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6 15:31:14

노르망디의 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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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mmadenormandie.jpg
이름 노르망디의 엠마
(Emma of Normandy))
생몰년도 984년~1052년 3월 6일
잉글랜드 왕비 1002 ~ 1035
덴마크 왕비 1018 ~ 1035
노르웨이 왕비 1028 ~ 1035
부친 루앙 백작 용감한 리샤르
모친 군노르
Emma de normandie (프랑스어)
Emma of Normandy (영어)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애설레드 2세와의 결혼2.3. 스벤 트베스케그의 침략과 망명2.4. 크누트 대왕과의 재혼2.5. 해럴드 1세의 지배2.6. 참회왕 에드워드의 등극과 죽음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노르망디의 엠마는 11세기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의 왕비이다. 본래 잉글랜드 왕 애설레드 2세의 왕비였으나 그가 죽자 잉글랜드를 정복한 덴마크 왕 크누트 대왕과 재혼하였고, 그에 따라 잉글랜드를 넘어 덴마크와 노르웨이 왕비가 되었다.

2. 생애

2.1. 출생

엠마는 984년 루앙 백작 리샤르 1세(Richard sans-peur)와 노르망디 서부의 상류층이었던 군노르(Gunnor)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후일 윌리엄 1세를 배출하는 노르망디의 지배자였고, 군노르는 부모의 이름도 전해지지 않고 출신도 명확하지 않으나 노르만족 수도자인 토리니의 로베르(Robert de torigni)에 따르면 노르망디 서부에서 한가닥 하는 부유층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동생 리샤르는 996년 아버지가 죽자 루앙 백작을 승계했다가, 후일 공작으로 승격되어 노르망디 공국을 건국하게 된다.

2.2. 애설레드 2세와의 결혼

당시 잉글랜드 왕 애설레드 2세는 덴마크인의 침략에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바이킹[1]들은 멀고 가까운 친인척들이 다스리는 루앙 백국[2]의 해안에 거점을 마련하고 잉글랜드 해안을 마구 약탈하던 터라, 애설레드는 이 일로 루앙 백작 리샤르를 비난하고, 심지어는 그 딸인 엠마를 납치하려고까지 했다.

비록 납치는 실패했으나 딸을 뺏길 뻔한 리샤르는 당연히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하지만 아직 소국이었던 루앙 백국의 힘으로는 통일 잉글랜드와 싸우는 건 무리였고, 마찬가지로 명목상 프랑스의 봉신인 루앙 백작을 공격하는 것도 애설레드 입장에서는 부담되는 일이었다. 결국 리샤르와 애설레드는 교황의 중재 아래 화해했고, 리샤르는 잉글랜드를 약탈하는 바이킹들을 돕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996년 리샤르 1세가 죽고 그 아들 리샤르 2세가 권좌에 앉자 상황은 다시 달라졌다. 1000년경부터 리샤르 2세는 또 다시 바이킹들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신난 바이킹들은 잉글랜드를 마구 털었다[3]. 이에 애설레드는 매우 분노하여 친히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의 코탕탱 반도를 침공해 리샤르를 붙잡아 끌고 오라고 명했으나, 상륙 후 육지전에서 마찬가지로 친정을 나온 리샤르의 노르만 기병대에게 완패했다.

비록 잉글랜드의 침략을 무찔렀으나 리샤르 입장에서도 잉글랜드와 계속 척을 지는 것은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혼 동맹을 제의했고, 애설레드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누나 엠마를 잉글랜드로 보내 1002년 애설레드와 결혼시켰다. 이때 엠마는 색슨족 이름인 '앨프기푸(Ælfgifu)'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2.3. 스벤 트베스케그의 침략과 망명

그런데 노르만족 왕비를 맞은 애설레드는 바이킹에 대한 분이 안 풀렸는지 잉글랜드인으로서 살고 있던 애꿎은 데인족 이주민들을 학살했다[4]. 이 사건을 1002년 3월의 '성 브라이스 축일의 학살'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경솔한 이 행동은 진짜로 위험한 적의 코털을 건드렸으니, 바로 아버지인 덴마크의 통일 왕 하랄 1세 블로탄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스벤 트베스케그였다.

스벤은 이교도 대군세 시절 데인로의 존재와 이번 학살을 명분으로 대함대를 이끌고 1013년 잉글랜드를 침략했다. 잉글랜드의 살아남은 데인족들이 모두 그에게 복종했고, 설상가상으로 리샤르와의 싸움에서도 보았듯 애설레드의 군사적 능력도 영 꽝인지라 삽시간에 잉글랜드는 덴마크인의 손아귀 속으로 들어갔다.

엠마는 두 아들 에드워드와 앨프레드(Alfred the atheling)를 데리고 먼저 노르망디로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설레드도 따라 망명했다. 둘은 스벤이 죽을 때까지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014년에야 돌아와 복위를 지원해준 영주들에게 여러 특혜를 약속하고 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2.4. 크누트 대왕과의 재혼

1016년 애설레드가 죽고 애설레드의 장남 에드먼드 2세가 뒤를 이었다. 그는 엠마의 아들은 아니고, 애설레드의 첫 아내인 요크의 앨프기푸(Ælfgifu of York)의 아들이었다.

에드먼드 2세는 용맹한 왕이었지만, 끝내 스벤의 아들 크누트 대왕에게 패배하고 죽었다. 잉글랜드 왕이 된 크누트는 엠마를 비롯한 나머지 잉글랜드 잔당들을 제압한 뒤, 엠마에게 자신과의 재혼을 강요했다[5].

이후 엠마는 크누트와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아들이 바로 크누트의 뒤를 이은 하레크누드고, 딸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아내가 되는 군힐다(Gunhilda of Denmark)이다.

2.5. 해럴드 1세의 지배

전남편 애설레드와의 사이에서 낳은 에드워드와 앨프레드는 새아버지를 피해 노르망디로 재차 망명해 삼촌 리샤르 2세의 비호를 받으며 살았다. 그 사이 엠마는 크누트와 함께 잉글랜드를 통치했는데, 1035년 그가 죽자 아들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그런데 크누트의 장남 산토끼발 해럴드(Harold Harefoot)[6]가 이복동생 하레크누드가 덴마크로 잠시 떠난 사이 엠마를 겁박해 잉글랜드 섭정직을 탈취해 잉글랜드를 장악해 버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뒤숭숭한 시기에 1036년 노르망디에 가 있던 알프레드와 에드워드가 어머니를 오랜만에 보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둘은 엠마와 애설레드 사이의 자식이라 잉글랜드에서의 입지가 불안정한 걸 알면서도 이복 동생 하레크누드가 둘을 보호해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왔던 것인데, 상술했듯 그는 덴마크에서의 분쟁 때문에 그곳에 가 있던 차였다.

엠마의 엔코미움에 따르면 결국 하레크누드의 부재에 맞춰 해럴드의 추종자들이 형제를 붙잡았고, 인두로 알프레드의 눈을 지져 죽인 뒤[7] 에드워드는 다시 노르망디로 쫓아내 버렸다고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 사건에 웨식스 백작 고드윈(Godwin of Wessex) 또한 연관되어 있다고도 주장했다.

해럴드와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던 엠마 역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노르망디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대략 5년 정도를 그곳에서 지내다가, 1040년 해럴드가 죽자 하레크누드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2.6. 참회왕 에드워드의 등극과 죽음

그러나 엠마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끝까지 밀었던 크누트의 혈통 하레크누트가 자식도 없이 요절해 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 왕위 계승자는 에드워드뿐이었고, 하레크누드도 이복형 에드워드를 지지해 주었기 때문에 엠마로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1041년 하레크누드는 에드워드를 마침내 불러들여 그의 입지를 세워주었고, 1042년 죽은 뒤 자연스럽게 에드워드가 왕위를 승계하니 그가 바로 참회왕 에드워드다.

에드워드는 엠마의 친아들이었지만, 아버지를 배신하고 크누트를 비롯한 덴마크인들에게 붙은 어머니를 매우 싫어했다. 그는 정권을 잡은 뒤 같은 해에 머시아 백작 레오프리치, 웨식스 백작 고드윈, 노섬브리아 백작 시와르드와 동맹을 맺고 어머니를 공격했다. 그녀는 반역죄로 고발되었고, 에드워드는 어머니의 영지와 특혜들을 모두 몰수해 복수에 성공했다.

하지만 곧 에드워드는 화가 풀린 건지 친어머니에게 이런 처사는 너무하다고 생각한 건지 얼마 가지 않아 영지를 돌려주고 어머니를 복권시켰다.

이후 엠마는 아들의 치세를 보며 조용히 살다가, 1052년 노환으로 죽었다. 그녀의 유해는 크누트와 하레크누드가 묻힌 윈체스터의 올드민스터 사원에 따라 묻혔고, 노르만 정복 이후의 윈체스터 주고 왈켈린(Walkelin)이 해당 성당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윈체스터 대성당에 남편, 아들과 함께 이장되었다.

그녀는 죽어서도 편치 못했는데, 잉글랜드 내전 당시 일대가 난장판이 되면서 유골이 드러나 성당 바닥에 흩어졌다고 한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다시 수습했다고.

엠마는 난세에 태어나 지극히 중세스럽게 살다간 여인이었다. 두 번의 정략 결혼을 겪었고, 두 번째 남편은 자신을 강제로 취한 침략자였으나 곧 그로부터 진실한 사랑을 찾았다.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결국 남편과 남편의 전아내의 아들에 의해 쫓겨났고, 이후 원하던 핏줄이 마침내 권좌를 얻었으나 요절하여 밉상이던 전남편과의 아들이 끝내 왕이 되었고, 마침내 제 배 아파 낳은 그 아들의 손에 몰락했다가 일말의 자비를 받고 종국에는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쓸쓸히 죽은, 당대의 여인 중에서는 손꼽힐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갔다.

3. 대중매체에서

바이킹스의 후속작 발할라에서 등장한다. 현실의 엠마보다도 더욱 교활하게 그려져 에드먼드 1세를 더욱 미워하고, 크누트 대왕과의 관계도 능동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등 약간의 각색이 가해졌지만, 행보는 거의 비슷하다.
[1] 100년쯤 전의 이교도 대군세 때와는 달리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문명화가 된 바이킹들이다.[2] 후의 노르망디 공국. 리샤르 1세는 초대 루앙 백작 롤로의 손자인데, 시대가 그리 많이 지나지 않은 터라 이때의 노르만족은 아직 바이킹들과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다.[3] 바이킹은 잉글랜드에서 약탈한 것들을 노르망디로 와 팔았다고 한다.[4] 그들은 애설스탠의 잉글랜드 통일 이후로 색슨족의 지배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한 이들의 후손이었다.[5] 엠마를 기리기 위해 집필된 엔코미움에 따르면, 처음에는 정략결혼이었지만 후일 둘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6] 크누트와 첫 번째 아내 노스햄프턴의 앨프기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이 문서에서 이상하게 앨프기푸가 많이 보이는 것 같다면 착각이 아니다[7] 즉사는 아니었고, 후일 상처가 덧나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