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桐壺겐지모노가타리에 나오는 후궁오사(後宮五舍) 중의 하나인 숙경사(淑景舍)를 뜻하는 말로, 뜰에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오동나무 안뜰'이라는 뜻의 기리츠보(桐壺)라고 불린다. 주상의 침전인 청량전(清涼殿)[1]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동북쪽 구석에 위치한 곳이다.
2. 정편
2.1. 기리츠보 갱의
桐壺更衣히카루 겐지의 친어머니. 사실상 작중 모든 일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
안찰 대납언의 무남독녀로 별다른 남자 형제가 없었으며,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제대로 된 후견인 없이 갱의로 입궐하였다.[2]
아버지와 형제도 없이 입궁한 딸이 남들에게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비교적 고귀한 집안 출신인 어머니 키타노카타(北の方)가 품위 유지 등을 위해 여러가지로 경제 지원을 해줬지만, 제대로 된 후견인이 없었기 때문에 공적으로는 처지가 위태로웠다. 다만 후견인이 없는 상태에서 갱의로 입궐한 것과 어머니의 신분과 재산, 사가로 니조노인(二條院)을 가지고 있던 걸 볼 때 결코 한미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다.
주상의 거처인 청량전(清涼殿)[3]에서 가장 떨어진 동북쪽 구석의 숙경사(淑景舍)에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상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아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아들인 황자 히카루 겐지를 낳았다. 갱의는 나인들[4]처럼 늘 천황 곁을 섬기지 않지만 주상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곁에 두고 싶어해 오히려 나인 같다며 조롱당하기도 했다. 물론 내명부 뿐만이 아니라 대신들 마저도 당나라 황제가 후궁을 지나치게 총애해 일어난 상서롭지 못한 사건을 언급하며 이를 좋지 않게 보았다.
이런 지나친 총애 때문에 우대신(右大臣)의 딸로 먼저 입궐해 장자를 생산한 홍휘전 여어는 갱의 소생의 아들이 자신의 아들을 제치고 동궁(東宮)으로 책봉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들려서 매우 불안해했다. 주상도 명문세도가 출신이자 자신의 첫 아들(과 황녀 둘)을 낳은 홍휘전 여어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5] 갱의는 주상의 총애를 든든하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이러한 상황으로 적이 사방팔방 생겨서 마음고생을 했다.
(중략)주상이 다른 많은 여어나 갱의 분들의 처소를 그냥 지나치셔서 그리로 뻔질나게 발걸음을 하시니, 그분들이 마음을 끓이시는 것도 무척이나 당연한 일인 듯 여겨진다. 갱의가 주상을 뵈러 올라가실 때도, 너무나 그런 일이 잦을 때는 건물 사이에 걸쳐둔 다리와 회랑(回廊) 길 위 이곳저곳에 괘씸한 짓을 하기에, 배웅하고 마중하는 사람들의 옷자락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볼꼴이 사나울 때도 있다. 또 어떤 때는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건물 안을 가로지르는 판자가 깔린 복도 양쪽 문을 단단히 잠가 놓고, 이쪽저쪽에서 서로 짜고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게 만드시는 일도 잦다. 일이 있을 때마다 헤아릴 수 없이 괴로운 일만 쌓여 가는지라, 주상께서는 갱의가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욱더 안됐다고 여기신다.(후략) - 겐지모노가타리 1첩 「기리츠보」 中
주상의 지나친 총애로 인한 다른 후궁들이 투기로 기리츠보 갱의는 심한 이지메를 당한다. 소설의 문체 특성상 간략하게 묘사되지만 그 수법은 현대에도 뉴스에 나오는 이지메 수준에 맞먹을 정도로 집요하고 심했다.
그걸 안 주상은 갱의를 걱정해서 처소를 멀리 떨어진 숙경사에서 청량전 서쪽에 있는 후량전(後涼殿)으로 옮기게 한다. 하지만 이 조치는 후궁들의 분노를 더 사게 된다. 후량전은 덴노가 머물던 청량전(清涼殿) 서쪽에 있는 전각으로 우에쓰보네(上局)에 속하며 황후와 후궁들이 거처하는 시타쓰보네(下局)와 대비되는 곳이다. 이곳은 주상에게 나아가기 전의 대기실로 후량전에 웃전을 둔다는 것은 이례적인 조치이기 때문. 특히 원래 후량전에 머물던 갱의가 제일 화를 크게 냈다고 한다.
아들인 둘째 황자가 세 살이 되고 착의식을 치른 해 여름, 미야스도코로/미야슨도코로(御息所)[6]라고 불리며 몸이 갑작스럽게 안 좋아지자 사가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주상은 불허했다. 하지만 대엿새 만에 심히 쇠약해지자 친정어머니(北の方)가 눈물로 간청하여 황자를 남겨두고 퇴궐하게 되었다. 본래 궁궐에서 황후나 중궁이 죽는 것은 금기이기 때문에 죽을지도 몰라서 그런 것.
당시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천황이 꼭 돌아오라는 뜻으로 연(輦)[7]까지 내려주고 서로 마지막에 와카를 나누며 이별한다. 어머니의 우려대로 도착하고 얼마 후에 횡사하였다. 죽고 난 뒤 위계가 정4위 上이던 갱의를 종3위로 추증하는 칙서를 반포하였으나, 이 조치는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샀다고 한다.
(중략)세상의 정리를 아시는 분은 생전에 갱의의 모습과 그 용모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 마음씨가 온화하고 편안하여 미워하려 하여도 미워할 수 없었던 일들을 이제 와서야 떠올리신다. 차마 바로 보기 힘들었던 주상의 총애 탓에 차디차게 질투를 하셨지만, 사람됨이 따스하니 정감 있었던 갱의의 마음씨를 주상을 옆에서 모시고 있는 나인 등도 서로들 그리워하신다. '없어져야' 그리워진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였다.(후략) - 겐지모노가타리 1첩 「기리츠보」 中
이지메에 가담한 대부분의 시녀들과 후궁들은 갱의가 죽자 나름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갱의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사실 그놈의 총애가 문제였던 것이지 작중 묘사를 보면 본인의 행실과 처신에는 전혀 문제가 없던 것 같다. 시녀들이 그리워했다는 것을 볼 때 시녀들에게도 잘 대해준 것 같다.
기리츠보테이는 한동안 눈물로 지새며 다른 여자들을 찾지 않았는데, 어찌나 처량해 보였는지 주변 사람들도 안타까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홍휘전 여어(弘徽殿女御)는 "세상을 뜬 다음에까지 사람 마음을 활짝 개지 못하도록 하는 총애로구나."라고 했는데, 이때는 아직 자신의 아들이 동궁에 책봉되고 갱의 소생의 아들이 귀족으로 신적강하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런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또 홍휘전 웃전[8]에서 사람들을 불러 연회를 벌이는 등 주상의 눈살을 찌뿌릴 만한 행동을 하기도 했는데 그 또한 주상에 대한 정치적인 제스처로 보인다.
주상은 갱의의 아들이 동궁이 되는 게 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겐지로 신적강하시키고[9] 홍휘전 여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을 동궁으로 책봉한 뒤 선대 천황인 이치노인의 넷째 황녀가 갱의와 닮았다는 말을 듣고 갱의의 대신으로 삼고자 여어로 입궐시킨다. 그 여어가 비향사(飛香舎)의 후지츠보 여어(藤壺女御)로 히카루 겐지와의 사이에서 황자를 낳아 후지츠보 중궁(藤壺中宮)이 된다.
한편 친정어머니는 딸의 사후 겐지를 사가에서 기르면서 외손자가 동궁으로 책봉되기를 바랐지만 당연히(...) 불가능했고 홍휘전 여어의 아들이 동궁으로 책봉되고 외손자가 신적강하까지 되자 절망하고 오래되지 않아 사망했다.[10] 겐지는 신적강하 이후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조노인(二條院)에 거주하였으며 외할머니가 죽고 자기 재산이 되었는데, 이곳에서 이상적인 여인과의 삶을 꿈꿨으며 무라사키노우에에게 있어서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무라사키노우에가 정편의 여주인공으로 취급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략)그림 속 양귀비의 용모는 아무리 대단한 화가라 하여도 그림으로 그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에 생생한 아름다움까지는 다 드러내지 못한다. 태액지(太液池)의 부용(芙蓉), 미앙궁(未央宮)의 버들이라 하여 그와 아주 닮은 자태[11]인데 당풍(唐風)의 차림새는 단아하니 아름다웠을 터지만, 다정하면서도 귀염성 있었던 세상을 떠난 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시자니, 화사한 꽃과 새의 울음소리로도 비길 수가 없다.(후략) - 겐지모노가타리 1첩 「기리츠보」 中
여담으로 작중에서 갱의와 외모가 닮아서 입궐한 후지츠보 중궁이 설정상 작중 최고의 미녀라는 것과 아들인 히카루 겐지가 작중 최고의 미남인 것을 고려할 때 작중 최고 수준의 미녀가 아닌가 추정된다. 아마 기리츠보테이가 지나치게 총애한 것도 예뻐서(...)였던 모양. 다만 미야스도코로가 죽은 뒤 덴노의 말을 볼 때 안찰 대납언이 약속을 지킨 것에 대한 보답과 덴노의 총애 외에는 버팀목이 없던 갱의를 나름대로 신경써주려고 했던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와의 사이가 무척 좋았는지 친정어머니는 신분이 더 높은 사람은 장례식에서 화장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화장 때 직접 참석했다고 한다.
모티브는 한고제와 여후, 척부인 이야기와 후한서 열전 45의 청하효왕경전에 나오는 경의 모친인 송귀인이 소재라고 한다. 특히 송귀인과 유사한데, 송귀인은 숙종이 황태자였을 적 입궐하여 숙종이 즉위하면서 귀인이 되고 황자인 경은 황태자가 되었다. 하지만 두황후의 질투를 받아 비방중상을 당해 경은 폐위되고 청하왕이 되었으며, 송귀인은 병사丙舍로 옮겨진 뒤 독살되었다. 병사는 숙경사와 마찬가지로 후궁전사(後宮殿舍) 중 천자의 궁전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한다.
참고로 아들인 히카루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여자의 외모 취향이 어머니인 듯. 첫사랑인 후지츠보는 작중 공인 기리츠보를 닮았다고 하며[12], 무라사키노우에 역시 마찬가지였고, 온나산노미야의 결혼도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했다가 '혹시 후지츠보와 닮았지 않았을까'하는 기대감에 한 것인데 후지츠보가 기리츠보를 닮았다는걸 감안하면 결국 또 어머니를 닮았다는 소리. 흥미롭게도 셋 다 히카루에게 있어서 나름대로 중요한 여자들이었다는 것이 특징이다.[13]
3. 속편
3.1. 기리츠보 여어
桐壺女御속편에서 레제인의 후궁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 여어의 신분임에도 청량전과 먼 숙경사에 거주하는 것을 볼 때 그다지 총애를 받지는 못하는 모양.
[1] 실제로 현재도 교토 어소에 남아있는 건물 이름이다.[2] 갱의는 본래 천황의 옷 시중을 들던 시녀가 승은을 입는 경우가 많아 지체 있는 후궁을 칭하는 말로 변경된 것으로, 중궁과 여어 다음가는 천황의 비妃다. 3위 대납언 이하 당상관 이상인 벼슬아치의 여식이 입궐하면 갱의가 되었다. 조선으로 치면 귀인급이다.[3] 현재도 교토고쇼의 전각 이름이나, 현재 있는 세이료덴은 헤이안궁 당시의 전각이 아니라 에도 시대에 복원된 것이다.[4] 궁궐 여관女官들 중 전시典侍, 장시掌侍, 명부命婦가 천황의 직속 시중역을 맡았다. 여어나 갱의같은 후궁들은 개인적인 거처에 머물다 천황의 부름을 받고 모신다.[5] 홍휘전 여어는 우대신의 딸로서 우대신이 태정관에서 태정대신과 좌대신 다음임을 감안하면(조선으로 치면 정승급) 대납언(조선으로 치면 판서급)의 딸에 불과한 기리츠보 갱의와는 격이 크다. 그것도 팔팔한 우대신에 비해 대납언은 먼저 죽었고.[6] 황태자비 또는 천황의 자녀를 낳은 후궁. 이후에는 미야스도코로라 불린다.[7] 가마라는 뜻으로 손으로 끄는 지붕이 있는 수레를 말한다. 동궁, 황자, 대신, 여어, 승정 등이 천황의 허락을 얻어 타고 궁궐 문을 출입하기에 갱의가 사용하는 것은 파격적인 조치였다.[8] 주상의 거처이자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부터 집무와 연회를 보는 장소이기도 한 청량전 북동쪽 구석에 홍휘전의 임시 거처인 웃전이 있다. 홍휘전과 비향사는 권세 있는 후궁의 거처였는데, 동쪽에 있는 웃전을 홍휘전 웃전이라 부르고 서쪽에 있는 웃전을 후지츠보 웃전이라고 불렀다.[9] 신적강하시키지 않고 친왕으로 봉할 수도 있지만 일본 역사상 덴노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질 여지가 있으면 친왕에 봉하지 않고 신적강하시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10] 애초에 가문의 격부터 다르다. 고키덴 뇨고는 물론 타 후궁들과 비교해봐도 격이 낮고 그나마 주상의 총애가 유난스러워 히카루를 낳고 모자가 특별대우를 받았지 그런 게 없었다면 히카루를 낳지도 못했거나 모자 모두 딱히 특별대우를 받지는 못했을 것인데 동궁 지위까지 넘본 것.[11] 백거이의 장한가에서 따왔다. 태액지는 한무제가 만든 연못이며 부용은 연꽃이라는 뜻이다. 미앙궁은 한 고조 때 소하가 만든 궁전이다. 장한가는 본디 당 현종과 양귀비 이야기를 모태로 했으나 전 황제를 대놓고 소재로 삼을 순 없으니 공식적인 시대 배경과 소재는 한무제와 이부인(李夫人)의 고사를 바탕으로 쓰여졌다. 장한가의 이야기와 함께 당 현종은 날마다 연꽃과 버들을 보면서 죽은 양귀비를 그리워하였다고 전해진다.[12] 이 때문에 히카루는 후지츠보를 동경하다가 사랑으로 변했다.[13] 후지츠보는 히카루의 첫사랑, 무라사키노우에는 자신이 직접 키잡한 데다가 어쨌건 히카루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온나산노미야는 히카루의 두 번째 아내이자 (명목상) 히카루의 차남 카오루를 낳은 여인이다. 특히 카오루는 속편의 주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