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23:45:15

토머스 머크

성명 토머스 머크
Thomas Merke
생몰년도 미상 ~ 1409년 또는 1410년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직위 칼라일 주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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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성직자. 리처드 2세의 폐위를 끝까지 반대했으며, 헨리 4세를 모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지만 발각되어 런던 탑에 수감된 후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사면되었다.

2. 생애

당대 사료는 토머스 머크의 기원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다만 머크 가문이 자리잡고 있던 미들식스의 드레이튼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일찍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학을 수강했고, 졸업했을 때 신학 학사 박위를 받았다. 1395년 11월 롤라드파를 근절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파견된 옥스퍼드 대학 대표단의 일원이었고, 1397년 초 웨스트민스터의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다.

1397년 4월 23일 칼라일 주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에 러틀랜드 백작 노리치의 에드워드, 노팅엄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와 함게 외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으로 파견되어 여러 지역 귀족들과 접견했다. 가을에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해,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를 상대로 반역죄를 꾸민 혐의가 씌어진 청원파 일당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애런들 역시 이들과 관련이 있으니 물러나야 한다고 성토했다. 9월 30일 여러 영주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인들의 유물 앞에서 리처드 2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1398년 리처드 2세의 왕비인 발루아의 이자벨의 지참금을 확보하기 위해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와 함께 프랑스로 여행했다. 1399년 4월 16일자 유언장에서, 리처드 2세는 그를 유언 집행인 중 한 명으로 지명했다. 1399년 5월, 토머스 머크는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동행했다. 그해 여름, 지난날 리처드 2세에 의해 추방되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에 몰래 상륙한 뒤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머크는 아일랜드에서 웨일스로 급히 돌아온 리처드 2세와 함께 했으며, 이후에도 끝까지 왕과 함께 했다. 그는 리처드 2세에게 보르도로 피신하라고 조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반란에 가담한 영주인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왕이 협상을 시작했을 때 퍼시에게 왕을 해치지 않을 것을 맹세하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이후 런던 탑에 일시적으로 구금되었던 머크는 1399년 9월 30일 의회에서 리처드 2세의 퇴위를 논하는 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오직 하느님만이 왕을 심판할 수 있으며, 신민이 왕을 심판할 수는 없다"며 리처드 2세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99년 10월 6일, 새 국왕 헨리 4세의 첫번째 의회에 소환된 후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살해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완전히 정당화하고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칼라일 교구의 통제권을 잃었다.

1399년 12월 17일, 머크는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장인 윌리엄 드 콜체스터의 집에서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디스펜서 남작 토머스 르 디스펜서, 럼리 남작 랄프 럼리 등과 함께 모여서 리처드 2세를 복위할 계획을 논의했다. 그들은 주님 공현 대축일을 축하하기 위해 윈저에서 열리는 축제에 참석한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죽이기로 결의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축제는 성탄절부터 시작해 12일간 이어져 1400년 1월 6일 토너먼트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들은 킹스턴에서 무장부대를 모으고 야밤에 윈저성에 들어간 뒤 1월 6일 토너먼트에 참석한 헨리 4세와 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후 리처드 2세를 복위하기로 했다. 여기에 웨스트요크셔의 폰테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있는 리처드 2세를 빼돌리는 작전도 수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었고, 거의 모든 음모 참가자가 처형되었다. 머크는 1400년 1월 10일 런던 탑에 수감되었고, 1월 27일 반역죄 재판에 소환되었다. 배심원단은 머크에게 유죄를 선고했지만 집행을 연기했다. 1400년 11월 28일, 헨리 4세는 머크를 사면하고 석방하기로 했다. 아마도 성직자를 죽였다가 교회의 반발이 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칼라일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수입이 끊겼다. 1401년 3월 21일, 헨리 4세는 머크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새로운 성직을 신청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단, 그곳은 교구가 아니고 성직으로 인한 연간 수입이 100마르크를 초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달렸다. 머크는 교황으로부터 요크셔의 메셈에서 성직 활동을 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도셋의 슈투르민스터 마샬교회 주임을 맡았고, 윈체스터 주교가 자리를 비웠을 때 대리를 맡았다. 1406년 켄터베리 교회 협의회에 참석해 설교했으며, 1408년 루카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에게 서방교회 대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사임할 것을 청원한 추기경들을 지지했다. 1409년 또는 1410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