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14:50:17

블레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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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잉글랜드-네덜란드-오스트리아 연합군3.2.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
4. 전투 경과5. 결과6. 여담

1. 개요

Battle of Blenheim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4년 8월 13일 잉글랜드[1]-네덜란드-합스부르크 제국[2] 연합군과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이 독일 바이에른의 블린트하임(Blindheim)에서 맞붙은 전투. 잉글랜드-네덜란드-합스부르크 연합군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고, 그동안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프랑스는 이 전투를 계기로 수세에 몰렸다.

2. 배경

1700년 11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루이 14세의 패권 야욕을 경계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 잉글랜드, 네덜란드 등은 프랑스가 스페인을 흡수하는 걸 좌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카를 대공을 스페인 국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하고 1702년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말버러 공작 존 처칠플랑드르에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1702~1703년 동안 플랑드르를 침공한 프랑스군과 몇 차례 교전을 치렀다.

1704년, 루이 14세는 대대적인 공세를 계획했다. 그는 탈라르 공작 카미유 도스튄 휘하의 군대가 라인강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동안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휘하 군대가 플랑드르의 연합군을 붙들어두길 희망했다. 여기에 페르디낭 마르생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이 이끄는 바이에른군이 도나우강에서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이동하고,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프랑스군은 티롤을 공격하게 했다. 루이 14세는 이같은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한다면 합스부르크 제국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평화를 구걸할 거라고 확신했다.

1704년 4월,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은 루이 14세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를 막기 위한 일련의 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네덜란드에 약간의 병력만 남겨두고 남쪽으로 행군해 6월 초 남부 독일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제국군과 합세했다. 그 후 말버러 공작은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과 함께 도나우강에서 바이에른군과 대치했고, 외젠은 라인강을 건너려는 프랑스군의 시도를 저지하고자 행진했다.

1704년 7월 2일, 잉글랜드-합스부르크 연합군은 프랑스와 바이에른군이 장악하고 있던 셀렌베르크를 공격했다.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은 적의 공세에 밀려 요새화된 도시인 아우크스부르크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탈라르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독일 남부로 진격해 아우크스부르크 북쪽에서 바이에른 선제후와 합세했고, 외젠은 이를 추격해 회흐슈타트에서 말버러 공작과 합류했다. 이후 양측은 1704년 7월 26일부터 대치했다.

7월 29일, 외젠은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이 서쪽에서 3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도나우강을 기습 도하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하자 서둘러 도나우강의 지류인 케셀 강으로 이동하면서 말버러 공작에게 지원 요청을 보냈다. 이에 말버러 공작의 군대는 7월 31일 도나우뵈르트에서 도나우강을 건넌 후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케셀 강에서 외젠과 합세하기 위해 진군했다.

하지만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은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나우강 인근의 블린트하임 마을에 도착한 뒤 방어선을 형성했다. 탈라르 공작이 이끄는 26개 보병 대대와 12개 기병대대는 블레넘 마을에 배치되었고, 좌측면에 위치한 뤼칭겐엔 22개 보병 대대와 36개 기병대대가 배치되었으며, 우측면에 위치한 오버글라우에는 7개 보병 대대와 80개 기병 대대가 배치되었다. 그리고 최전선엔 아일랜드 3개 연대를 포함한 14개 보병 대대가 배치되었다.

탈라르, 마르생, 막시밀리안 2세는 이렇듯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했으니 잉글랜드-합스부르크 연합군이 감히 공격하려 들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고, 그들이 물자가 부족해지면 북쪽으로 물러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의 에상과는 달리, 말버러 공작과 외젠은 적의 방어선을 살펴본 후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향방을 가를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잉글랜드-네덜란드-오스트리아 연합군

3.2.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

  • 프랑스군 총사령관: 마르생 백작 페르디낭, 탈라르 공작 카미유 도스튄
  • 바이에른군 총사령관: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 병력: 69개 보병 대대, 128개 기병 대대, 60개 대포, 60,000 ~ 72,000명

4. 전투 경과

1704년 8월 12일 저녁, 말버러 공작과 외젠은 교회 첨탑에서 적이 포진한 지형을 살펴봤다. 그들은 도나우강으로 흐르는 여러 지류들에 의해 지반이 끊어져 있고, 블린트하임 마을이 하천 중 하나인 네벨강이 본강에 합류하는 지점 너머에 위치한 것을 확인했다. 또한 프랑스군과 바이에른군은 블린트하임과 뤼칭겐 사이에 위치한 네벨강 건너편 평원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렇듯 지형 및 적의 주둔지를 확인한 두 사람은 8월 13일 새벽 2시 군대를 이끌고 8열 횡대로 케셀 강을 건너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에 접근했다. 그들은 강가 일대는 기마 작전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기병대를 중앙에 배치하고 측면에 보병대를 배치하여 도로를 따라 이동하게 했다. 이후 말버러 공의 군대가 프랑스 전선으로 접근하는 사이, 외젠은 그의 군대를 우익으로 진군시켜 바이에른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8월 13일 오전 6시경, 양측의 선발대가 맞붙으면서 첫 교전이 시작되었다. 당시엔 안개가 자욱해 양측이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게 매우 힘들었다. 탈라르 원수는 말버러 공작이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프랑스와 바이에른 기병대 중 다수를 강 건너편으로 파견해 적을 추격하게 했다. 그러나 7시에 안개가 걷히자, 탈라르 원수는 불과 반 마일 떨어진 네벨강 건너편에 적군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나팔을 불고 북을 치게 해 기병 및 포병대를 급히 복귀시키게 했다.

한편 말버러 공작 휘하 공병대는 적이 파괴한 네벨강 돌다리를 신속하게 수리했고 군대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 개울 건너편에 5개의 임시 가교를 건설했다. 쿠트 백작은 그의 부대와 함께 선두에 서서 6개 횡대로 전진했고, 그 뒤를 2개의 보병대가 뒤따랐으며, 나머지 병력은 중앙과 우측면에 네개 대열로 배치되었다. 또한 외젠은 땅이 질퍽해 군대 이동에 장애를 입는 상황에서도 바이에른군 측면에 군대를 신속하게 배치함으로서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오전 8시, 양측은 서로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말버러 공작은 외젠 공작이 배치를 완료하고 공격을 개시했다는 소식이 오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로부터 4시간 후인 12시 30분, 외젠이 자리를 잡았다고 알렸다. 이에 말버러 공작은 쿠트 백작에게 블레넘 마을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오후 1시, 쿠트 백작 휘하 잉글랜드군은 적 포병대의 포격 세례를 무릅쓰고 블린트하임 마을로 진격했다. 그들은 적과 인접할 때까지 총을 쏘지 말라는 쿠트 백작의 엄한 지시에 따라 적의 포격에도 별다른 대응 없이 묵묵히 진군하다가 적과 근접하자 일제 사격을 가한 뒤 총검 돌격을 감행했고, 마을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수적 열세로 인해 패퇴했다. 이에 프랑스군 기병대가 그들의 측면을 공격했지만, 잉글랜드 기병대 5개 대대가 투입되어 이를 격파했다.

한편 우익에서는 홀슈타인벡 공작이 오버글라우 마을을 향해 보병대를 이끌고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그의 공세는 네벨강 건너편에 위치한 프랑스 보병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벤하임과 고어 연대는 네벨강을 간신히 건넜으나 적의 필사적인 역습으로 인해 거의 궤멸되었다. 홀슈타인벡 공작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2천여 명의 병사들이 오버글라우 공세에 참가했다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 외젠은 바이에른군에 대항해 네 차례 공세를 감행했지만 바이에른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렇듯 지지부진해지던 전황을 결정지은 이는 바로 말버러 공이었다. 말버러 공작 휘하 잉글랜드 기병대는 네벨강을 가로질러 블린트하임과 뤼칭겐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군 보병대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마르생 원수와 탈라르 원수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지휘권이 양분되어 있어서 대응책을 신속하게 마련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 와중에 적 기병대가 느닷없이 들이닥치자, 탈라르의 프랑스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도나우강을 건너 도망치려다가 많은 이들이 익사했다. 그리고 탈라르 원수는 혼란 와중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마르생과 막시밀리안 2세는 탈라르의 군대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전의를 상실한 채 오버글라우와 뤼칭겐 마을에 불을 지르고 서쪽으로 퇴각했다. 말버러 공의 잉글랜드군은 미처 달아나지 못한 블레넘 주변의 프랑스군을 포위했다. 포위된 프랑스 24개 보병 대대는 항복의 조건으로 자신들이 명예롭게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완전한 복종을 하라는 답변을 접하자 어쩔 수 없이 군기를 불태운 후 말버러 공작에게 항복했다. 이리하여 블레넘 전투는 잉글랜드-합스부르크 연합군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5. 결과

프랑스-바이에른 동맹군의 사상자 및 포로는 40,000명에 달했다. 또한 대부분의 대포와 129개의 깃발, 171개의 기병 군기를 상실했다. 반면 잉글랜드-합스부르크 연합군의 사상자는 12,000명이었는데, 그 중 잉글랜드군 사상자는 장교 200명과 병사 2,000명이었다. 블레넘 전투는 루이 14세의 야심찬 계획을 산산조각낸 결정적인 전투였으며, 이후 프랑스는 수세로 몰린다.

탈라르 공작은 이 전투에서 잡힌 후 잉글랜드로 끌려가 노팅엄에 수감되었다. 그는 7년 후인 1711년에야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왔고, 루이 14세는 그의 불운을 위로해줬다. 한편 마르생 원수는 패전 후 원수 직책에서 물러났다가 얼마 후 이탈리아 전선에 복귀해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와 함께 오스트리아군과 맞섰다. 그러나 1706년 토리노 공방전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뒤 며칠 후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막시밀리안 2세는 이 전투에서 패한 뒤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바이에른은 전쟁에서 이탈했다.

6. 여담

이 승리로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은 명장으로서 큰 명성을 얻었고, 여기저기 전투장소인 블렌하임의 이름을 붙인 장소들이 탄생하였다. 또한, 잉글랜드 정부는 이 승리를 축하하고자 말버러 공작가문을 위한 블레넘 궁전을 건축하였는데, 잉글랜드 왕실 소유가 아니면서도 궁전이라 불리는 특권을 얻었다. #
[1] 잉글랜드, 스코틀랜드가 연합법으로 합쳐진 것은 1707년의 일이다. 아직은 잉글랜드.[2] 30년 전쟁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빈 껍데기만 남고 국가 구실을 거의 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애초에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섰던 바이에른이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국이다. 그리고 레오폴트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을 뿐이다. 따라서 신성 로마 제국이 참전했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3] 잉글랜드군은 14개 보병 대대, 18개 기병 대대, 16,000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