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0 13:37:23

조프루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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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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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프루아 2세
(Geoffrey II of Bretagne)
별칭 책략가
(Rassa/Schemer)
지위 브르타뉴 공작(Duc de Bretagne)
1181년 ~ 1186년 8월 19일
리치먼드 백작(Earl of Richmond)
1183년 ~ 1186년 8월 19일
렌 · 낭트 백작(Comte de Rennes et Nantes)
1185년 ~ 1186년 8월 19일
출생 1158년 9월 23일, 잉글랜드 왕국
사망 1186년 8월 19일 (향년 27세), 프랑스 왕국 파리
매장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배우자 파일:800px-Bannière_Maison_Penthièvre.svg.png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
자녀 엘레오노르, 마틸다, 아르튀르 1세
부왕 파일:800px-Royal_Arms_of_England_(1154-1189).svg.png 헨리 2세
모친 파일:아키텐 공국 국장.svg 엘레오노르 다키텐

1. 개요2. 생애3. 사인4. 사후5.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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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선의 천재. 그의 혀는 보다 끈적하고 기름보다 부드러우며 그 능력은 두 왕국을 혼란에 빠뜨릴 정도이다.
웨일스의 제럴드
부정과 파멸의 아들
호버든의 로저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와의 결혼을 통해 브르타뉴 공작으로 재임했다.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앙주와 멘 및 투렌 백작인 헨리 2세와 아키텐과 가스코뉴 여공작, 푸아티에 여백작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4번째 왕자이다.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의 동생이자 존 왕의 형.

권모술수의 대가이자 대국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고 비상한 정치 수완을 가졌으며, 뛰어난 외교관이자 군사적 능력까지 우수했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하고 치밀한 성품에 교활하고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위선으로 관대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여 서유럽에서 인망이 매우 높았다. 출중한 무용 덕에 아킬레우스, 학문에 조예가 깊어 앙주 가문 최고의 지성이란 평판을 들었고 프랑스의 왕 필리프 아우구스투스와 절친이었다.

2. 생애

불과 16세가 되던 1173년 남편과 깊은 갈등을 겪고 있던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주도로 그녀의 전남편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원조를 받아 형들인 청년왕 헨리, 아키텐 공작 리처드와 함께 부친 헨리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누군가 앙주 가문의 특징을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가족은 형제가 형제를, 아들이 아비를 대적하고, 서로 해코지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도록 태어난 게 우리일세."

이처럼 부왕에 대한 반란을 획책하고 강탈이나 약탈에서 인정사정이 없었으며 거리낌 없이 교회를 유린했던 종교적인 신심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행동들은 도덕을 중시하던 동시대인인 웨일스의 제럴드와 호버든의 로저가 비판적인 시각의 기록을 남기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도면밀한 처세술을 발휘하여 서유럽에서 가장 온화한 남자로 인식되었고 두터운 인망을 누렸다.

앙주 백작 가는 대대로 악마 멜뤼진의 자손이라는 전설이 있는데 목격자들은 "제프리야말로 악마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았다."고 술회한다.

랭스에서 열린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권위에 걸맞는 선물을 하고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브르타뉴 공작령에 대해 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는 것이다. 후에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일으킨 대반란에서 형들인 청년왕 헨리, 아키텐 공작 리처드와 힘을 합쳐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필리프 2세를 구출하고 반란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했다.

둘째 형 청년왕 헨리와 동맹을 맺고 필리프 2세의 용병 지원을 받아 아키텐 봉신들과 공모하여 셋째 형 리처드를 아키텐에서 축출하려 했지만 형 헨리의 급사로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 뒤 헨리 2세는 슬하에서 양육했던 리처드의 약혼녀인 프랑스 공주 아델과[1] 막내 의 결혼에 대해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서 동의를 받았고, 프랑스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하는 것으로 아들들에게 상속지와 상속 권한을 꽉 쥐고 있으면서 "나한테 잘하는 사람에게 물려주겠다.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내 눈에 드는 사람 몫이다^^"와 같은 태도를 공고히 한 다음 상속에 대해 새로운 결정을 공포했다.
1. 리처드아키텐을 포기하고 청년왕 헨리의 몫이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를 상속받을 것.

2. 아키텐은 막내 이 양도받을 것.

리처드는 즉시 거세게 반발하여 전쟁을 불사하였고 제프리는 겉으로는 이 결정에 순순히 물러났으나 부왕에게 접근하여 온순한 아들을 가장하고 치열한 물밑 공작을 벌인 끝에, 부왕의 호의를 얻었고 노르망디와 앙주를 자신에게 상속할 것을 심각하게 재고하도록 유인했다. 하지만 뒤에서는 아서 왕 전설을 이용해 브르타뉴를 선동하여 반헨리 2세 감정에 기름을 부었고, 그 자신은 선대 브르타뉴 공작들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따르고 브르타뉴인을 기용하는 것으로 브르타뉴인들에게 부왕과의 정치적 분리를 보여주어 확고한 충성심을 얻었다. 이를 통해 지배 권력을 견고히 구축하면서 기존의 제도를 개편하고 위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나머지 브르타뉴인들에게도 복종을 받아내고 마침내 선대 브르타뉴 공작들이 누리지 못했던 권위의 발전을 급격히 이루었다. 또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의 우정 및 동맹을 두고 형 리처드와 경쟁을 벌였으며 리처드는 약혼녀 아델 공주와의 결혼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필리프 2세는 아키텐에서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던 그를 외면하고는 죽이 맞았고 상냥한 태도를 갖춘 제프리를 선택했다.[2] 필리프 2세와의 동맹을 질투한 플랑드르 및 베르망두아, 발루아 백작 필리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게 프랑스뿐만 아니라 브르타뉴까지 침공할 것을 설득했으나 필리프 2세의 음모로 저지되었다. 제프리는 부왕이 존에게 아키텐 공격 명령을 했을 때 끼어들어 푸아티에를 급습하고 리처드에게 브르타뉴 점거로 보복당하기도 하며 두 형제는 골육상쟁을 벌였다. 가족 간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1184년 성탄절에 모후와 10년 만에 재회한 자리에서도 둘은 신경전을 벌였다. 이후 부왕의 명으로 제프리는 드디어 노르망디의 관리로 파견되었다.[3]

이 무렵 흥미롭게도 리처드는 자신이 아니라 제프리를 선택한 필리프 2세에게 위협조로 조롱하는 노래를 널리 퍼뜨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참으로 타락한 사람들! 공성전을 하고, 몇 주 몇 달간 성대한 선물을 퍼부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용병과 트루바두르에게 돈을 쓰던 남자들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어디서 그 유일한 남자를 볼 수 있소? 내가 용기 내서 말해 보리오?

프랑스 왕이 아름답고 고귀한 땅 지조흐[4]를 리처드 공께 준다면, 그는 너무 많이 고마워 할 것이네. 그러나 프랑스 왕이 내 마음 같다면, 리처드 공이 그를 만나지 않고도 그를 슬프게 하려는 충동이 치솟지 않을 것이네. 그리고 그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자신을 억누른다오.

리처드 공께 어서 전해주게나! 내 눈에 리처드 공은 사자요, 필리프 왕은 어린 양으로 보인다오.
베르트랑 드 보른

리처드는 우두머리 수컷이요, 필리프는 사냥감이다 정도의 의미가 되고 제프리와 필리프의 반응은 알려진 바 없다.

리처드가 제프리와 싸우겠다고 대규모 군사를 일으키고 브르타뉴를 침략하기 일보 직전, 신임을 샀던 부왕 헨리 2세가 개입하여 제프리를 편들자 이는 불발한다. 이때 제프리는 부왕에게서 낭트 백작령을 받고 브르타뉴를 완전히 장악하였음을 선언하는 표시로써 브르타뉴 동전을 새로 발행했는데, 카페 가문과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를 상징하는 백합을 동전의 중앙에 새겨 넣는 것으로 그를 향한 우정을 표현하였다.[5] 그 후 파리로 달려가 필리프에게 대단한 지극정성을 다하며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고 웨일스의 제럴드는 "제프리가 필리프를 굉장히 자주 길게 방문하고 프랑스의 세네샬이란 말이 돌았다.", 호버든의 로저는 "제프리가 필리프에게 넘어가 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캔터베리의 저베이스는 "제프리가 필리프를 따르고 자신의 영지들을 그에게 복종시켰다."고 적었다. 하인리히 사자공의 직속 신부는 "그들이 서로를 굉장히 사랑했다."고 회고한다.

모후 엘레오노르 다키텐을 정치적 볼모로 앞세운 부왕 헨리 2세의 위협에 굴복하여 아키텐 전체를 모후에게 반환하고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형 리처드와 반대로, 제프리는 리처드가 상위 주군 필리프 2세에게 접근할 일말의 길마저 막아버리며 연이어 정치적 성공을 이어나갔다. 반란을 성공적으로 종식시켜 플랑드르 영지 대부분을 집어삼킨 뒤 본격적으로 플랜태저넷 왕가 분열을 꾀하는 필리프 2세에게 제프리는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재촉을 귀띔하여 부왕과 형을 이간질하였고, 부왕과 형을 대적할 브르타뉴 국경 지대 영주들과 동맹을 다지며 대규모 군사를 모았다. 이처럼 리처드보다 정치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점하며 필리프 2세와 다시 부왕 헨리 2세에 대한 반란을 획책하던 중, 1186년 8월 19일 불과 27세의 나이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6]
잉글랜드 왕 헨리의 아들이자 저명한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가 병석에 누웠다. 그를 상냥하게 지극히 사랑한 프랑스 왕은 파리의 모든 의사를 불러모아 공작을 살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8월 19일,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죽음을 맞이했다. 프랑스 왕이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육신에 파리 신민들과 기사들이 존중과 경의를 바쳤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서 수사와 성직자들이 가장 엄청난 헌신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다음날, 프랑스 왕은 블루아 백작 티보와 파리로 와서 석관에 있는 그의 육신에 방부 처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주교와 성직자들이 있는 가운데, 파리 주교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가장 높은 제단 앞에 공작을 묻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프랑스 왕은 블루아 백작 티보, 누이인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와 그녀의 아들 앙리, 그리고 잉글랜드 젊은 왕의 미망인 누이 마르가리트와 함께 자신의 궁정으로 돌아갔다. 그가 애도한 위대한 왕자가 죽은 운명으로, 몹시 비통해했다.

그들이 우정어린 위로를 하는 동안, 친절하고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부왕 루이처럼 왕자의 마지막 순간들은 그의 마음에 항상 다시 나타나고 항상 그의 마음을 차지했다. 프랑스 왕은 심지어 부왕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브르타뉴 공작의 영혼을 위해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성직자 넷을 두었다.
리고르드
프랑스 왕은 그의 죽음으로 몹시 깊은 슬픔과 절망에 시달렸다. 그를 향한 사랑과 존중을 증명하기 위해 축복받은 처녀에게 바쳐진 파리 대성당의 높은 제단 앞에 공작을 묻으라 명령했다. 장례식이 끝날 무렵에 그가 열려진 무덤 속에 안치된 공작의 관을 향해 뛰어들고자 발버둥치는 것을 주위에서 겨우 말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부친의 슬픔은 그 이상이었다. 젊은 왕의 죽음을 다시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웨일스의 제럴드

3. 사인

호버든의 로저에 따르면 제프리가 에 걸렸고 사인은 마상창시합낙마 사고였다.

캔터베리의 저베이스와 웨일스의 제럴드에 따르면 마상창시합 언급이 없고 사인은 '병'이었다.

프랑스의 궁정 서기 리고르드 또한 마상창시합 언급이 없고 사인은 이었다.

4. 사후

제프리가 조직한 측근 인력은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가 친(親) 프랑스로 흡수함에 따라 프랑스앙주 제국의 적대 관계 속에서 브르타뉴 내에 파벌을 나뉘게 하였다. 제프리의 군사 사령관인 비트리의 알랭은 '브리튼에서 가장 용맹한 기사들 중 한 명'로서 친(親) 필리프의 중추였으며, 한 전투에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일대일 결투를 벌여 낙마시키고 패퇴시키기도 했다.

5. 그 외

  • 웨일스의 제럴드의 증언에 의하면 형 청년왕 헨리리처드 1세와 대조적으로 당시 남성 평균 신장보다[7] 키가 약간 작았지만 몸의 균형이 좋고 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전해지며 헨리 2세의 아들들과 친분이 있었던 남프랑스 음유시인인 베르트랑 드 보른은 노래 가사 말미에서 제프리를 잔인하고 잘생긴 남자(cruel bel senhor)로 묘사한다.
  • 1183년 6월 리무쟁의 트루바두르가 하단의 노래를 작곡해 제프리에게 보냈다.
    나의 주군 백작이여,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대를 비난하고 있다네. 숙녀가 그대가 다가가 말을 걸어 주기를 원했을 때, 그대는 감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네.[8][9] 카탈로니아 식으로 내가 그대의 편에 서서, 그대가 그녀를 헛되이 기다리게 한 것이 부끄럽다오.


    좋은 연인은 연서를 받으면 지체해서는 아니 되오. 숙녀의 관심과 필요를 모르기 때문에 그는 어서 떠날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서야 한다네. 아마 그녀는 그가 나서길 바랄 것이오. 그러니 그는 지체하지 않는 것이 좋구려.


    그대가 그녀에게 보낸 트루베르가 돌아오는 것을 알았을 때 기다려서는 아니 되오. 노르망디를 받을지라도 말이오! 그대가 진심으로 가고자 한다면, 베하와 도르도뉴 사이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나, 이것을 생각하면 아니 되었소.


    (중략)


    제프리 공이 (베하와 도르도뉴 사이로) 떠나지 않으면 푸아투와 가스코뉴를 차지할 것이네. 그가 숙녀들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모름에도 불구하고 말이오.
  • 양성애자 의혹이 있다. 상대는 7살 아래의 절세 미남이었던[10] 상위 주군 프랑스 왕 필리프 아우구스투스로 지목된다. 그러나 이 의혹은 현대에 설득력을 잃었으며 중세사 교수 진 플로리도 제프리 2세와 필리프 2세의 동성 연인이었을 것이란 주장에 회의적이다. 중세 기록가들이 묘사한 제프리와 필리프의 서로에 대한 감정이 중세 필법 중 하나인 과장의 일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제프리가 죽고 형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를 동성 연인으로 삼았다는 썰이 있는데 확실시되는 건 필리프 2세는 제프리와 진실한 우정을 나누었지만 리처드는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겉으로는 친한 척 하면서 수틀리자 배신하였다.
  • 제프리 2세의 딸인 브르타뉴진주로 불리운 엘레오노르는 리처드 1세필리프 2세에게 아들인 프랑스 왕세자 루이와 혼담을 넣었지만 정치적 상황을 중시한 필리프 2세가 이를 거절하고[11] 나중에 부르고뉴 공작 외드 3세와 동맹을 맺기 위해 혼담을 넣었지만 필리프 2세의 모략으로 전면 백지화된다.[12] 대신 필리프 2세는 제프리의 아들 아르튀르 1세를 딸 마리와 약혼시켰고 이런저런 일이 있어도 필리프 2세는 여전히 제프리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을 위해 노트르담 대성당에 헌금하였다.

[1] 필리프 2세의 이복누나.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카스티야 공주 콩스탕스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 예비 시아버지인 헨리 2세와 간음을 하고 아들까지 낳았다는 의혹이 있다.[2] 제프리 2세의 행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에버랏은 제프리와 필리프 2세의 동맹의 세부적인 면은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각에서는 1179년에 비밀리에 동맹이 시작되었을 것이며 비밀리에 이어지고 형 헨리가 죽은 뒤에야 점차 외부로 공개한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된다.[3] 다만 그로서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문서는 전해지지 않는다.[4] 필리프 2세의 이복누나 아델의 지참금[5] 링크 브르타뉴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디자인이었다고 한다.[6] 프랑스 궁정 서기 리고르드의 회고를 보면 필리프 2세의 곁에서 마지막 순간을 보내며 숨을 거둔 것으로 암시된다.[7] 170대 초반으로 추정됨[8] 1183년에 리처드가 아니라 제프리와 베아트릭스 사이에 궁정연애 조짐이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아름답고, 예모 있고, 교양 있는 귀부인이었으며 제프리를 오랫동안 사모했다고 한다. 당대 평에 의하면 제프리 2세는 궁정 연애에 대해 언제라도 사랑을 저버릴 생각을 하는 위인이며, 성적 행위를 사랑이 형성된 후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행위가 사랑 형성에 대해 영향을 발휘함을 주장했다고 한다.[9] 리처드도 궁정 연애담이 전해진다. 1190년 6월 리처드가 노르망디 봉신의 아내에게 "나는 사랑이오. 우리의 사랑을 갈라놓을 이에게 나를 주지 마오. 그러면 그(i.e. 나)는 즉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오."라고 그의 인장에 리본을 달아 연서를 보냈다.[10] 일설에 따르면 그 헨리 2세가 필리프 2세를 보았을 때 충격에 휩싸여 "애절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서둘러 가버려 구경꾼들을 대단히 놀라게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필리프 2세의 친여동생 아녜스도 절세미녀였는데, 동로마에서 서유럽 최고의 아름다움 중 하나로 불렸으며 미모로 황제 마누일 1세의 황녀인 그 마리아 콤니니를 가히 압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11] 자세한 사항은 필리프 2세의 항목 4년만의 재회 참고.[12] 당시 정치, 외교적으로 사면초가에 처한 필리프 2세는 여전히 왕세자 루이의 약혼자 물망에 오른 상태였던 엘레오노르와 외드 3세의 혼담을 막기 위해 외드 3세를 프랑스 궁정으로 소환하여 단기간에 깊은 우정을 쌓았고 이 대공작은 그에게 확고부동한 지지를 결정하여 리처드 1세와 절대로 동맹을 맺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리처드 1세와 그의 신하들의 개입 속에서 결코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외드 3세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의 과부인 포르투갈 공주 테레사와 결혼하고 이미 이혼한 후였는데 사유는 정치적 문제도 있거니와 필리프 2세에 대한 남편의 맹목적 호의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