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7:33:34

히카루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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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적
2.1. 초반
2.1.1.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다2.1.2. 첫사랑 후지츠보2.1.3. 첫 부인 아오이노우에2.1.4. 이상적인 여인 와카무라사키2.1.5. 첫사랑과의 재회, 그리고...2.1.6. 와카무라사키를 니조인에 데려오다2.1.7. 겐지의 아들을 낳은 후지츠보2.1.8. 중궁 후보에서 스캔들 메이커로, 오보로즈키요2.1.9. 정실부인과 화해, 그러나..2.1.10. 무라사키와 합방2.1.11. 출가해버린 첫사랑2.1.12. ‘스마(須磨)' 로 낙향하다
2.2. 중반2.3. 후반
3. 지위4. 모델5. 그 외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光源氏
일본의 고전문학 겐지모노가타리의 주인공.

'겐지'는 성씨이고[1] 작가가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히카루'가 성이고 이름이 '겐지'가 아니라는 말. '히카루 겐지'는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겐 씨라는 뜻이다. 히카루 겐지 외에도 '겐지노키미', '히카루노키미'라고도 불리는데, '키미'도 이름이 아니라 지체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쓰는 경어의 일종이다.

비단 히카루 겐지뿐만 아니라 겐지모노가타리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성명이 아닌 별명으로 지칭된다. 예컨대 '후지츠보'는 교토고쇼의 전각 이름인데 기리츠보 천황의 후궁 후지츠보와 스자쿠 천황의 후궁 후지츠보는 다른 사람인데도 그들이 거처한 곳인 '후지츠보' 전각을 따 '후지츠보'라고 불리기 때문에 겐지모노가타리를 처음 읽을 경우 동일 인물로 헷갈리기 쉽다. 남자들도 히게쿠로(검은 수염) 중장이니 호타루[2] 병부경 등으로 불리거나 아예 직책명 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도 후지와라 가문 출신임은 확실하나 정확한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 필명+부친의 직위명이 이름처럼 됐다.

천황 기리츠보테이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기리츠보코이에게서 얻은 아들. 절세미인이던 어머니를 그대로 뽑아낸 듯한 아름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어서 기리츠보테이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다. 그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나며 몸에서는 좋은 향기까지 났기에 그를 직접 본 사람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넋을 잃었다고 한다. '히카루 겐지'라는 호칭도 그 아름다움이 대단하여 '겐 씨(源氏)'라는 성씨 앞에 특별히 '빛나다'라는 뜻으로 '히카루(光)'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2. 행적

2.1. 초반

2.1.1.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다

모친 기리츠보 갱의(更衣)는[3] 천황의 후궁 가운데서는 비교적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미모로 기리츠보 천황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제2황자를 낳는데 그가 바로 히카루 겐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갱의는 이를 질투한 다른 후궁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히카루가 3살 때 세상을 뜨고 만다.[4] 일찍 여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비롯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앞으로 겐지의 평생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갱의가 죽고 기리츠보 천황은 오랫동안 상심에 잠기는데, 갱의의 삼년상을 치를 동안 제2황자를 외조모에게 맡기고 그동안 황자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황자의 외가, 즉 갱의의 사가에 막대한 후원을 해준다. 갱의 생전 천황이 갱의를 총애하는것을 시기하던 천황의 첫번째 부인이자 우대신의 딸인 고키덴 뇨고는 그 총애를 보고 갱의의 아들 히카루가 자신의 아들을 제치고 동궁으로 책봉될까봐 대단히 견제했는데 결국 고키덴 뇨고 소생의 제1황자(훗날의 스자쿠 천황)이 동궁으로 책봉된다.

천황 개인적으로는 총애하던 후궁의 아들로 후계를 세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모친이 권신인 우대신의 딸이라 든든한 뒷배가 있는 제1황자에 비해 모친이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5] 뒷배가 없는 제2황자를 동궁으로 세웠다가는 황위다툼이 필연적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 제1황자를 동궁으로 세우고 제2황자는 신적강하시키면서 미나모토 씨(源氏)를 하사하였다. '겐지'라는 성씨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그래도 히카루에 대한 부황의 총애는 여전해서 이름만 신하일뿐, 암묵적으로 황족 예우를 받도록 했으며 그에 걸맞은 부와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게 해 주었다. 또한 어떻게든 겐지에게 그를 보좌할 세력을 만들어주려고 하였고 그 결과 겐지가 성년이 되자마자 좌대신[6]의 딸 아오이와 혼인을 명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당시 아오이는 훗날 스자쿠 천황이 되는 제1황자가 점찍어 둔 여인이었기에 결과적으로 기리츠보 천황은 제1황자에게 동궁의 자리를 주는 대신 그가 마음에 둔 여인을 빼앗아 겐지에게 준 셈이 되었다.

히카루 겐지라는 별명과 함께 신적강하된 것에 대해서 겐지모노가타리에서는 고려인 관상가[7]의 예언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8] 당시 일본을 방문한 고려인 가운데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황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에 부친 뒤에 겐지를 그의 시중 우대변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고료칸(鴻臚館)[9]에 보내 관상을 보게 했는데, 우대변의 아들이라는 겐지를 가만히 쳐다본 관상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의 어버이가 되시어 제왕의 지위에 오를 관상인데,[10] 그렇게 된다면 이분께 그다지 행복한 길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조정의 중신이 되어 제왕을 보좌할 만한 인물 같지도 않습니다.[11]

천황은 관상가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고려인 관상가에게 많은 하사품을 내렸다.[12] 다만 이 점에 대해서 동궁의 외척인 우대신 등은 "외국인 사신이 뭐 한 게 있다고 저렇게 많은 하사품을 받지?"라고 의심을 품었고, 천황은 친왕선하를 내리기도 전에 겐지를 신적강하시키고 미나모토 성씨를 하사해 조정의 신하로 삼게 하였다고 한다.[13]

2.1.2. 첫사랑 후지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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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겐지가 9살일 때, 기리츠보 천황은 죽은 갱의를 그리워하다 못해 그녀와 꼭 닮고 신분은 더 고귀한 후지츠보 뇨고를 후궁으로 들여[14] 아꼈는데 당시 후지츠보는 14세였다. 천황이 어린 겐지를 후지츠보에게 데려와서 '이 아이의 모친은 당신과 꼭 닮았으니 이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아껴주라'고 신신당부하였고 주변에서도 후지츠보와 갱의가 닮았다고들 하니, 그 말을 들은 겐지는 자신의 어머니와 닮았다는 후지츠보에 대한 동경을 키우다 못해 사랑으로 번지고 만다.막장의 시발점[15]

2.1.3. 첫 부인 아오이노우에

12살이 된 겐지가 관례를 올리자 부황은 자신의 여동생 즉 내친왕과 후지와라 좌대신 사이에서 난 딸 아오이와 겐지를 혼인시키는데, 이는 역시 어머니가 갱의 출신이라 뒷배가 없는 제2황자를 당시 권세가인 후지와라 가문과 맺어주려는 부황의 의지였다. 이때 아오이는 16세였다.

그러나 천하의 히카루 겐지의 첫번째 정실부인이 된 아오이노우에는 정작 기쁘지 않았으니 본래 좌대신 부부는 딸을 겐지의 이복 형인 동궁(이후 스자쿠 천황)과 혼인시켜 중궁으로 만들 생각이었고 아오이노우에 본인도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기리츠보 천황의 뜻에 따라 금상의 총애 이외에는 마땅한 후견인도 없는 12세의 어린아이인 겐지와 결혼한 것이 성에 찰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아오이노우에는 아름답고 기품은 있었지만 혼인생활 내내 고고하고 엄격한 태도를 고수하였고 겐지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아내를 어려워하여 불행한 결혼생활이 이어진다.[16]

2.1.4. 이상적인 여인 와카무라사키

와카무라사키는 히카루 겐지의 첫사랑 후지츠보 중궁의 오빠인 ‘병부경 친왕’의 혼외자인데, 18세의 히카루가 학질에 걸려 기타야마의 절에서 요양할 때 처음 만났다. 즉 첫사랑의 조카. 그런 만큼 후지츠보 중궁을 닮은 와카무라사키에게 겐지는 첫눈에 반하지만, 그녀의 나이가 어려 일단 후견인이 되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 그러나 무라사키도 이미 히카루에게 마음이 있게 되어 학질이 다 나은 겐지가 교토로 떠나자 그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2.1.5. 첫사랑과의 재회, 그리고...

결혼도 했고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어도 여전히 후지츠보를 잊지 못한 겐지. 기타야마에서 요양을 끝내고 교토로 돌아온 그는 마침 후지츠보가 몸이 좋지 않아[17] 사가로 퇴궐한 것을 알고 그 사가의 시녀를 매수, 드디어 그녀와 관계를 가져 임신시킨다.[18] 겐지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었다.

2.1.6. 와카무라사키를 니조인에 데려오다

와카무라사키의 외조모가 사망하고 친부 병부경 친왕이 무라사키를 친왕가로 데려오려고 한다는 것을 안 겐지는 무라사키를 보쌈하듯이 자신의 거처인 니조인으로 데려와서 직접 그녀를 기르고, 와카무라사키는 그런 겐지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겐지의 모친 기리츠보 갱의를 닮은 후지츠보 뇨고를 닮은 뛰어난 미모에 높은 교양을 갖춘 아가씨로 성장한다. 그러나 겐지가 무라사키의 소재를 그녀의 가족들에게 한동안 알리지 않아 무라사키는 이후에도 의지할 곳이라고는 겐지 뿐인 처지가 되고 만다.

2.1.7. 겐지의 아들을 낳은 후지츠보

시간이 흘러 후지츠보가 겐지의 아이를 해산하였는데, 그 아이가 바로 스자쿠 천황의 뒤를 이어 천황이 되는 레제 천황이다. 사실은 부황의 후궁을 범해 태어난 아이임에도 기리츠보 천황의 열번째 아들로 인정받기에 이르니 후지츠보 뇨고는 양심의 가책으로 크게 괴로워하고,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리츠보 천황은 그 아이가 겐지와 닮았다는 이유로 매우 사랑하여 스자쿠 천황의 뒤를 이을 동궁으로 세우고자 스스로 상황 기리츠보인이 되어 물러나니, 겐지 자신은 동궁이 되지 못했지만 그 아들이 동궁으로 책봉된다. 또 결과적으로 동궁을 낳은 것이 된 후지츠보 뇨고는 후지츠보 중궁으로 승격되었다.

2.1.8. 중궁 후보에서 스캔들 메이커로, 오보로즈키요

오보로즈키요는 우대신의 여섯 째 딸로, 역시 우대신의 장녀인 고키덴 뇨고의 여동생이다. 고키덴 뇨고는 히카루 겐지의 계모이자 이복 형 스자쿠 천황의 어머니가 되므로 겐지 입장에서 오보로즈키요는 이복 이모가 된다.

20세의 히카루 겐지는 벚꽃 연회에 갔다가 1살 연하의 오보로즈키요를 처음 만났는데 둘은 얼마 후 우대신 가의 연회에 겐지가 참석하면서 재회하게 된다. 이미 겐지에게 푹 빠진 그녀는 중궁이 되기 위해 금이야 옥이야 길러진 자신의 처지도 잊고 겐지에게 매달리는 바람에 발빠른 소문에 의해 망신당하고 중궁 자리도 날아가버린다.

2.1.9. 정실부인과 화해, 그러나..

그동안 사이가 나빴던 정실부인 아오이노우에와의 결혼생활은 그녀가 겐지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급격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겐지는 아오이노우에를 자신의 정실부인으로서 진심으로 위했고, 아오이노우에도 이전보다 많이 누그러져 겐지를 자신의 남편으로 존중하여 부부다운 부부로 거듭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신 중이던 아오이노우에가 수레를 타고 꽃놀이를 나갔다가 로쿠조노미야스도코로의 수레와 충돌하여 시종들끼리 싸움이 벌어졌고, 그 결과 로쿠조노미야스도코로가 퇴물 취급을 받고 물러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녀는 이 일로 깊은 원한을 품고 아오이노우에를 밤낮으로 괴롭히다가 겐지와 좌대신 일가 남자들이 관직 문제로 외출한 사이 아오이노우에를 죽이고 만다. 아들 유기리를 낳은 지 열흘 만의 일이었다.

2.1.10. 무라사키와 합방

아오이노우에의 상이 끝난 후 겐지는 성년이 된 무라사키(당시 14세)와 드디어 합방한다. 이 때부터 겐지의 여인이 된 무라사키는 무라사키노우에로서 히카루의 폭풍같은 여성편력 속에서도 평생 겐지의 여인들 중 첫번째 자리를 차지하나, 끝내 그의 정식 아내가 되지는 못하고 사실혼 관계에 만족해야 했다.

2.1.11. 출가해버린 첫사랑

여전히 첫사랑 후지츠보 중궁을 잊지 못한 겐지는 부황 기리츠보인이 붕어하자 이제 자신을 받아달라며 매달린다. 그러나 스자쿠 천황의 모후 고키덴 뇨고가 호시탐탐 자신과 피 한 방울 안 섞인[19] 동궁을 찍어낼 것을 노리고 있는 이 때, 겐지와 후지츠보가 만나는 것이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동궁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음을 안 후지츠보 중궁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 아들과 헤어져 출가할 것을 결심한다. 일평생 후지츠보를 포기하지 못한 겐지가 이를 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이기에 그에게는 철저히 비밀로 하여 겐지는 후지츠보가 출가하는 당일에야 이를 알았고, 출가한 여인은 취할 수 없다는 불가의 계율 때문에 겐지는 그 많은 여인을 품고도 진짜 사랑한 여성만은 영원히 품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2.1.12. ‘스마(須磨)'[20] 로 낙향하다

우대신은 겐지와 염문설이 난 딸 오보로즈키요를 뇨고로 입궁시킨 뒤 중궁으로 만들려는 계획은 포기하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죽은 아오이노우에 대신 딸을 겐지의 정실부인으로 보내려고 한다. 그러나 히카루는 무라사키노우에때문에 이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우대신 가문과는 또 한번 크게 척을 지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 궁녀로 입궁한 오보로즈키요는 중궁이 되는 길은 막혔지만 그래도 스자쿠 천황의 총애를 받으며 순조로운 궁궐 생활을 하는 듯 보였는데 사실은 히카루에 대한 연심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채라서 겐지와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겐지의 첫사랑 후지츠보 중궁이 출가한 후의 어느 날, 오보로즈키요는 이미 천황의 여인이 된 신분에도 불구하고 겐지와 관계를 가지려다 부친 우대신에게 발각되어 교토고쇼가 발칵 뒤집히고 만다. 이 당시 겐지는 태상황 기리츠보인이 세상을 뜬 것을 계기로 이복 형 스자쿠 천황와 외척 고키덴 뇨고 및 우대신 가문의 견제로 인해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상태였는데 설상가상 천황의 여인이 된 우대신 가의 여식 오보로즈키요를 건드렸으니 이들이 겐지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더군다나 오보로즈키요를 정실부인으로 들이라는 우대신 측의 제안도 거절하지 않았던가? 이들이 겐지를 찍어내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은 겐지는 결국 자진해서 고베의 스마(須磨)라는 해안 벽지로 낙향한다. 그의 나이 26세 때 일이었다. 2020년에 NHK 드라마 〈좋아요! 히카루 겐지 군〉은 겐지(치바 유다이 분)가 시종 하나에 의지해 인적 없는 밤길을 걷다가 2020년의 일본으로 타임슬립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겐지는 자유로운 솔로랍시고 유가오, 우츠세미, 로쿠조노미야스도코로, 무라사키노우에 등을 만나고 다니다가 후지츠보가 병 때문에 휴가를 받고 친정에 있을 때 시녀를 매수해 침입, 검열삭제에 성공해 아들이 태어났다. 이때 후지츠보가 낳은 아이는 기리츠보테이가 죽고 고키덴 소생의 아들(겐지의 형) 스자쿠가 즉위한 뒤 후계자로 지명받는다. 이것 때문에 후지츠보는 평탄한 삶을 잃고 마음고생 헬게이트에 빠지고, 겐지가 사랑이랍시고 자꾸 쳐들어오는 통에 출가로 도망치지만 아들의 출생의 비밀을 숨기려 평생 세상을 속여야하는 불안과 자책에 시달린다. 하지만 겐지는 그녀를 어떻게 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즉 계모의 예비 며느리 겸 여동생, 자신의 이복 이모 뻘 밑 형수 될 사람을 건드린 겐지는 제 무덤을 파 괘씸죄에 걸렸고, 상황 파악은 한건지 쫓겨나는 건 꼴사납다며 선수 쳐 스마로 튀어 3년 간 엎드려 산다. 출가한 후지츠보도 그 때문에 같이 걸려들어 자식이 동궁 위에서 나가 떨어지기 직전까지 가 위기에 처해 숨죽여야 했는데, 동궁의 후견인이 하필 겐지였기 때문에 불경한 겐지가 미는 동궁을 폐할 논의까지 나왔다.

2.2. 중반

몇 년 후, 고키덴 뇨고의 친정아버지[21]가 죽자 겐지는 천황의 명으로 유배지에서 돌아와 미리 작업을 걸었던 무라사키노우에를 포함한 애인들을 새로 지은 저택인 육조원에 모았다. 그리고 스자쿠가 양위하면서 후지츠보가 낳은 겐지의 아들이 레제테이로 즉위한다. 겐지는 스마에서 사귄 애인인 아카시노카타가 자기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자 모녀를 스마에서 교토로 불러들였고 무라사키노우에에게 훗날 아카시 중궁이 될 딸의 양육을 맡겼으며, 로쿠조노미야스도코로가 이 무렵 죽자 그녀의 딸을 새 천황의 비로 들였다. 이후 후지츠보는 레제테이가 즉위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병사했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던 레제테이는 승려로부터 친아버지가 사실 겐지라는 걸 알고 '아버지를 신하로 삼았다'며 충격에 빠진다. 고심 끝에 레제테이는 겐지에게 양위하려 했지만 겐지가 천황 자리를 받지 않자 그에게 준태상천황의 지위를 내린다.

아무튼 겐지는 권신이 되어 자신의 여인들에게 각자 집 1채씩 내주어서 최고의 하렘을 꾸미고 풍류를 누리며 산다. '자식을 셋 두는데 1명은 천황이 되고 1명은 중궁이 되고 1명은 태정대신이 된다'[22]는 예언[23]대로 후지츠보와 내연의 관계로 생긴 아들은 천황이 되고, 딸은 그 다음 대 천황의 비가 되었다. 그리고 장남 유기리가 나중에 태정대신이 되어 그야말로 세상의 권세를 한 몸에 지녔다.

2.3.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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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반에 상황인 이복형이 출가하면서 떠맡기듯이 셋째 딸 온나산노미야를 겐지에게 후실로 주며 재혼했고, 가장 사랑하며 겐지의 정실인 무라사키노우에가 졸지에 첩이 되는 난맥상에 빠지고 만다.[24] 무라사키노우에는 고뇌하다가 병에 걸리고, 겐지가 간호에 전념하던 사이 정처인 온나산노미야를 동경하던 카시와기가 오래 전에 겐지가 후지츠보에게 반하고 관계를 맺은 것과 비슷한 일을 벌이고 만다. 그렇게 불륜의 아이를 낳은 온나산노미야는 고민하다가[25]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며 카시와기는 마음의 병을 앓다가 죽는다. 겐지는 이 때 태어난 아이인 카오루를 양자로 삼는데 예전에 후지츠보가 낳은 아이의 정체를 아버지가 전혀 몰랐을지, 알지만 모른척 했는지 고민했다.

한편 무라사키노우에도 병을 앓다가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겐지는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무라사키노우에도 죽자 겐지는 허무에 몸부림치며 1년을 쓸쓸히 보내다가 출가를 결심한다. 그 후 2부인 우지 10첩은 겐지가 죽고 시간이 지난 뒤 그의 외손자 니오노미야와 표면적으로 그의 차남으로 되어 있는 카오루, 두 사람이 짝사랑하는 우키후네의 이야기다.

3. 지위

근위 중장(近衛中將)(종4위) → 近衛中將(정3위)[26]참의(參義)[27]/재상중장宰相中將[28] → 대신 → 준태상황

4. 모델

가공의 캐릭터지만 히카루 겐지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의견이 분분한데, 일본 위키피디아를 포함한 일본 웹사이트들의 설명으로는 미나모토노 토오루라는 설이 유력시되는 듯하다.

또 무라사키 시키부가 활약한 무렵의 최고 권력자인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모델이라는 설도 제법 지지를 받고 있는 모양. 무라사키 시키부로 나카타니 미키가 출연한 2011년 영화 <겐지모노가타리-천 년의 수수께끼>에서는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이 사람은 딸 네 명을 천황과 결혼시켰고, 세 명의 천황의 외조부가 되어 후지와라가 세도정치의 최전성기를 구축한 인물이다.[29] 또한 그의 시대가 헤이안 귀족 문화의 절정기이기도 했다.

이 외에 모델로 거론되는 인물 중 특이한 인물은 아리와라노 나리히라인데, 그는 5, 7, 5, 7, 7의 정형시인 와카(和歌)를 중심으로 구성된 125개의 단편을 모은 헤이안 시대의 이야기집인 <이세 이야기>(伊勢物語)의 주인공 모델로도 유력시되는 사람이다. 그는 헤이제이 덴노의 손자로, 아버지는 아보(阿保) 친왕이다. 아버지가 구스코(薬子)의 난(810)에 연루되어 규슈(九州) 다자이후(太宰府)에 유배되고, 나리히라는 아리와라(在原) 성을 하사받아 이후 신하의 신분이 되어 종4위의 중장에 이른다. 실제 아리와라노 나리히라도 당대의 유명한 꽃미남에 바람둥이였기 때문에 더더욱 모델로 여겨지는 듯하다.[30] 천황의 자손인데 신적강하된 면도 겐지와 같다.

그 외 모델로 거론되는 인물은 58대 천황인 고코 덴노 설, 또다른 후지와라가 귀족인 후지와라노 코레치카 설, 54대 닌묘 덴노의 아들인 미나모토노 히카루 설 등 9세기에서 11세기에 실존했던 대부분의 천황, 황족, 귀족들이 무수히 거론된다. 이 사람들 각각의 개인적 면모가 조금씩 조합돼서 만들어진 캐릭터가 바로 히카루 겐지라고 볼 수도 있다.

5. 그 외

겐지는 후지츠보, 로쿠조노미야스도코로, 우츠세미, 오보로즈키요 등 온갖 여인을 후렸다. 나름 규칙은 있어서(...) 모녀덮밥은 먹지 않고 여승도 건드리지 않지만,[31] 그래도 여자에게 껄떡대는 것은 여전하다. 사실 겐지는 모녀덮밥을 먹은 게 아니고 먹었는데, 로쿠조노미야스도코로의 딸 아키코노무 중궁에게 나잇값도 못하고 껄떡대다가 중궁이 대차게 내쳐서 버로우 탄 전력이 있다. 이 아키코노무 중궁은 후지츠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겐지의 친아들의 정실, 며느리다! 심지어 겐지는 자기 아들의 부인이고 안 된다는 인식을 하면서도 제어를 못하고 계속 들이대니 그녀 입장이나 읽는 독자로서는 환장할 노릇.

그나마 유가오의 딸 타마카즈라는 유가오가 죽은 후에 만나서 모녀덮밥이 되진 않았지만, 눈 뜨고 못 볼 수준의 밝힘증은 거의 병 수준으로, 오히려 여자를 괴롭히는 일이 대부분인 민폐 캐릭터.

후지츠보의 사례를 볼 때 은근슬쩍 연상 취향이 있는 듯하다. 실제로 나이 많은 할머니와도 잤고 본래는 오보로즈키요, 로쿠조노미야스도코로를 적극적으로 꼬신다. 겐지가 작정하고 꼬신 로리는 무라사키노우에 뿐이며, 그마저도 자기 취향에 맞춰서 자라나게 하기 위해 꼬신거지 로리 보고 반해서 들고온 로리콘은 아니었다. 나이 먹어 들인 어린 후처에게 매력을 못 느끼는 듯한 묘사도 나온다.

무수한 관계에 비해 자식복이 없어 사생아(레제테이), 양자(카오루),[32] 서녀(아카시노히메키미)를 빼면 적자는 유기리뿐이다. 부친 기리쓰보는 아들만 열, 스자쿠가 1남 4녀는 되는데 그 많은 관계에서 겨우 셋[33] 밖에 없는 걸로 보아[34] 실상은 씨 없는 수박 수준.

작품 내에서 아무리 겐지를 칭찬하고 추어올리고 찬양해도, 21세기 현대 사회의 한국인이 보기엔 어떻게 해도 막장 병진(...).[35] 겐지가 칭송받는 이유는 '요즘 식으로 따지면 재벌집 남자가 여자들한테 강남에 아파트 1채씩 다 사준 이야기'라서 그렇다거나천잰데?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편에서도 일본식 정경관 유착을 설명할 때 잠깐 겐지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그런 것만은 아니고 겐지모노가타리 안에서 겐지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과 미모를 가지고 풍류를 즐길 줄 알았으며 이것이 후대인에게 크게 어필한 것. 일본의 귀족 사회는 풍류[36]라는 요소를 굉장히 중시했는데 겐지는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상이었다. 물론 당대의 윤리관으로도 겐지는 막장 급이라 현실에서는 목 날아갈 짓을 평생 저지르고도 무사했을 뿐,[37] 실제로 실무 능력 같은 것도 없고 일하지 않으면서도 모두에게 사랑받고 우아한 히카루 겐지라는 이미지가 일본이 생각하는 귀족의 원류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실제적인 능력이나 백성을 위하는 부분에는 관심도 능력도 없는 인물로 나온다.[38][39] 저 시대 귀족들 자체도 그렇다지만, 저게 제왕이 되면 나라 말아먹는다는 예언이 일부 설득력 갖는 부분.중국, 한국 같았으면 명재상, 명장 풀세트 끼지 않는 이상 백퍼 나라 말아먹는다.

6. 대중매체에서

80년대에는 그의 이름을 딴 아이돌 그룹 히카루GENJI가 결성되기도 했다.

2000년 가부키 무대판에서는 2023년 13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맡았다. 당시에는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였다.

2001년 '천 년의 사랑 히카루 겐지'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는데, 겐지 역을 다카라즈카 가극단 출신 여배우인 아마미 유키가 맡았다.

2009년에는 '겐지 이야기 천년기'라는 제목으로 애니화되어 히카루 겐지 역을 사쿠라이 타카히로가 열연했다. 애니는 스마 유배 시점까지만 다루며 명대사는 "그래도 사랑!!!"

2020년 '좋아요! 히카루겐지군!'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 [40] 되어 히카루 겐지 역을 치바 유다이가 연기한다. 이 드라마에선 히카루 겐지가 현대로 넘어오는 판타지성 로맨스코미디다.


[1] 겐지는 황족이 신적강하할 때 받는 본성미나모토를 다르게 읽은 것이다. 즉 히카루 겐지의 본명은 대략 미나모토노 XXXX일 것이다. (본성의 경우 성 뒤에 노(の)가 붙는다.)[2] 반딧불이라는 뜻. 본명이 아니고 이 사람이 여자에게 구애할 때 반딧불이 나오는 장면이 있어 이런 별명이 붙었다.[3] 천황의 후궁 중 3위 대납언 이하 당상관 이상인 벼슬아치의 여식에게 내려지는 품계. 한편 섭관 이후 3위 이상인 공경('공경'의 '공'은 태정대신, 좌대신, 우대신이며 '경'은 대납언, 중납언, 참의, 3위 이상의 조관이다.)의 여식이 천황의 후궁으로 입궐하면 뇨고/여어(女御)가 된다. 중궁이나 황후는 뇨고 중에서 뽑는다. 기리츠보 갱의를 질투한 첫번째 부인 고키덴 뇨고는 그 부친이 우대신이었다.[4] 그런데 정작 갱의가 세상을 떠나자 갱의를 괴롭히던 후궁이나 시녀들은 갱의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묘사상 갱의의 처신은 그다지 문제가 없던 것으로 보이며 단지 천황의 파격적인 총애를 받아 미치도록 질투받은 것으로 보인다.[5] 겐지의 외할아버지가 대납언 출신이라 아무래도 가문의 격이 떨어진다.[6] 우대신보다 한끗발 더 높다. 특히나 좌대신 위로는 태정대신밖에 없는데 태정대신은 상설직이 아니라서 실질적으로는 좌대신이 태정관의 우두머리나 다름없었다.[7] 학계에서는 발해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타치바나노 카치코의 아버지 타치바나노 키요토모에게 발해에서 사신으로 온 사도몽이 "당신의 자손 중에 반드시 귀한 사람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복을 당신은 살아서 다 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카치코가 황후가 된 것과 달리, 키요토모는 3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8] 정확히는 이미 한 번 일본인 관상가를 시켜서 그의 관상을 보게 했었다. 고려인 관상가의 말까지 같은 것을 보고 확신을 품게 된 것.[9]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머물던 객사. 천황 자신이 직접 가지 않은 것은 우다 천황이 "천황은 외국에서 온 자를 직접 접견해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었다.[10] 이야기가 진행되며 빗나갔다고 말하지만 후일 겐지가 준태상황 정도의 지위에 오른걸 보면 반쯤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는 있다.[11] 참고로 실제로 겐지는 자신의 사생아인 레제테이로부터 양위받아 진짜로 제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사양했다. 그러자 히카루가 낳아준 아버지이기에 마냥 방치할 수만도 없으나 기리츠보테이의 아들 자격으로 즉위했기에 겐지를 태상황으로 만들 수 없으므로, 준태상황 수준의 어정쩡한 자리를 줬다. 이런 위치는 조선식으로 보면 대원군 정도에 빗댈 수 있지만 대원군은 공식 지위였다는 점이 다르다.[12] 겐지모노가타리에서는 어린 겐지와 고려인 관상가가 필담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며 고려인 관상가에게 송별의 시를 지어주고 관상가도 감탄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온 고려의 물품을 선물하기도 했다고 한다.[13] 이는 황위다툼을 피하기 위해 많이 택하는 방법이다. 친왕으로 삼으면 황족으로 남기에 황위다툼의 분쟁이 될 수 있지만, 신적강하되면 공식적으로는 황족이 아니기에 계승권이 박탈되어 황위다툼을 피하게 된다.[14] 선황의 딸인 내친왕. 즉 공주(황녀)였다. 더군다나 중궁(황후) 소생의 적녀였기 때문에 황녀 중에서도 더욱 존귀한 신분이였다. 이를 미루어 짐작해 보면 기리츠보테이는 선황과 촌수가 약간 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3촌지간이라든지... 그도 그럴게 선황이 본인의 아버지 혹은 형이면 자기 누이/여동생 혹은 여조카를 후궁으로 맞이한 것이 된다(...)[15]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면 기리츠보테이가 후지츠보를 후궁으로 들였다는 대목을 잘 보자, 그러니까 히카루 겐지가 자신의 계모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얘기다.[16] 다만 아오이노우에에게도 할 말이 있는게 문제는 겐지가 저 와중에도 지는 또 다른 여자들과 심히 노닥거리고 있었다. 후에 보면 알겠지만 겐지의 첫자식인 레제테이를 낳은 사람도 아오이노우에가 아니라 후지츠보다. 겐지 입장에선 어떨 지 몰라도 아오이노우에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마음에도 안 드는 남편인데 자기에게 제대로 된 신경도 안 쓰는 작자가 뭔 남편이라고 좋아할 이유가 있겠는가?[17] PMS, 즉 월경 전 증후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8] 여기서 태어난 아이가 레제테이[19] 실제로는 히카루 겐지와 후지츠보 중궁의 아들이니 말할 것도 없고 공식적으로도 기리츠보 천황와 후지츠보 중궁 사이의 아들이므로 고키덴 뇨고 입장에서는 남편과 다른 여자 사이에 난 아들이니 곱게 보일 리 없었다.[20] 이름이 중도에 변경되지 않았거나 가장의 장소가 아니라면 오늘날의 고베시 스마구[21] 우대신에서 태정대신으로 승진했다.[22] 온나산노미야를 아내로 맞은 것도 이 예언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23] 위의 고려인의 예언과는 다르다.[24] 정실은 아오이노우에였으나 이 때는 죽은지 오래였고, 그 동안 겐지는 정식으로 재혼하지 않아서 무라사키노우에가 대내외적으로 정실 취급받았지만 온나산노미야는 황족이라서 신분 차이도 있었다.[25] 죄책감도 있었고 로쿠조노미야스도코로 모노노케의 영향도 있었다. 이 모노노케는 무라사키노우에도 만났다.[26] 모미지노가 연회에서 추풍악 실력을 인정받아 승진했다.[27] 재상(宰相)을 말한다. 후지츠보 여어가 중궁이 되면서 동시에 승격되었다.[28] 재상과 근위중장을 겸임.[29] 한국사로 치면 고려시대 경원 이씨의 세도를 구축한 이자연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에게 시집보내 세 고려 왕(순종, 선종, 숙종)의 외조부가 된 인물이다. 손자인 이자겸과 혼동하지 말 것. 물론 이자겸도 딸들을 예종인종에게 시집보냈지만, 딸 넷을 잇달아 천황과 결혼시키고 세 천황의 외조부가 되었다는 점이나 가문의 막강한 세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는 이자겸보다는 이자연과 훨씬 비슷하다.[30] <이세 이야기>를 보면 여자가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겐지보다 한 술 더 뜬다. 덧붙여 겐지도 나이 많은 할머니와 자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세 이야기의 자이고 중장(나리히라로 추정되는 주인공)도 지인의 부탁을 받아 지인의 어머니인 90대 노파와 자는 장면이 나온다.[31] 후지츠보가 출가한 것도 이 때문. 별별 여자 다 건드리는 겐지가 극락 못 가는 걸 두려워해 여승이 된 후지츠보는 못 건드렸다. 물론 여승되기 전에는 잘도 건드렸지만...[32] 어머니 온나산노미야를 가시와기가 강간해 태어난 사생아다.[33] 레제테이, 유기리, 아카시노히메키미.[34] 더군다나 레제테이는 기리츠보의 아들로 황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실상 데리고 산 친자식들은 유기리와 아카시노히메키미 이 둘 뿐이다.[35] 아무리 쉴드 쳐도 겐지의 행위는 하나부터 열까지 문제가 많다... 아무리 전근대 사회였다지만 의붓 어머니 건드리고 형수 건드리고 형이 총애하던 여자를 건드리는 등의 행위는 목이 안 날아가도 감지덕지 해야 할 일들이다... 현재는 목이 달아나지는 않겠지만 명예가 개발살난다...[36] 그냥 즐겁게 놀고 즐기는 뜻도 있지만 인간의 희노애락 전반을 뜻하기도 한다. 와카 등 일본 고유 문학의 핵심적인 정서중 하나.[37] 그리고 작중에서도 후지츠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보로즈키요를 건드려서 우대신에게 약점 잡혀 스마로 낙향한다. 그러니까 그 때 관점으로도 겐지의 행위는 문제가 없다고 여기지는 않는 행위였다.[38] 이런 점은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양반, 귀족의 원류와도 대조되며 동시 우리나라 사람들 가치관에서 겐지를 도무지 이해 못하는 이유이다. 당장 우리나라 창작물을 보면 지도자란 백성들을 위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나라를 구하고 설사 힘이 없어도 이를 위해 노력한다는 사고관이 크게 박혀있는데 툭하면 여자들 건드리고 놀자판만 하는 겐지가 이해가 안갈 수 밖에... 차라리 히카루 겐지가 친왕이고 그것 외엔 아무 직위가 없다면 이해가 되는 행동이긴 했을 것이다.여담으로 우리나라에선 오래전부터 지도자는 국가와 민생을 잘 돌봐야 한다는 관념이 사회에 뿌리박히다보니 어쨌거나 지도자는 백성에게 관심을 가지는 척이라도 해야 했고 특히 맹자식 정치관의 영향을 듬뿍 받은 조선대에 이르면 적어도 왕들은 구휼이니 뭐니 하면서 민생에 신경쓴 왕이 다수다. 심지어 연산군조차 폭군이 되기 전에는 나름 민생문제에도 신경을 많이 쓴 왕이었다. 중국도 하다못해 헤이안 시대 귀족과 가장 비슷한 짓거리를 한 문벌귀족들도 일단 구품관인법이라는 나름의 인재 등용 제도를 통해 출사했고 구품관인법에 따라서 겉보기에는 충효든 능력이든 일단 있다고 판명된 사람이다.[39] 이와 다른 방향으로 제안대군처럼 겐지가 친왕이었다면 횡위서열과 가까울수록 역모에 휘말리기 쉬워서 괜히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다가 역모에 이름이 오르내리느니 차라리 방탕아처럼 살다가 가는 것도 처신의 유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는 건 한국, 중국과는 개념이 남다른 헤이안 시대와 네버 관계 없고, 반대로 헤이안 때는 저런 위장 할 것도 없이 진짜로 귀족 평가 기준이 우아한 돈지랄이었기에(.....) 컨셉까지 일일이 계획해 펑펑 쓰고 잘 놀아야 잘 나간다고 존경 받았다. 현대에는 아무 일도 않고 사치하는 무쓸모 인간인 겐지가 아이돌 대우 받고 겐지의 횡족인 형제들도 진심 칭찬하는 것도 이런 이유.[40] 만화 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