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에드먼드 모티머 Edmund Mortimer | |
생몰년도 | 1376년 11월 3일 ~ 1409년 2월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웨일즈 러들로 성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웨일즈 할레치 성 | |
아버지 | 에드먼드 모티머 | |
어머니 | 필리파 플랜태저넷 | |
형제 | 엘리자베스, 로저, 필리파 | |
아내 | 카트린 | |
직위 |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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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기사.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를 진압하려 했다가 오히려 패배해 사로잡힌 뒤 글린두르와 손잡고 헨리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2. 생애
1376년 11월 3일 잉글랜드 왕국 웨일즈 러들로 성에서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와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이자 클라렌스 공작을 역임하고 있던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딸인 필리파 플랜태저넷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먼드 모티머는 1369년 잉글랜드 원수가 된 뒤 잉글랜드 정계를 좌지우지하던 곤트의 존을 상대로 정치적 공세를 펼쳤지만 끝내 실각했다. 이후 1379년 아일랜드 보안관을 맡아서 아일랜드 남부 족장들을 평정하기 위해 먼스터로 진군하던 중 1381년 12월 27일 코크에서 반란군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겨우 5살이었던 에드먼드는 아버지가 생전에 유언장에 적은 대로 연소득 300 파운드의 일부 영지를 상속받았다. 또한 그의 형이자 제4대 마치 백작이 된 로저 모티머는 그에게 도싯의 영지와 240 파운드의 연금을 제공했다. 이후 그는 형 로저의 영지 관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1397년 아일랜드 보안관으로 부임한 형을 도왔다. 1398년 형이 사망한 뒤 제5대 마치 백작이 된 어린 조카 에드먼드 모티머의 후견인으로서 모티머 가문의 영지를 실질적으로 경영했다.
1399년 여름, 곤트의 존의 아들인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를 생포했다. 에드먼드의 조카 에드먼드 모티머는 곤트의 존의 형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었기에, 원칙상으로는 볼링브로크의 헨리보다 왕위 계승에 근접했다. 하지만 그는 대다수 귀족이 볼링브로크의 헨리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달리 방도가 없다고 여기고, 1399년 8월 2일 해리퍼드에서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복종하겠다고 서약했다. 1399년 10월 리처드 2세가 퇴위한 뒤,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한 후에도, 에드먼드는 초기엔 그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1400년, 웨일즈에서 오와인 글린두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1402년 6월, 글린두르의 군대가 모티머 영지를 침공하자, 에드먼드는 해리퍼드셔에서 군대를 집결해 이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6월 22일 브린 글라스 전투에서 오와인 글린두르에게 참패하고 사로잡혔다. 이후 모티머의 친구들, 특히 모티머의 누이 엘리자베스의 남편이었던 헨리 '핫스퍼' 퍼시가 몸값을 모집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모티머 가문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지 의심해 에드먼드의 몸값을 지불하길 거부했고, 급기야 에드먼드의 영지를 압수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격분해 오와인 글린두르 편으로 돌아섰다.
1402년 11월 30일, 에드먼드는 오와인 글린두르의 딸 카트린과 결혼했다. 이후 그는 리처드 2세의 후계자는 헨리 4세가 아니라 자신의 조카이자 5대 마치 백작인 에드먼드 모티머라고 선포했다. 1403년에는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그의 아들이자 엘리자베스 모티머의 남편인 헨리 '핫스퍼' 퍼시, 노섬벌랜드 백작의 동생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가 오와인 글린두르-모티머 연합에 가담했다. 이들은 잉글랜드 왕국을 3개로 나누고자 했다. 모티머 가문은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고, 오와인 글린두르는 웨일스를 차지하며, 퍼시 가문은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주권을 갖기로 했다.
헨리 4세는 이들의 병력이 합세하기 전에 각개격파하기로 했다. 1403년 7월 21일, 헨리 4세가 이끄는 토벌군이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를 전사시키고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를 체포해 처형했다.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반란에 미처 가담하기 전에 아들과 동생이 모조리 죽자 헨리 4세에게 항복했고, 반역죄를 모면했지만 잉글랜드 원수직을 상실하고 여러 영지를 빼앗겼다. 하지만 노섬벌랜드 백작은 이후에도 반군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는 윈저성으로 끌려갔다가 1405년 윈저 성에서 탈출했지만 곧 왕의 추종자들에게 생포되었다.
퍼시 가문이 그렇게 무너진 뒤에도 에드먼드 모티머와 오와인 글린두르는 웨일스에서 계속 항전했고,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았다. 1405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재차 반란을 일으켰지만 5월 29일 쉽턴 무어 전투에서 참패하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이후 몬머스의 헨리 왕자가 이끄는 토벌군이 웨일즈의 할레치 성에서 에드먼드 모티머를 포위했다. 1409년 2월, 에드먼드 모티머는 농성하던 중에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을 낳았지만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기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