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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E5A6><colcolor=#000> 잉글랜드 왕국 윌리엄 1세의 왕비 플랑드르의 마틸다 Mathilde de Flandre | ||
이름 | 프랑스어 | 플랑드르의 마틸드 (Mathilde de Flandre) |
네덜란드어 | 플란데런의 마흐털트 (Machteld van Vlaanderen) | |
영어 | 플랜더스의 마틸다 (Martilda of Flanders) | |
출생 | 1031년경 프랑스 왕국 플란데런 백국 | |
사망 | 1083년 11월 2일 (향년 52세)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캉 | |
배우자 | 윌리엄 1세 (1051년 결혼) | |
자녀 | 로베르 2세, 리처드, 아델리자, 세실리아, 윌리엄 2세, 콩스탕스, 아델라[1], 헨리 1세 | |
아버지 |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 | |
어머니 | 프랑스의 아델[2] | |
형제 | 보두앵 6세, 로베르 1세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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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와 프랑스의 아델의 2남 1녀 중 둘째이자 고명딸이다.또한 잉글랜드 왕국 노르만 왕조의 초대 국왕 윌리엄 1세의 왕비이자 윌리엄 2세와 헨리 1세의 어머니다.
2. 생애
2.1. 출생과 배경
1031년에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5세와 프랑스의 아델[3]의 둘째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형제로 오빠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6세와 남동생인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1세가 있다. 마틸다의 아버지 보두앵 5세는 로베르 2세의 딸인 프랑스 공주 아델과 결혼하면서 프랑스 왕가 내에서도 상당한 입지를 갖췄는데, 1060년 처조카인 필리프 1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어 프랑스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또한 마틸다는 외가가 프랑스 왕가인 것뿐만이 아니라 친가인 플란데런 가문을 통해 카롤루스 대제와 앨프레드 대왕의 후손이기도 했다.1819년, 학자들은 캉의 '숙녀 수도원'(Abbaye aux Dames de Caen)에 안장된 마틸다의 뼈를 연구했다. 이때 학자들은 그녀의 키가 4피트 2인치(127cm)로 잘못 계산했고, 이 때문에 그녀는 키가 매우 작은 사람으로 여겨졌고 기네스북에 '영국에서 키가 가장 작은 왕비'로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1959년 재조사 결과, 그녀의 실제 키는 152cm로 밝혀졌다. 이는 당시 평균 키보다 컸다. 또한 그녀의 골격을 조사한 결과, 그녀는 매우 마른 체형이었음이 확인되었다.
2.2. 윌리엄 1세와의 결혼
1047년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노르망디 공작으로 군림한 윌리엄 1세는 여전히 자기 자리를 노리는 정적들이 곳곳에 도사리는 걸 인지하고, 입지를 다지기 위해 플란데런 백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했다. 전승에 따르면, 윌리엄이 대리인을 보내 청혼하자, 마틸다는 "나는 사생아와 결혼하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가문의 사람"이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윌리엄은 노르망디에서 브뤼헤까지 말을 타고 달려갔다. 한 버전에 따르면, 그는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서 그녀를 폭행했고, 다른 버전에 따르면 성당으로 향하던 마틸다를 길가에서 습격해 말에서 끌어내리고 진흙 더미로 던진 뒤 폭행했다고 한다. 보두앵 5세가 이 광경에 격분해 검을 뽑으려 하자, 마틸다는 아버지를 막아서며 윌리엄 외에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이 유명한 전승에 대해, 현대 역사가들은 허구로 간주한다. 보두앵 5세와 윌리엄 모두 잉글랜드 왕국에 관한 이해관계를 공유했으며, 윌리엄이 강력한 플란데런 백작을 배경삼아 입지를 다지기를 희망했듯이, 보두앵 5세 역시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2세의 저지대 국가에 대한 복속 시도에 맞서고 있었던 터라 노르망디 공국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학자들은 두 사람의 결혼 협상은 1048년부터 시작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1049년 10월, 랭스 공의회를 주관하던 교황 레오 9세가 두 사람의 결혼 승인을 거부했다. 사유는 윌리엄과 마틸다가 먼 친척이라 근친상간이라는 것이었다. 마틸다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아델은 프랑스의 경건왕 또는 현명왕이라 불린 로베르 2세의 딸로서 프랑스의 왕녀였다. 윌리엄의 백부 노르망디 공작가의 리샤르 3세와 결혼했다가 결혼 6개월만에 남편이 죽자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5세와 재혼하여 딸 마틸다를 낳았다.
또한 윌리엄의 아버지인 장엄공 로베르 1세의 어머니는 부르고뉴 공작 코난 1세의 딸 주디트, 주디트의 외할아버지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였는데 이 조프루아는 선대 앙주 백작 풀크 2세의 아들이었다. 풀크 2세는 조프루아 1세 외에도 딸 아델하이드가 있었고, 이 아델하이드의 딸이 프로방스의 콘스탄스이고 콘스탄스는 경건왕 로베르 2세의 딸인 프랑스의 아델을 낳았다.
윌리엄의 할머니인 부르고뉴의 유디트와 마틸다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아델이 같은 외증조부를 둔 외가 쪽 외삼종자매(6촌)이고, 따라서 윌리엄과 마틸다의 촌수는 외가에 외가가 겹친 11촌 당고모와 조카라, 가톨릭 못지 않게 보수적 성리학 중심의 조선에서마저 그냥 남남으로 쳤을 관계였다.[4] 그런데 교황은 이를 두고 근친혼이라고 반대한 것이다.
사촌간 혼인도 흔한 유럽 귀족가에서 11촌의 혼인 반대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이었다. 레오 9세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이전에 교회를 쇄신하고자 노력한 독일계 교황이었으므로, 당연히 원론적 입장에서 근친상간을 반대한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노르만 본진의 수장인 윌리엄이 플란데런 백국의 힘을 얻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었을 공산이 크다. 정확히는 당시엔 교황청이고 동로마 제국이고 하나같이 행패 심한 노르만을 경계하고 싫어했던 게 사실이다. 당시 레오 9세가 다스리는 교황청은 지브롤터를 넘어 이탈리아 남부를 위협하는 노르만족에게 계속 침략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1053년에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노르만족을 공격했지만 치비타테 전투에서 대패하여 인질로 붙잡혀 있었다가[5] 노르만족의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풀려나 간신히 로마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렇듯 교황청의 거부에 부딪혔지만, 1053년 이전에 외에서 윌리엄과 마틸다의 결혼식이 강행되었다. 그 후 부부는 병원 4개와 수도원 2개를 건설하는 등 교회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레오 9세는 죽을 때까지 반대했고, 이후 여러 교황도 반대했으나 결국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승인했다. 윌리엄 1세와 마틸다는 아들 4명과 딸 최소 5명 이상을 낳았다. 윌리엄에게 정부나 혼외자식이 있다는 역사적 증거도 일절 없고, 딱히 추문 같은 게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는 점을 볼 때, 부부 사이는 굉장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2.3. 정치적 역할
1066년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원정을 준비했을 때, 마틸다는 남편을 위해 개인 재산을 털어서 '모라'라는 이름을 붙인 배를 선물했다. 이 배는 잉글랜드 침공 때 윌리엄의 기함이 되었다. 그 후 마틸다는 남편이 없는 동안 노르망디 공국의 섭정을 맡았는데, 대규모 반란이나 폭동이 발생하지 않은 걸 볼 때 무난하게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후로 여섯 차례(1066 ~ 1067년, 1067 ~ 1068년, 1069 ~ 1072년, 1074년, 1075 ~ 1076)나 노르망디 섭정을 역임했다.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이 된 후에도 잉글랜드의 정국이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에, 그녀는 잉글랜드를 방문하는 걸 연기했다. 그러다가 1068년 4월, 윌리엄의 부름을 받고 잉글랜드로 온 마틸다는 5월 11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잉글랜드 왕비로서 대관식을 치렀다. 이때 그녀는 "신으로부터 신성한 자리에 올랐고, 왕권을 공유하며, 권력과 미덕으로 국민을 축복하는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노르망디에서 보냈고, 플란데런 백작이자 오빠인 보두앵 6세를 지지하고 플란데런 성직자들을 후원했다. 그녀의 자녀 중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자식은 단 한 명, 헨리로, 마틸다가 잉글랜드 북부 원정을 떠난 남편의 거점인 요크셔에 있을 때 태어났다.
마틸다는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당대 최고의 신학자로 각광받던 켄터베리 대주교 랑프랑에게 아들들의 교육을 맡겼으며, 딸들을 캉의 성 삼위일체 수녀원에 보내서 그곳에서 교육받고 라틴어를 읽고 쓰는 법을 익히도록 했다. 1079년 장남 로베르 2세가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1세의 궁정으로 도피했을 때, 마틸다는 아들을 가엽게 여겨 자금을 보내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윌리엄은 격분해 마틸다의 명령에 따라 플란데런으로 자금을 가져갔던 전령 한 명을 체포해 실명형에 처했다.
1080년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의 딸 마틸다가 출생했다. 윌리엄 1세의 아내 마틸다는 아기 마틸다의 대모가 되어줬다. 전승에 따르면, 아기 마틸다는 세례를 받던 도중 마틸다 왕비의 머리 장식을 떼어냈는데, 사람들은 그걸 보고 어린 마틸다가 언젠가 왕비가 될 징조로 여겼다고 한다. 그녀는 실제로 플랑드르의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1세와 결혼해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다.
2.4. 사망
1083년 여름 중병에 걸린 마틸다는 1083년 11월 2일에 캉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남긴 유언에 따라 잉글랜드에 있는 그녀의 많은 땅은 막내 아들 헨리에게 넘어갔고, 왕비의 관은 캉에 있는 성 삼위일체 수녀원에 넘겨졌다. 윌리엄 1세는 오래도록 함께 하며 여러 자식을 낳았고 훌륭히 보좌해줬던 아내를 잃은 상실감에 빠졌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였던 사냥을 포기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녀의 유해는 캉의 '숙녀 수도원'(Abbaye aux Dames de Caen)에 안장되었다. 윌리엄 1세는 4년 후인 1087년에 사망했고, 그녀 곁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무덤은 프랑스 혁명 시기에 파괴되었고, 유해는 밀봉된 상자에 담겨 원래 검은색 석판 아래에 다시 묻혔다.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Robert II, Duke of Normandy) | 1051년 | 1134년 2월 | 콩두사노의 시빌라 슬하 1남 |
2남 | 노르망디의 리처드 (Richard of Normandy) | 1054년 | 1070년 | |
1녀 | 노르망디의 아델리자 (Adeliza of Normandy) | 미상 | 1113년 | |
2녀 | 노르망디의 세실리아 (Cecillia of Normandy) | 1056년 | 1126년 7월 30일 | |
3남 | 윌리엄 2세 (William II) | 1057년 | 1100년 8월 2일 | |
3녀 | 브르타뉴의 공작부인 콩스탕스 (Constance, Duchess of Brittany) | 1057년/1061년 | 1090년 8월 13일 | 브르타뉴 공작 알랭 4세 |
4녀 | 블루아 백작부인 아델 (Adela, Countess of Blois) | 1067년 | 1137년 3월 8일 |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 슬하 6남 5녀[6] |
4남 | 헨리 1세 (Henry I) | 1068년 | 1135년 12월 1일 |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슬하 1남 1녀[7] |
루뱅의 아델리자 |
윌리엄 1세와의 사이에서 4남 4녀를 낳았고 이중 장남 로베르는 아버지 윌리엄과 사이가 나쁘다 못해 철천지 원수 지간이었다.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로베르가 프랑스로 도주하자 윌리엄은 로베르의 상속권 일체를 박탈하고, 죽기 전에야 유언으로 노르망디 공국을 남겨주었다.
장남 로베르는 모든 것을 잃고 프랑스로 추방당했으나 윌리엄이 죽어가면서 그래도 아들이라고 내어준 노르망디 공작 자리에 올라 로베르 2세가 되었다. 차남 리처드는 윌리엄보다 일찍 죽었고, 삼남 윌리엄은 원래라면 로베르가 물려받았어야 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막내아들인 헨리는 영지를 살 돈을 받았는데 윌리엄 2세 사후 왕위에 올라 헨리 1세가 된다. 또한 장녀 아델라의 아들인 외손자 스티븐은 헨리 1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1] 스티븐 왕의 어머니.[2] 로베르 2세의 딸.[3] 로베르 2세와 아를르의 콩스탕스의 딸.[4] 현대 사회에서도 6촌 이상 넘어가면 사실상 남이고, 당연히 11촌 정도면 결혼도 문제가 전혀 없다. 연산군의 왕비인 폐비 신씨는 7촌 고모인데 문제 없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외가 쪽에는 살짝 널널하긴 했다.[5] 당연하지만 이 당시 노르만족도 가톨릭을 믿었으므로, 영적 지도자인 교황을 함부로 대하진 않았고 융숭히 대접했다고 한다. 교황의 입장에서는 인질이 되었음은 사실이니 매우 고까웠겠지만.[6] 스티븐 왕 등[7] 신성로마 제국의 황후 마틸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