advanced by some scholars, that the High Court feared that Agnes, if she became queen, would use he powers of patronage to favour the numerous noble but, landless exiles who had come to Jerusalem from her father's county of Edessa, rests on insufficient evidence. Nevertheless, it remains true that the members of the High Court in 1163 were hostile to the Courtenays of Edessa because they had rank but no land, and felt threatened by the prospect of the influence and patronage with Agnes would exercise if she were allowed to become queen.
메이어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진전된 선택지들을 보여주면서, 만약 그녀가 왕비가 된다면, 아녜스가 자신의 후원을 이용하여, 그녀의 아버지의 고향인 에데사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수많은 고귀하지만 땅 없는 망명자들을 지지하도록 하는 것을 고위 궁정 회의가 두려워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63년의 고위 궁정회의 구성원들이 에데사의 쿠르트네 가문에 적대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계급은 있으나 땅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녀가 왕비가 될 수 있다면 아녜스에 대한 영향과 후원이 행사될 것이라는 전망에 위협을 느낀 것이 사실이다.
Bernard Hamilton, Professor of Crusading History, University of Nottingham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결국 아모리 1세와 아녜스의 혼인은 무효화됐지만 두 사람의 자녀들인 시빌라보두앵적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아녜스는 아들 보두앵이 2살이 채 되기도 전에 헤어졌고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아들을 대면했으며 딸 시빌라는 베타니 수녀원장인 보두앵 2세의 막내딸 이오베타 공주[2]에게 맡겨진다. 이후 아녜스는 이벨린의 위그, 시돈의 레지날드 등과 차례로 재혼했다. 시돈의 레지날드의 두 딸인 아녜스와 유페미아가 아녜스 소생이라는 일부 견해가 있다.

이후 아들인 보두앵이 9살 때부터 한센병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병의 원인에 대한 피어스 미첼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There is no evidence that either Amalric, Agnes or Amalric's second wife Maria Comnena had leprosy, but someone who spent plenty of time with the young prince must have had the disease as he clearly caught it from somebody. It is possible that either a member of his family a wet nurse or other staff from the royal household had the disease with mild or easily concealed symptoms and that the disease spread from them. Whatever the source, the disease was contracted by Baldwin at a young age.
(부친) 아모리, (모친) 아녜스, 아모리의 두 번째 부인 마리아 콤네나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증거는 없지만, 어린 왕자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누군가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옮은 병에 걸렸을 것이다. 땀이 많은 가족의 보모나 왕실 직원 중 한 명이 가벼운 증상이나 쉽게 감춰진 증상으로 병이 옮아갔을 가능성이 있다. 그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그 병은 어린 나이의 보두앵에게 전염되었다.
Piers Mitchell

2.2. 아들 보두앵 4세의 재위

1174년 7월 11일 전남편인 아모리 1세가 사망하고 아녜스의 아들 보두앵이 13살의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4세로 즉위했다. 왕의 친어머니가 된 아녜스는 예루살렘의 궁정으로 돌아왔다. 오래 전 아모리 1세와의 혼인이 무효화되었기 때문에 아녜스의 공식적인 직함은 재혼한 남편을 따른 시돈 백작부인이었으나, 아모리의 두 번째 아내인 마리아 콤니니가 그녀에게 할당된 나블루스 남작령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예루살렘의 왕대비였다.

상기한 해밀턴의 견해에 따르면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과 좋은 관계였다.[3] 아녜스는 보두앵 4세의 병이 심각해지자 군사 원정에 동행했고 보두앵의 재위가 말년에 접어들자 그가 주재하는 고위 궁정 회의에도 참석했다.

또한 딸 시빌라가 첫번째 남편 굴리엘모 델 몬페라토와 사별하자 기 드 뤼지냥과 재혼시키는데에도 아녜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다.
아그네스는 왕의 여동생이자[4] 상속자인 시빌라(Sibylla)와 뤼지냥(Lusignan)의 기(Guy)를 결혼시켰다.
사이먼 세벡 몬티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보두앵 4세는 어머니에게 교회의 후원권을 위임했으며 아녜스의 형제이자 보두앵의 외숙부인 쿠르트네의 조슬랭도 왕실의 재정을 책임졌다.
Joscelin of Courtenay, ... was appointed to the Vacant post of seneschal. Baldwin was no doubt influenced by his mother in making this choice, but it was a sensible and indeed an obvious one. The king could trust Joscelin absolutely because he was his closet kinsman yet had no claim to the throne. He proved a very competent administrator and was completely loyal to his nephew's interests.
쿠르트네의 조슬랭은 ... 공석이었던 세네샬에 임명되었다.(이 시기는 1176년으로 보두앵의 2년간의 섭정이 종료되어 15세의 나이로 親政(친정)에 나선 단계) 보두앵은 이 선택을 하는 데 있어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현명하고 정말로 분명한 선택이었다. 왕은 조슬랭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조슬랭은 그의 친족이었지만 왕위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우 유능한 행정가로 증명되었고 조카의 이익에 전적으로 충실했다.[5]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아녜스의 동생 조슬랭은 왕실에게 다양한 영지를 증여받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182년 2월 마론과 채스텐느프의 영지였다. 이와 동시에 보두앵 4세가 토론에서 나오는 수입을 어머니 아녜스에게 허락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도 아녜스는 1184년까지 확실한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1184년 후반 대략 48세의 나이로 아크레에서 사망했으며 다음해인 1185년 봄에 아들 보두앵 4세도 향년 24세로 사망했다.

3. 평가

She received a bad press in her lifetime and his been consistently criticised by later historians as an unscrupulous, self-seeking woman of doubtful moral character. She is often accused of exploiting the ill health of her son in order to build up a faction of corrupt and inefficient favorites who monopolised power and excluded their more able rivals from office. This view rests of the evidence of two biased sources, William of Tyre's Chronicle and the Chronicle of Ernoul. William calls her 'a woman who was relentless in her acquisitiveness and truly hateful to God,' but was not an impartial witness since he held her responsible for his defeat in the patriarchal election of 1180, while Ernoul portrays her as a woman loose morals Agnes was obviously an attractive woman: there is no other reason why Amalric count of Jaffa, and Hugh of Ibelin should have married her when she was virtually penniless and, in Hugh's case, when she was no longer young. She must also have had a forceful character, otherwise she would not have provoked so much resentment.
그녀는 일생 동안 좋지 않은 여론을 받았고, 그는 후대의 역사학자들로부터 부도덕하고, 도덕적 품성에 의심이 가는 자기 추구적인 여성으로 꾸준히 비판을 받았다. 그녀는 권력을 독점하고 더 유능한 경쟁자들을 공직에서 배제하는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지지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그녀의 아들의 병에 걸린 건강을 악용했다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 이 견해는 기욤 드 티레(보두앵 4세의 스승)의 연대기와 에르눌의 연대기라는 두 가지 편향된 출처의 증거에 있다. 기욤은 그녀를 ‘그녀가 얻고자 하는 것에 가차 없고 신에게 진정으로 혐오감을 주는 여자’라고 부르지만 1180년, 총대주교 선거에서 그가 패배하도록 그녀가 도왔기 때문에 공정한 증인이 되지 못했다.[6][7] 반면 에르눌은 그녀를 도덕관념이 느슨한 초상화로 그리며 아그네스를 매력적인 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자파 백작 아말릭(보두앵의 아버지 아말릭)과 이벨린의 위그가 그녀가 사실상 무일푼이었을 때, 그리고 위그의 경우, 그녀가 더 이상 어리지 않았을 때 그녀와 결혼했어야 할 다른 이유는 없다. 그녀는 또한 힘이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렇게 많은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예루살렘의 왕궁은 음모와 계책으로 가득했다. (보두앵 4세의) 섭정인 트리폴리의 레몽을 필두로 하는 파에는 티레 대주교 기욤도 속해 있었으므로 레반트의 프랑크인들에 대해 쓴 그의 역사서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모험가들과 어중이떠중이들, 그리고 권력을 탐하는 왕족 등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왕의 모후인 쿠르트네의 아그네스였다. 그녀는 항상 아들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접근을 차단했다. ... 또 왕의 숙부요, 이름뿐인 에데사 백작 쿠르트네의 조슬랭 3세도 있었다. 이들이 보두앵을 꽉 쥐고 있었으므로, 1176년 레몽의 섭정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이들이 권력을 잡았다.
토머스 F. 매든 <십자군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In 1174 she had built a relationship with her adolescent son who can have had no conscious memories of his mother. Baldwin IV evidently became extremely fond of her and she would seem to have shown great kindness towards him in ways which would have earned her praise as a devoted mother from witness who were less hostile than William of Tyre and Ernoul. Thus when the king's illness became acute she accompanied him on campaign, and in his last years attended meetings of the High Court at Which he was presiding. Baldwin no doubt welcomed the presence of his attractive and capable mother who was genuinely concerned about his health and whom he could trust to take charge of his household efficiently. Given the circumstances of his childhood, his relationship with her must have been more like that between nephew and aunt than between son and mother.
1174년(보두앵 4세가 13세일 때, 즉위한 해)에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의식적인 기억이 없을 수 있는 사춘기 아들과의 인간관계를 맺었다. 보두앵 4세는 분명히 그녀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는 기욤 드 티레와 에르눌보다 덜 적대적인 증인으로부터 헌신적인 어머니로서 찬사를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에게 큰 친절을 베풀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병이 심각해졌을 때, 그녀는 그와 함께 군사 원정에 나섰고, 그의 말년에는 그가 주재하고 있던 고위 궁정회의에 참석했다. 보두앵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 진정으로 걱정하고 자신의 가문을 효율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 믿을 수 있는 매력적이고 유능한 어머니의 존재를 분명히 환영했다. 어린 시절의 상황을 볼 때 아들과 어머니 사이보다는 조카와 이모 사이였을 것이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4. 참고문헌

영어 위키백과 Agnes of Courtenay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시공사, 2012.
토머스 F. 매든,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루비박스, 2005.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한길사, 2004.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Cambridge University, 2005.

5. 매체에서의 등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시빌라의 발언으로만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시빌라의 결혼을 시킨 사람이 그녀였다고 한다.

극중의 배경이 1184년의 프랑스에서 시작하는 만큼 그녀는 극 진행 중에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1] 두 사람의 증조모가 자매인 8촌 지간이었다.[2] 따라서 멜리장드 여왕의 막내 동생이자 아모리 1세의 이모, 시빌라와 보두앵 4세에게는 이모할머니이다.[3] 다만 여기에는 좋지 않은 묘사도 있다. "보두앵은 어머니인 아그네스를 궁정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아직 미성년으로서 여전히 어머니의 보살핌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두앵이 심각한 신체적 시련으로 저주받았다면 그의 문제는 어머니로 인해 가중되는 결과가 빚어지고 말았다. 아그네스는 오만한 여인으로 국가의 정사에 간섭하며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앞세우려고 했다." -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4] 실제로는 누나이다. 책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5] The seneschal was the king's alter ego, who when necessary deputised for him in the work of civil government. He was also in charge of the treasury, known as the Grant Secrete, where records were kept of the boundaries of royal fiefs, and of the revenues paid to the crown by royal officials throughout the kingdom; and he was responsible for the garrisoning and provisioning of royal duties. 세네샬은 왕의 분신으로, 필요할 때 민정 업무를 대행했다. 그는 또한 Grant Secrete으로 알려진 재무부를 담당했는데 거기에는 왕실의 영지 경계와 왕실의 신하들이 왕실에 바친 수입에 대한 기록들이 보관되었고, 그는 수비대와 왕실 의무들의 준비에 책임이 있었다. /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6] 이 때의 총대주교 선거에서는 기욤을 제치고 헤라클리우스가 당선되었다. 그는 아그네스와 연인 관계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아그네스가 헤라클리우스가 총대주교가 되는 데에 기여한 것은 맞으나 그녀가 헤라클리우스와 연인이라는 소문은 악의가 있는 가십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녀가 총대주교 선거에 관여한 이유에 대해서도 영어위키에 따르면 보두앵 3세가 어머니 멜리장드에게 교회의 임명권을 위임한 전례가 있다.[7] 특히 1180년 누가 예루살렘의 새로운 총대주교가 될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불미스러운 논쟁으로 그 상황이 확실해졌다. 왕국의 강경노선들은 그 자리에 헤라클리우스(Heraclius)라는 인물을 앉히길 원했다. 비록 그는 아그네스의 편이기는 했지만 도덕적 관념이 매우 해이하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투표결과 헤라클리우스는 차석이었다. 하지만 왕은 재빨리 이 결과를 무시하고 어쨌든 헤라클리우스를 취임시키고 말았다. 어머니의 그늘에 가려 있는 나약한 왕이 권좌에 있음으로서 생겨나는 문제가 점점 명백해지고 있었다. 아그네스는 가차없이 자신의 적들을 박해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십자군 연대기 작가이기도 한 티레의 기욤도 추방당했다. 그리고 기욤은 로마에서 죽었는데, 독살당한 것이라는 일부 주장도 있었다. / W. B. 바틀릿 <십자군 전쟁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