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7:33:44

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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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Grace[1]
초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
John Churchill, 1st Duke of Marlborough
파일:xcf268081_1024x1024.jpg
이름<colbgcolor=#FFF,#1f2023>John Churchill
존 처칠
출생1650년 5월 26일
잉글랜드 왕국 데번
사망1722년 6월 16일 (향년 72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버크셔, 윈저저택
배우자사라 제닝스(1677년 결혼)
자녀해리엇, 앤, 헨리에타, 존, 엘리자베스, 메리, 찰스
아버지윈스턴 처칠
어머니엘리자베스 드레이크
작위1대 말버러 공작[2]
1대 민델하임 공[3]
가터 기사(Order of the Garter)
복무잉글랜드 왕국 육군 (1667년~1707년)
대영제국 육군 (1707년~1722년)
직책영국 육군 총사령관
병기장관
최종 계급대장
주요전투셸렌베르크 전투
블레넘 전투
라미예 전투
오우데나르데 전투
릴 공방전
말플라케 전투

1. 개요2. 생애3. 특징4. 가족 관계5. 매체6. 기타

[clearfix]

1. 개요

영국의 정치가이자 군인. 1대 말버러 공작. 오스트리아의 사부아 공자 외젠, 프랑스의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와 함께 한 시대(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를 풍미한 명장이자 명외교관이며 훌륭한 육군교관이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동안 활약한 영국이 배출한 몇 안 되는 훌륭한 지상전 전략가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전열보병 시대 전쟁에 대해 관심이 높지 않아 윈스턴 처칠의 조상이라는 것 정도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2. 생애

제임스 2세에게 신뢰받는 장군이었지만 명예 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윌리엄 3세메리 2세를 지지했으며, 이 공으로 메리 부부가 영국 국왕으로 공동 즉위했을 때 말버러 백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팔츠계승전쟁에서 아일랜드, 플랑드르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국외 추방된 제임스 2세와 공모한 혐의[4]로 일시적으로 런던 탑에 수감되었으나 다시 왕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해 복직하였다.

이후 아내 사라 제닝스앤 여왕과의 오랜 친분을 바탕으로 궁정에 들어가게 되자 승승장구를 거듭해 영국군의 대장 직위에 오르고 공작 작위를 받게 된다.

이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블레넘 전투, 라미예 전투,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전 유럽에 명장으로 대단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701년부터 1710년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루이 14세의 프랑스와 싸우기 위한 유럽 연합군을 지휘한 말버러의 리더십은 영국이 후일 최강국인 대영제국으로 부상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분열된 유럽 연합군에서 단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의 능력은 그의 외교적 수완을 통해 입증했다. 그는 군사 전문가들에게 전술적 능력 못지않게 조직 통솔력과 보급 능력의 귀재로 연구되고 있다. 또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전까지 그동안 유럽에서 주로 진행된 공성전이 아닌 넓은 장소에서 회전을 통해 싸움을 하는 전술로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뛰어난 활약을 보인 존 처칠은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군사적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아내 사라가 앤 여왕의 총애와 왕실의 은총을 잃게 되고, 토리당이 프랑스와 평화를 맺기로 결심하면서 그를 압박해 실각시켰다. 특히 말버러 공작은 횡령, 부정부패 혐의를 받아 모든 내정과 군사 관직에서 해임되었다.

1714년 왕위를 계승한 조지 1세 때 왕실의 총애를 되찾았다. 조지 1세는 하노버 선제후 시절에 존 처칠과 함께 싸웠고, 처칠을 실각시킨 영국 정부에 반발하고 분노를 드러냈을 정도였으니 조지 1세가 영국 왕이 된 것은 처칠에게는 그야말로 새옹지마.

이후 그는 이전의 관직을 되찾았으나 이미 건강이 악화되었고, 뇌졸중의 여파로 인해 결국 병으로 쓰러져 1722년 6월 16일 윈저 저택에서 사망했다.

3. 특징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전시 수상인 윈스턴 처칠의 먼 조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때 그의 평가는 부정부패 혐의로 인해 실추되었으나 후손인 윈스턴 처칠이 그의 전기를 쓰면서[5] 영국 출신 유럽의 대표적 명장으로 명성이 많이 회복되었다.

존 처칠은 원래 1남 4녀를 두었으나 아들은 어려서 요절하고, 공작위는 맏딸 헨리에타가 이어받았다. 하지만 존 처칠의 외손자들 중 후손을 남긴 건 스펜서 가문과 결혼한 셋째 딸 앤의 차남 찰스와 삼남 존 뿐이었다.[6] 찰스의 후손은 말버러 공작가로 이어져 내려가는데 윈스턴 처칠이 이 말버러 공작가 출신이다. 존의 후손은 아들이자 동명이인인 존 스펜서가 스펜서 백작위를 받으면서 스펜서 백작가로 이어져 내려가는데 존의 딸이 조지아나 스펜서고 직계후손이 다이애나 스펜서다. 즉, 스펜서 가문은 그 전부터 있었고 존 처칠은 공식적으로는 스펜서 가문의 구성원인 적이 없다. 다만 현재의 스펜서 가문의 외가쪽 조상이기 때문에 존 처칠을 스펜서 가문으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있다.

경제사에서 길이 남을 버블남해거품사건과 약간의 인연이 있다. 이 남해거품사건은 존 처칠의 만년 시기인 1720년에 터졌는데, 존의 아내인 사라 처칠은 이 때 거품을 이용해서 주식 투기로 큰 돈을 번 소수의 행운아 중 한명이었다. 당시 화폐 기준으로 약 10만 파운드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찰스 2세의 정부 1대 클리블랜드 여공작 바바라 팔머와 불륜관계였으며[7] 그녀에게 스폰을 받는 처지이기도 했다. 1년에 무려 5,000파운드를 받아 가면서도 바바라의 도박판에서 푼돈 좀 잠시 빌려달라는 말을 거부해 분개한 바바라가 코피를 흘리며 코르셋 끈을 잡아 뜯었다고 한다. 둘이 정사를 나누다 찰스 2세에게 걸린 적도 있는데 다급하게 창밖으로 뛰어내린 존 처칠을 향해 찰스 2세는 "짐은 너를 용서한다. 너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테니"라고 차갑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한편 존 처칠의 누나 아라벨라 처칠[8]은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의 정부였으며 그의 사생아를 네 명이나 두었다. 즉, 존 처칠은 자기 누나의 내연남의 형의 내연녀와 불륜 관계였고, 바바라 팔머는 자기 내연남의 동생의 내연녀의 동생과 불륜관계였던 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블레넘 궁은 블레넘 전투의 승전 기념으로 받은 것이며, 공작 가문이 거주하고 있다.

4. 가족 관계

존 처칠/가족 관계 문서 참고.

5. 매체

6. 기타

  • 영국에서 손꼽히는 명장 중 하나였기에, 그의 이름 및 그와 관련된 장소는 이후 이를 기념하는 영국인들에 의해 여러 지역이나 건물 등의 이름으로 차용되었다.
    • 캐나다 허드슨만 연안의 마을 처칠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도시는 처칠 강의 입구에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이 강의 이름이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허드슨 만 회사'의 3대 사장이었기에 그 인연으로 지은 것이다.
    • 뉴질랜드 말버러 지방은 그의 대표작위인 말버러 공작의 초대가 그였기에 거기서 따온 것이다. 당 지방의 주도 또한 그의 전승지 블렌하임에서 따왔다.
    • 그의 가장 빛나는 승전인 블레넘 전투 및 그 전승지인 블렌하임은 (옛) 영국령 여러 장소에 명명되었고, 혹은 선박이나 항공기에도 사용되었다.
  • 미국의 밀리터리 잡지인 암체어에서 2008년에 선정한 명장 100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 공작 본인에 대한 경칭[2] 1st Duke of Marlborough[3] 1st Prince of Mindelheim[4] 당시 영국에서 윌리엄 3세의 인기가 별로 높지 않았고, 제임스 2세 충성파 세력들이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날을 전혀 알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처칠처럼 적당히 양다리를 걸치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사실 처칠이 명예혁명 당시 곧바로 윌리엄과 메리를 지지했던 것도 아니었고, 제임스 2세에게 곧바로 군대를 동원해서 강경대응을 할 것을 조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제임스 2세의 건강 악화로 초기 대응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 틀렸다고 생각하고 편을 갈아탄 것이라, 애초에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에 대한 충성심에서 그쪽 편을 든 것은 아니기도 했다.[5] 2차대전 당시 영국의 전시 총리로 주로 기억되지만 문학적 성취도 대단한 문인이기도 하다. 1953년 '제2차 세계대전사'라는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6] 이들의 원래 성씨는 스펜서였으나, 말버러 공작위를 이어받은 찰스의 손자대부터는 스펜서-처칠 성씨를 썼다. 윈스턴 처칠도 원래 성씨는 스펜서-처칠이다.[7] 정식 혼인관계가 아닌 일개 정부와의 관계를 두고 왜 불륜이냐고 의아할 수도 있는데, 바바라는 찰스 2세의 정부가 되기 전에 이미 로저 팔머와 결혼한 유부녀였기 때문에 불륜이 맞다.[8] Arabella Churchill. 1648년 2월 23일~1730년 5월 30일.[9] 'Mort et convoi de l'invincible Malbrough'(무적의 말버러의 죽음과 장례)라는 다른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10] 영어 노래 중에서만 해도 축하곡으로도 유명한 ' For He's a Jolly Good Fellow', 'The Bear Went Over the Mountain' 같은 노래에 차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