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 |
본명 | Artemisia Gentileschi |
출생 | 1593년 7월 8일 |
로마, 이탈리아 | |
사망 | 1653년 (추정) |
나폴리, 이탈리아 | |
직업 | 화가 |
가족 |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배우자 피란토니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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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화가. 피렌체 피세뇨 아카데미의 최초의 여성회원. 생몰연도는 1593년 ~ 1653년. 하지만 1652년 사망이라는 설과 1656년 사망설이 있으며 삶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2. 생애
아버지는 화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다. 오라치오는 아르테미시아가 어릴 때부터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집중적으로 그림 교육을 시켰으며 딸의 그림에 대한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했다고 한다. 12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고 한다19세에[1] 아버지의 친구이자 그녀의 미술 스승이었던 아고스티노 타시(1578~1644)에게 성폭행을 당해 이를 고발했으나 재판 과정에서 2차 가해[2]를 당한 사건이 있으며, 이 일은 이후에 그린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가 대표적으로, 이전까지의 그림에선 유디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기 위해 노파를 추하게 묘사했고 유디트도 연약하게 묘사하였다. 사례 1 사례 2 참고
이와는 달리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에선 두 여성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며 사실적인 유디트의 모습과 연령대(중년), 피를 묘사한다. 또한 타시를 닮았다고 알려져있는 홀로페르네스와 유디트의 손목에 걸려있는 팔찌 속 디아나를 통해 각기 인물이 누구인지 예상케 하며 유디트가 쥔 검이 십자가 모양으로 보아 신의 뜻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너무나 강렬한 그림을 본 귀부인이 기절했단 이야기도 있다. 카라밧지오가 그린 유디트가 '어멋 징그러!'라는 듯한 모습인 것과 달리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는 '찢고 죽인다!'라는 듯한 모습이어서, 둘 다 목을 자르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인데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나중에 피렌체 출신의 화가 피란토니오( Pietro Antonio di Vicenzo Stiattesi)와 결혼하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한 오명은 그녀를 따라다녔다.[3]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선 흔하지 않게 남편과 떨어져 지내며 여행도 많이 다녔다고 한다.
주로 신화와 전설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1638~1641년 동안 아버지가 활동했던 영국 런던에 체류하기도 했지만 여생을 나폴리에서 보냈다. 대표작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딧, 수산나와 두 늙은이(혹은 장로)[4], 자화상등이 있다.
이후 젠틸레스키는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는 성공한 예술인이 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어록이 있다.
"...My illustrious lordship, i'll show you what a woman can do..."
"고매하신 후원자님, 제가 여성의 몸으로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고매하신 후원자님, 제가 여성의 몸으로 무엇을 이루어낼 수 있는지 보여드리겠습니다"
1627년에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요청도 받았으며, 당대의 유명한 화가와 작가들과 친분이 있었다.[5]
1639년에는 영국의 왕비, 앙리에트 마리의 요청으로 그녀의 집에 장식할 그림들을 그렸다.
3. 평가
이런 이유로 인해 페미니즘 분야에서도 유명한 인물로 꼽힌다. 이 분야에서의 평론에 따르면, 그녀의 작품들에서 여성들은 "보이기 위한 몸" 으로서가 아닌,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카라바조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그가 보여준 빛과 그림자의 강한 대조나 풍부한 색감에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영향에도 불구하고, 남성 화가와 차별되는 섬세한 묘사로 유명했다. 특히 인물의 치밀한 감정묘사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4. 기타
- 자화상이 많은 이유는 모델을 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라고 한다. #
[1] 17살이라는 의견도 있다.[2] 부인과 진찰대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것은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로, 만약 그 사람이 모진 고문 와중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진실이라는 당시의 보편적인 관점 때문이었다. 이 재판 이후 타시는 1년 형을 선고받았다.[3]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는데 딸 프루덴지아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4] 이 역시 수산나라는 여인이 두 장로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 했으나 거부하자 두 장로가 수산나를 무고하여 사형에 처하려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예언자 다니엘이 수산나의 무죄함을 밝히고 두 장로를 처형하는 이야기이다.[5] 갈릴레오 갈릴레이와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