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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웨식스의 애스크위네 (Æscwine of Wessex) |
재위기간 | 674년 ~ 676년 |
1. 개요
웨식스 왕국의 제11대 국왕이다.2. 상세
당시 웨식스는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웨식스의 9대 국왕이었던 첸왈흐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왕비였던 색스부르흐가 여왕이 되어 통치했다. 이에 하위왕(underking)들과 귀족들이 반발했고, 오랫동안 체올의 후손들에게 왕위를 강탈당했던 체울린의 후손들이 왕위를 되찾기 위해 들고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각지의 귀족들과 유력자들이 자신을 왕으로 자칭하며 반독립적인 상태가 되어버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쪽에서 빠르게 강국으로 부상하는 머시아가 웨식스를 노리고 있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의 가문은 체울린계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황상 보아 그의 가문도 웨식스에서 꽤 알아주는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이 상황에서 색스부르흐가 674년에 죽자, 웨식스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유명한 수도자 베다에 따르면 첸왈흐가 죽은 672년부터 약 10년간 웨식스는 나라가 여러개로 쪼개지는 등 난장판이었다고 하는데, 색스부르흐 사후 첸왈흐의 형제인 첸트위네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방계 중의 방계[1]인 그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는지는 불명이나, 정황상 보아 체울린계의 적통인 캐드왈라가 아직 10대로 어린 상태에서 그를 지지했던 애스크위네와 그의 아버지 첸푸스가 대신 권력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사가에는 아버지 첸푸스가 왕이었다고 기록하는데, 보통 현대에는 앵글로색슨족 연대기에 따라 애스크위네가 왕이었다고 인정한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브레트왈다였던 머시아의 왕 펜다의 아들 울프헤레가 웨식스를 쳐들어왔고, 그는 맞서 싸웠으나 675년 대패한다. 그러고도 1년 더 왕위를 지킨 것으로 보아 울프헤레가 왕위는 빼앗지 않고 복속시킨 것으로 만족한 듯한데, 울프헤레 사후인 첸트위네 때부터 웨식스는 머시아에 반격을 가해 엄청난 속도로 확장을 시작한다.
676년 사망했으며, 아들이 없었는지 체올계이자 첸왈흐의 형제[2] 첸트위네가 왕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