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13:34:15

리제 마이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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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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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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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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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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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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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 마이트너 마거릿 미드 마리아 미첼 마리 퀴리 마리암 미르자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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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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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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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레타 툰베리 제인 폰다 주디 시카고 리마 보위
나오미 클라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수잔 팔루디 타우왁쿨 카르만 와리스 디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마거릿 생어 마리아 몬테소리 해리엇 터브먼 캐롤리 슈니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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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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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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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 모트 루시 번스 루시 스톤 메리 처치 테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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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리제 마이트너
Lise Meitner
파일:Lise_Meitner_(1878-1968),_lecturing_at_Catholic_University,_Washington,_D.C.,_1946.jpg
본명 엘리제 마이트너
Elise Meitner
출생 1878년 11월 1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1968년 10월 27일 (향년 89세)
영국 잉글랜드 케임브리지
국적
[[오스트리아|]][[틀:국기|]][[틀:국기|]] →
[[스웨덴|]][[틀:국기|]][[틀:국기|]] (1949년 이후)
직업 물리학
학력 빈 대학교
소속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베를린 대학교
스톡홀름 대학교
수상 리벤 상 (1925)
막스플랑크 메달 (1949)
오토 한 상 (1955)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1955)
빌헬름 엑스너 메달 (1960)
엔리코 페르미 상 (1966)
종교 개신교무종교 (추정)[1]
서명 파일:Lise_Meitner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3.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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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스웨덴[2] 물리학자.

원자핵 연구의 선구자 중 한명이었지만, 과학계의 남성중심적 풍토로 인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불운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일명 '원자폭탄의 어머니', '또 다른 마리 퀴리' 등으로 불린다.

2. 생애

변호사인 아버지가 마이트너의 재능을 존중해 준 덕분에 계속 공부할 수 있었지만, 상급 학교 진학 차별 때문에 김나지움에 진학하지 못하고 검정고시에 해당하는 고교 졸업 자격시험을 치러야 했다. 1901년(23살) 빈 대학교에 입학, 1905년 논문을 제출하고 구두시험을 최우등으로 통과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네 번째 여학생이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장에 오타로 11월 7일이라 기록되고, 그 후 '퀴리 부인과 생일이 똑같은 여성 과학자' 로 알려지면서 영영 원래 생일을 되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베를린 대학교에서 화학자 오토 한과 공동 연구를 시작했지만, 연구소장은 청소부를 제외한 여성의 연구소 출입을 금했다. 별도 출입구가 있는 지하실 목공소에 실험실을 꾸며야 했다. 주목받는 연구 성과를 연이어 내자 연구소장은 비로소 여성 화장실을 설치하고 연구소 출입도 허가했다. 1913년부터 베를린 카이저빌헬름 연구소에서 연구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는 간호사로 일했으며, 1918년 91번 원소 프로탁티늄을 발견하고 1924년 원자선이 방출될 때 베타선이 감마선보다 먼저 나온다는 것을 증명했다. 1924-25년에는 프로트악티늄에 관한 연구로 오토 한과 함께 노벨화학상 후보로 추천됐다.

1926년에야 베를린대에서 정교수가 아닌 외래 교수(außerordentliche Professorin)로 임용됐지만, 어쨌든 독일에서 물리학 분야에서 최초로 교수 직함을 단 여성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33년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1935년 초에 핵분열로 나아갈 수 있는 실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었고 그해 7월 유태인 출국금지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마이트너는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급하게 나오면서 가진 것이라고는 몇십 마르크 밖에 없었는데 작별인사차 만난 오토 한은 혹시 뇌물이 필요할 때 쓰라고 자기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반지를 주었다.

이후 스웨덴의 노벨 연구소에서 일했지만 제대로 연구할만한 여건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이트너와 한, 슈트라스만 등은 서신교환을 통해 우라늄 핵분열에 관한 연구 성과를 냈다. 화학자였던 한과 슈트라스만이 화학적 실험을 하고 물리학자인 마이트너와 그녀의 조카 오토 프리슈가 물리학적인 근거와 이론을 보충하는 식이다.

1938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스톡흘름의 교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독일에서 온 한 편지를 받게 된다. 한과 슈트라스만이 보낸 것이었는데 우라늄에 중성자를 쐈더니 바륨란타넘이 생성되었고 이것 좀 물리학적으로 규명해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고 난 후 휴가고 뭐고 없어졌다. 다음 날 새벽부터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이 실험결과와 수치를 두고 토론을 했으며 '우라늄의 원자핵이 중성자를 얻어 질량이 비슷한 바륨과 란타넘의 원자핵으로 분열한 것이며, 그러한 분열 조각에서 방사선이 나온다'는 답장을 했다. 프리슈는 바로 코펜하겐으로 돌아가 스승인 닐스 보어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마이트너는 이 실험의 결과를 물리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논문 준비에 들어갔다. 이후 1938년 12월 22일 한과 슈트라스만은 추가적인 화학실험을 통한 논문을 썼고 1939년 1월 마이트너와 프리슈는 그 실험을 물리학적으로 규명한 논문을 냈는데 여기서 핵분열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1945년 오토 한은 우라늄 핵분열을 증명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했다. 프리슈는 늦게 참여했다고 쳐도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까지 제외된 것은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오토 한은 단독으로 노벨상을 받은 후부터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의 공로를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발언들을 했는데, 특히 마이트너가 독일을 떠난 뒤에 핵분열을 발견하게 된 것을 두고 "마이트너가 떠나고 나서야 연구에 속도가 붙었다. 그녀는 방해가 됐었다"는 발언까지 함으로서 그녀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줬다.[3] 한때 같은 동료로서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던 사이였음에도 그랬던 것이다. 그녀는 친구에게 "내가 오토에게 지워져야 하는 과거가 된 것이 너무나 슬프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1962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도로테아 슐뢰처(독일 최초의 여성박사) 메달을, 1966년 미국 원자에너지청에서 엔리코 페르미상을 받았다. 핵분열 연구를 함께 했었던 한, 슈트라스만과 함께 수상했기 때문에 이들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는 회복되었다. “새로 열린 에너지원이 단지 평화적 목적으로만 이용되면 좋겠다. 나는 원자폭탄 제작이 성공하지 않기를 희망했지만, 성공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자꾸 생겼다. 내 두려움은 들어맞았다.” 마이트너는 90세 생일을 약 3주 앞두고 케임브리지에서 세상을 떠나 영국 남부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1992년, 독일 다름슈타트 중이온연구소에서 합성되고 증명된 109번째 원소가 마이트너륨으로 명명됐다. 반면 오토 한의 이름을 따서 하늄으로 명명될뻔 했던 105번 원소는 결국 더브늄으로 결정되었다.

3. 업적

β선의 스펙트럼, 방사성되튐 등에 대해 연구했으며, 프로트악티늄을 발견했다. 오토 한프리츠 슈트라스만중성자로 충격을 준 우라늄에서 바륨을 얻자 이를 핵분열이라 명명했다. 오토 한과 공동연구하며 그 구조와 존재가능성, 수치를 계산해내어 핵분열 연구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생전에 동료 연구자에게 배신당하고 연구에 대한 공헌까지 부정당한 일 때문에, 거의 같은 처지에 있던 로절린드 프랭클린과 함께 과학계의 남성중심적 처사에 희생당한 여성 과학자의 예로 자주 거론된다. 특히, 노벨상 후보에도 자주 올랐으나 끝내 외면받은 것은 두고두고 과학사의 오점으로 회자된다.


[1] "... in later years her views were very tolerant though she would not accept complete atheism." / Otto Robert Frisch, "Lise Meitner, 1878-1968", royalsocietypublishing.org[2] 오랜 시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적이었지만, 안슐루스 당시 유대인이란 이유로 망명하고 전후 1949년에 스웨덴 국적을 취득했다.[3] 이는 선배 과학자인 피에르 퀴리가 라듐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베크렐과 공동으로 수상할 수 있었음에도, 공동 연구자이자 아내인 마리 퀴리도 함께 수상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 때문에 피에르는 아내인 마리와 함께 노벨상 지분을 3분의 1씩만 가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