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15:42:37

에드먼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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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웨식스 왕조 제8대 국왕
에드먼드 2세
Edmund 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mund_Ironside_-_MS_Royal_14_B_V.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에드먼드 2세
(Edmund II)
출생 990년
잉글랜드 왕국
사망 1016년 11월 30일 (향년 25~26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옥스퍼드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왕
1016년 4월 23일 ~ 1016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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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별칭 용맹왕 에드먼드
(Edmund Ironside)
아버지 애설레드 2세
어머니 엘프기프
종교 기독교 }}}}}}}}}

고대 영어: Ēadmund Isernside (용맹왕 에아드문드)
영어: Edmund Ironside (용맹왕 에드먼드)
라틴어: Edmundus II (에드문두스 2세)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4.1. 바이킹스: 발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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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먼드 2세는 11세기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다.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Ironside), 즉 '강하고 용감한 자'라는 별칭이 있다. 용맹왕, 강용왕(剛勇王) 등으로 번역된다. Ironside란 별칭이 붙은 이유는 그가 크누트 대왕이 이끄는 덴마크 침략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기 때문이다.

2. 생애

애설레드 2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엘프기프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원래는 왕위 계승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으나 그의 두 형인 애델스탄[1]과 에그베르트가 요절[2]하면서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됐다. 애설레드 2세는 나중에 노르망디의 엠마와 재혼했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참회왕 에드워드로서 에드먼드 2세와 배다른 형제가 된다.

아버지 애설레드 2세와는 다소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새어머니인 노르망디의 엠마가 본인의 어린 아들들을 왕위 계승자로 만들려고 하면서 큰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3] 부왕 애설레드 2세마저 엘프기프와의 자식들을 홀대한 것 역시 불화의 원인 중 하나였다.[4]

이러던 중 1015년에 애설레드 2세가 데인로 지역의 실력자인 지거페르트를 처형하고, 지거페르트의 아내였던 에알드기드를 수도원에 감금하자 에드먼드가 에알드기드와 결혼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부왕에게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행위였지만 복위 과정에서 귀족들과 다소 굴욕적인 조약을 맺을 정도로 권위가 실추된 늙은 왕은 이런 아들을 벌할 수 없었다. 이 결혼 사건은 애설레드 2세를 증오하던 데인로 지역 사람들과 에드먼드가 더 밀접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016년 4월 23일, 애설레드 2세가 죽었고, 런던의 시민들과 귀족들은 에드먼드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그에게 모인 시민들과 함께 다섯 차례나 크누트 대왕의 군대와 싸웠으나, 10월 18일 벌어진 애선던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 에드먼드 2세는 크누트 대왕과 평화 협약을 맺어 그는 웨식스를, 크누트는 머시아노섬브리아를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한 달 반 조금 더 지난 11월 30일에 에드먼드 2세는 숨을 거두었고[5] 크누트가 잉글랜드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덴마크인들의 침략에 맞서 용감히 싸웠기에 잉글랜드 왕 중에서는 앨프리드 대왕 다음 가는 투사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별칭이 뜻하듯이 의지가 굳고, 리더십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심지어 적이었던 크누트 대왕조차 그의 왕릉에 찾아와 참배하며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3. 여담

여담으로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의 초대 왕 헨리 2세가 이 사람의 6대손이었다. 정확히는 모계 계승이었다. 에드먼드 2세의 친손녀 웨식스의 마가렛이 스코틀랜드의 왕 말 콜룸 3세와 결혼했고, 둘 사이의 딸 마틸다가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의 제3대 왕 헨리 1세와 결혼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1세와 스코틀랜드의 마틸다의 사이에서 난 또 다른(...) 마틸다의 아들이 바로 헨리 2세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영국 왕실에도 알프레드 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4.1. 바이킹스: 발할라

영국 배우 루이스 데이비슨이 맡았다. 역사적인 기록과 극적 분위기를 절충하여 용맹함과 왕으로서의 리더십을 어느정도 갖춘 면모를 보여주기는 하는데,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지 새어머니 노르망디의 엠마와 고드윈의 현명한 조언을 내던지고 제멋대로 나서다가 일을 그르치고 만다. 실제 역사에서 잉글랜드 왕위를 두고 철저히 맞붙었던 노르망디의 엠마는 이 드라마에서 애설레드 2세의 사후에도 에드먼드가 왕권을 유지하는데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에드먼드 역시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엠마를 신뢰한다.

[1] 에드먼드 2세와 마찬가지로 용맹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에드먼드 2세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다.[2] 애델스탄은 1014년, 에그베르트는 1005년에 사망했다.[3]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린 동생이 차기 왕이 되면 장성한 이복형들의 안위는 매우 위태로워지는 것이 일반적이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4] 어느 정도였냐면 애설레드 2세가 망명길에 올랐을 때 엘프기프의 자식들은 전부 다 잉글랜드에 남기고 노르망디의 엠마의 자식들하고만 피신할 정도였다.[5] 사망 원인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아서 부상의 악화나 질병 등 여러 설이 있고, 그 중 암살설도 있는데 이 암살 방법이 걸작이다. 에드먼드 2세가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갔는데, 암살자가 변기 아래에 숨어 있다가 에드먼드 2세가 변기에 앉자 단검으로 엉덩이를 수 차례 찔러서 살해했다고.... 바리에이션으로 암살자가 엉덩이 밑에서 쏜 석궁에 맞아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 당시 성의 화장실은 해자 쪽으로 큰 구멍이 뚫려서 배설물을 해자에 버리는 형태였기 때문에 암살자가 숨어들기 쉬웠다. 그러나 이 암살설은 기록된 문헌이 별로 없어서 야사에 가까운 취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