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7:44:33

보슈냐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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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규모3. 작명4. 기원5. 보슈냐크인 민족주의6. 종교7. 문화8. 출신 인물9. 여담

1. 개요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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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cccc,#1f2023> 세르보크로아트어 Bošnjaci / Бошњаци[1]
튀르키예어 /
오스만어
Boşnaklar / بوشناقلر
중국어 [ruby(波什尼亚克人, ruby=bōshénníyàkèrén)]
일본어 ボシュニャク人
영어 Bosniaks }}}}}}}}}
보슈냐크인은 남슬라브족에 속하는 민족이며 동시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보스니아 무슬림(bosanski Muslimani)을 뜻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보슈냐크인'보다는 '보스니아인'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다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구성 민족은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인도 많으며 보스니아 민족주의 운동이 발흥하던 시기에는 가톨릭을 믿는 보스니아인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보스니아인'과 '보슈냐크인'이 동일한 의미의 표현은 결코 아니다.[2] 보슈냐크인은 세르비아인, 몬테네그로인, 크로아티아인과 마찬가지로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한다. 혈통적으로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몬테네그로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과 같은 남슬라브족으로 분류되지만 종교상의 차이로 인해서 다른 민족 집단으로 간주된다.

2. 규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거주하는 보슈냐크인은 177만여 명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인구의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슈냐크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들의 비중이 거의 비슷한 편이다. 원래 보슈냐크인들이 인구의 48%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고 2010년대 이후에는 50%를 넘었다.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 문서
파일:2D98FEF3-B460-4BC8-AC91-7845C2D0B374.jpg
몬테네그로 로자예(Rožaje)의 쿠치 성원(Kučanska džamija)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인접국가에도 보슈냐크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 걸친 산자크(sandžak)[3] 지역은 원래 보슈냐크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계가 주도한 인종 청소로 많은 인구가 난민이 되어 흩어지긴 하였지만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르비아에 13만여 명, 몬테네그로에 5만여 명, 코소보에 3만여 명의 보슈냐크인 인구가 남아았다. 이웃나라이자 유럽연합 회원국인 크로아티아에 3만여 명, 슬로베니아에도 2만여 명, 북마케도니아에 1만 7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보슈냐크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국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본토가 아닌 튀르키예다. 보슈냐크인의 튀르키예 이주는 오스만 제국 시절 내내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슈냐크계 튀르키예인의 규모는 개략적인 추정만 가능할 뿐인데 보통은 최대 200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적지 않은 규모의 보슈냐크인들이 미국에도 거주하고 있다. 보슈냐크인의 미국 이민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보슈냐크인보다는 보스니아계 미국인으로 불리며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일리노이주 시카고에 대규모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통계마다 수치는 다르지만 최소 12만여 명 이상의 보슈냐크인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자발적 이민 이외에도 보스니아 전쟁 당시 많은 보슈냐크인들이 난민 처지에 놓였는데 전쟁의 여파로 유럽연합 회원국들에 40만여 명의 보슈냐크인이 살고 있다. 독일에 16만여 명, 오스트리아에 13만여 명, 스웨덴에 9만여 명, 스위스에 5만여 명, 덴마크에 2만여 명, 노르웨이에 1만 6천여 명의 보슈냐크인이 난민으로 정착했으며 호주에도 1만 8천여 명의 보슈냐크인들이 난민으로 정착하여 살고 있다.

3. 작명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본토를 포함한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들의 보슈냐크인들은 푸슈카르(Puškar), 야시치(Jašić), 수치치(Sučić), 수바시치(Subašić)와 같은 전형적인 세르보크로아트어 성씨를 사용하며 무슬림 인명이나 튀르키예어 어원의 칭호를 세르보크로아트어식으로 변형시킨 아흐메토비치(Ahmetović), 베고비치(Begović),[4] 하지치(Hadžić), 후세이노비치(Huseinović), 이브라히모비치(Ibrahimović) 등의 성씨도 주로 사용한다. 참고 반면 튀르키예에 거주하는 보슈냐크인들은 상당 부분 튀르키예인에게 동화되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튀르키예어식 성씨를 사용하는 편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비하 괵첸(Sabiha Gökçen, 1913–2001)이 있다. 불가리아에 거주하는 보슈냐크인들은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시절 불가리아 정부가 자국의 무슬림 소수민족들(그리스인 무슬림, 알바니아인, 튀르키예인, 포마크인)에게 불가리아어 성씨를 쓰도록 강요한 것의 영향으로 무슬림 인명을 불가리아어식으로 변형시킨 -프(남성형)/-바(여성형) 돌림의 성씨를 쓴다. 그리스알바니아의 보슈냐크인들은 세르보크로아트어 성씨와 튀르키예어 성씨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4. 기원

오스만 제국 지배 시기 보고밀파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보스니아 왕국의 백성, 보스니아인(Бошњани / Bošnjani)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1463년 보스니아 왕국메흐메트 2세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 군대에게 정복당했다. 몬테네그로 등지에서는 산악 지방을 중심으로 장기간 게릴라전이 지속되었던 것과 다르게 1481년에는 보스니아 내 최후의 요새마저 오스만 군에게 함락당하고 보스니아 전역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의 다른 유럽 영토에서 현지인들의 이슬람 개종이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과 다르게 보스니아인들의 이슬람 개종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보스니아 왕국의 보고밀파 '보스니아 교회'는 가톨릭과 정교회 양 쪽 모두에서 이단으로 간주되고 있었는데[5] 오스만 제국에 의해 보스니아 왕국이 정복되고 멸망한 이후에는 보스니아의 보고밀파 신도들이 상당히 어정쩡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6] 특이하게도 보스니아의 보고밀파들은 무슬림처럼 하루에 다섯 번 예배드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며[7] 이로 인해 이슬람 개종이 더 원활하게 진행된 것이 분명하다.

벌써 17세기 초반에 이르면 보스니아 인구의 3분의 2가 무슬림이었다고 하지만 이들은 아직 완전한 무슬림으로는 간주되지 못하고 지즈야를 납부해야 했다. 17세기 중반 보스니아를 방문한 영국인 여행자에 의하면 보스니아인 상당수가 기독교와 이슬람을 합친 특이한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교회 슬라브어로 된 복음서를 읽고 아랍어로 된 쿠란도 암송하는 이중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 분류되어 지즈야를 납부했으나 정교회 십자가는 우상으로 간주하며 혐오했다고 한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보스니아인들은 오늘날의 보슈냐크인으로 분화되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 서방 최전선의 무슬림 공동체를 구성하였으며 오스만 제국의 중요한 인재 및 병력 공급원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발칸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세수와 주요 인재풀을 담당하는 제국 영토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역이었으나 정작 이 지역은 무슬림이 아닌 정교회 신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이러한 정교회 신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당국은 같은 무슬림인 알바니아인들과 보슈냐크인들을 우대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말에 이르면 대 튀르크 전쟁 이후 유럽 내에서 오스만 제국의 입지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고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일대의 영토를 상실하면서 해당 지역의 무슬림 난민 상당수가 헝가리와 가장 가까운 오스만령 보스니아로 피난을 가 그곳에 정착했다. 당시 오스만령 헝가리에서 도망쳐와 보스니아에 정착한 무슬림들의 숫자는 대략 10만여 명에 달했다. 흥미롭게도 보슈냐크인의 유전자 조사 결과 헝가리인과 가장 가깝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중세 보스니아 왕국 일대는 역사적으로 헝가리와 밀접한 관계였으며 오스만 제국이 제2차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할 때 헝가리 내 많은 무슬림들이 보스니아 영토로 피난와 정착했기 때문인 듯하다.

5. 보슈냐크인 민족주의

"Neuk i neobaviješten čovjek često brka pojmove Bošnjak, Bosanac, Musliman, Bosanski Musliman, musliman. To je pretežno onaj naš sloj i soj koji nije razvijao u sebi nikakve pojmove o vjeri i naciji. To je onaj soj u kojeg nema pojmova o općem već samo o vlastitom."
"무지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은 보슈냐크인, 보스니아인, 민족으로서의 무슬림, 보스니아 민족으로서의 무슬림, 일반 무슬림이라는 용어를 종종 혼동합니다. 대부분 우리의 사회적 계층과 혈통이라는 건 종교와 국민에 대한 어떤 생각도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이 혈통이라는 건 보편 개념이 아닌, 단지 그 자신일 뿐입니다."
알리야 이사코비치(Alija Isaković, 1932–1997)
보슈냐크인 부유층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사부아 공자 외젠에게 1697년 사라예보가 공격당하는 곤경을 치르면서 많은 재산과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보슈냐크인들은 오스트리아군과 주도적으로 맞서 싸우는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부조리 혹은 개혁에 반발해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 1831년부터 1833년까지의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제 개혁에 분개한 보슈냐크인 엘리트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여 4만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적도 있었다. 이 시기를 거치며 보슈냐크인들은 자신들이 서구인들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오스만 튀르크인들과 똑같지는 않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1878년 베를린 회의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관리하게 되면서[8] 보스니아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진입하자 보스니아의 오스만군과 보스니아 민병대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9] 보슈냐크인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20만여 명이 오스만 제국의 다른 영토로 피난을 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점령 이전에는 소규모의 립카 타타르인들을 제외하면 무슬림 신민들을 다스렸던 경험이 전무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보스니아를 당시 제국을 위협하던 남슬라브 민족주의를 와해시킬 수 있는 적법한 모델로 보고 성공적인 지배를 위해 상당히 의욕적으로 임했으나 현지인들의 반발과 당국의 실책으로 인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스니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다르게 근대화, 산업화가 상당히 지체되었다. 1883년부터 1920년 사이에도 5만여 명 이상의 보슈냐크인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던 보스니아를 떠나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동관리하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은 1908년부로 완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슈냐크인 인구의 추가 유출이나 소요 사태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1909년부로 무슬림 행정기구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당시에도 보스니아의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일부러 오스만어를 사용했다. 동시에 보스니아 민족주의자 이반 프라뇨 유키치(Ivan Franjo Jukić, 1818–1857)의 사상이 재발견되면서 세속적인 교육이 확대되고 새로운 지식층이 출현했다.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에서 종교적 정체성과 종족적 정체성이 혼합된 보슈냐크인 민족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일부러 아랍 문자, 범슬라브주의에 동조한다는 의미에서 키릴 문자로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을 쟁취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당시 보슈냐크인들은 몬테네그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독립된 민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신민이 되었으며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도 유지되었던 보슈냐크인 지주층 상당수가 토지 개혁으로 시가보다 더 적은 보상을 받고 토지를 내놓아야 했다.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뒤 국왕 알렉산다르 1세는 보슈냐크인들에게 세르비아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와중에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흡수되었다. 2차대전 와중에는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와 세르비아계 체트니크 사이에서 수만여 명의 보슈냐크인들이 학살당하기도 하였으며 일부는 제13무장산악사단처럼 나치 독일에 부역해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처럼 세르비아계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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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레브레니차 학살 추모 시위를 하는 북마케도니아의 보슈냐크인들 스레브레니차 학살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보슈냐크인들
이후 벌어진 정황 및 갈등에 대해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문서와 보스니아 전쟁 문서 참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치하에서는 보슈냐크인 가운데 제말 비예디치(Džemal Bijedić, 1917년 4월 12일 ~ 1977년 1월 18일), 함디야 포즈데라츠(Hamdija Pozderac, 1924년 1월 15일 ~ 1988년 4월 7일), 라이프 디즈다레비치(Raif Dizdarević, 1926년 12월 9일 ~)와 같은 고위 정치인이 나오기도 하였지만 민족적으로는 세르비아인 무슬림, 코소보인 무슬림인 고라인, 마케도니아인 무슬림인 토르베시인들과 한데 묶여 단순히 무슬림(Муслимани / Muslimani)으로 분류될 정도로 연방 내에서의 위상은 낮았다. 이후 발흥한 보슈냐크인 민족주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 과정에서 발생한 전쟁을 통해 슬라브계 무슬림 민족 보슈냐크인이 겪은 격변의 근현대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보슈냐크 민족주의 대신 자국에 거주하는 모든 국민들을 보스니아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6. 종교

상술했다시피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대부분 수니파(하나피파) 이슬람을 믿고 있으며 수피즘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다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 이후 1943년에 공산주의를 표방한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수립되자 많은 보슈냐크인 종교인들이 튀르키예로 이주한 여파로 세속주의가 강한 편이다.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1952년 수피 교단의 활동을 금지시키고 마드라사모스크를 폐쇄했으며 무슬림 율법학자들의 토지도 몰수되었다. 1966년 이후 티토가 관용적인 민족 정책을 채택하면서 무슬림 민족정체성이 잠시 부흥한 적도 있었으나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은 부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속주의가 뿌리내린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90년대에 일어난 내전 및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의 와하브파이란의 선교로 인해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이 유입되기도 하였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의한 문제가 일어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에서는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다.

7.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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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박자의 춤인 콜로(kolo)를 추는 보슈냐크인 농민들 보슈냐크인 연인
전통적인 세브다흐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세브다흐

전통적인 이슬람 교리상으로는 비종교적인 음악과 춤을 권장하지 않지만 농촌 민속 음악과 구슬레(gusle)와 같은 반주 악기가 발달한 남슬라브인답게 보슈냐크인들은 오스만 제국 통치기에 유입된 동양적인 음악 장르와 통속적인 연애감정을 섞어 세브다흐(Sevdah) 혹은 세브달린카(Sevdalinka)라는 고유의 음악 장르를 발전시켰다. 세브다흐는 주로 사랑과 실연의 감정을 다루고 있으며 오스만 제국 치하인 1810년대에 사라예보에서 활동한 여류시인 우미하나 추비디나(Umihana Čuvidina, 1794–1870)는 사별한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를 남겨 세브다흐의 작품성에 기여하기도 했다.

세브다흐는 전통적으로 사즈(saz)라는 현악기를 사용하여 반주해 왔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하에서 수많은 근대식 악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전문적인 밴드 음악으로 세브다흐가 발전하고 있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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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보슈냐크인은 이슬람 문화의 상징인 초승달과 별보다는 중세 보스니아 왕국의 상징으로 사용된 보스니아 백합(bosanski ljiljan) 문양과 보스니아 왕국의 명군 스테판 트브르트코 코트로마니치(Stjepan Tvrtko I Kotromanić, 1338–1391)가 사용한 푸른 방패 문장을 보슈냐크인의 상징으로서 내세우고 있으며 기독교를 존중하며 성탄절을 지내는 경우도 많다.
파일:ajvatovica_prusac_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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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슬람 문화축제는 성대하게 개최되곤 한다. 대표적인 축제로는 2010년에 500주년을 맞이한 아이바토비차(Ajvatovica) 혹은 다니 아이바토비체(Dani Ajvatovice)가 있다. 아이바토비차 기간인 매년 6월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국에서 월성기를 내세운 가두행진이 개최되고 프루사츠(Prusac)라는 작은 마을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 예배한다.

8. 출신 인물

특히 축구선수로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다.

9. 여담

  • 앞서 언급했듯 보슈나크인들은 난민으로 타 유럽 국가로 많이 이동했는데, 이와 같은 식으로 90년대 초 보스니아 전쟁 당시 보슈냐크인 난민을 많이 수용했던 국가들은 2010년대에 발생한 아랍인 난민들이 보슈냐크인과 비슷할 것이라는 오판을 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보슈냐크인 무슬림들은 라틴 문자를 사용하였고 유고슬라비아 통치 하에서 공교육이 자리잡은 상태였기에 적어도 문맹은 없었으며 기독교인 이웃들과 어울려 살던 경험도 있었고 사회주의 체제의 경험으로 여성 인권도 선진적이었고 교육률도 높았으며 무엇보다 세속주의 성향이 강했다.[12] 반면 아랍인 난민들은 필수 교육의 부재로 인해 문맹이나 보수적인 이슬람주의 성향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13] 아랍권 난민들의 출신국가들은 인명경시와 인권경시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난민들의 심리에 인권경시 같은 문제점들이 기본으로 깔려 있어서 범죄에서도 훨씬 거리낌이 없었다.[14] 본래 세속적이었던 알바니아인이나 보슈냐크인 무슬림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난민 정책이 아랍인 난민들에게 잘 맞으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1] 남성형 단수표현인 보슈냐크(Bošnjak / Бошњак)의 복수표현이다. 여성형 단수·복수표현은 보슈냐키냐(Bošnjakinja / Бошњакиња)·보슈냐키네(Bošnjakinje / Бошњакиње)이다. 흔히 '보스니악'으로 알려진 영어 단어 Bosniak은 세르보크로아트어 표현인 '보슈냐크'에서 유래한다.[2] 이를 반영해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Bosnians와 Bosniaks 문서가 구별되어 있다.[3] 어원은 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인 '산자크(sancak)'로 이 일대에 설치된 산자크인 예니파자르 산자크(Yeni Pazar sancağı)에서 유래했다.[4] 이 성씨가 축약된 형태는 베기치(Begić)이다. 경우에 따라서 이제트베고비치(Izetbegović), 하지하피즈베고비치(Hadžihafizbegović)와 같은 꼴로 다양하게 쓰이기도 한다.[5] 보고밀파는 십자가를 고문의 도구로만 여기고 혐오하는 교리가 있었다. 여타 기독교인들보다 무슬림들하고 더 충돌이 적었던 게 당연했다.[6] 이로써 유럽 내 잔존해있던 마니교 계열 영지주의 기독교 분파가 최종적으로 소멸한다.[7] 이는 보고밀파에 영향을 준 바오로파 신도들이 중세 초 한동안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슬람 교리와 전례 일부를 흡수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중해-중동권 종교에는 5번 예배가 드물지 않다. 조로아스터교 역시 하루 5번 예배를 했다.[8]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문서 참조.[9] 17세기만 해도 보스니아 무슬림 군대가 전사자 교환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오스트리아 군이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보스니아 무슬림 군대는 과거 예니체리 시절에서 더 나아가질 못했다.[10] 본래 사라예보 태생의 보슈냐크인이지만 유고연방 해체 후 세르비아 국민이 되어 세르비아에서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로 살아가고 있다.[11] 그의 출생지인 몬테네그로 동부 구시네(Gusinje / Гусиње)는 보슈냐크인과 알바니아인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다.[12]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세속화를 장기적으로 한 튀르키예, 보스니아처럼 사회주의 체제에 속했던 중앙아시아 국가들도 무슬림 비율이 높지만 세속주의가 강하고 교육률이 높은 편이다.[13] 이게 왜 아랍권 출신 난민들이 아랍권 밖의 문명권에서 적응하기에 문제가 되냐면 샤리아 문서 참고.[14] 아랍인 난민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이슬람 근본주의, 이슬람 극단주의 항목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