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4:04:10

아뎀 랴이치


아뎀 랴이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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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5597> FK 노비 파자르 No. -
아뎀 랴이치
Адем Љајић | Adem Ljajić
출생 1991년 9월 29일 ([age(1991-09-29)]세)
유고슬라비아SFR 세르비아SR 노비파자르
국적
[[세르비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2cm
포지션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주발 오른발
유소년 클럽 FK 요샤니차 ( ~2005)
FK 파르티잔 (2005~2008)
소속 클럽 FK 파르티잔 (2008~2010)
ACF 피오렌티나 (2010~2013)
AS 로마 (2013~2016)
인테르나치오날레 (2015~2016 / 임대)
토리노 FC (2016~2019)
베식타스 JK (2018~2019 / 임대)
베식타스 JK (2019~2022)
파티흐 카라귐뤼크 SK (2023)
FK 노비 파자르 (2023~ )
국가대표 47경기 9골 (세르비아 / 2010~ )
종교 이슬람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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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국적의 FK 노비 파자르 소속 축구선수.

2. 클럽 경력

FK 요샤니차에서 축구를 시작하여, 2005년 14세 때 파르티잔 베오그라드 유스로 이적하였다. 2008년 17세의 나이에 1군팀 선수로 승격하였다. 7월 29일 UEFA 챔피언스 리그에 교체 출전하며 데뷔하였다. 11월 23일 OFK 베오그라드 전에서 리그 첫 골을 터뜨렸다. 2009년 1월 팀원 조란 토시치와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이적이 발표되었다. 랴이치는 2009년 기한부 이적의 형태로 파르티잔에서 뛰고 2010년 1월부터 팀에 합류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09년 12월 3일, 1년 동안 모니터를 계속하고 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랴이치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는 옵션을 행사하지 않을 것을 발표하였다.

2.1. ACF 피오렌티나

2010년 1월 13일, ACF 피오렌티나 이적이 결정되었다. 이적료는 800만 유로이다. 1월 31일 칼리아리전에서 후반 36분 교체 출전하며 세리에 A에 데뷔하였다.

2.2. AS 로마

2012-13 시즌 종료 후, 나머지 1년 계약 연장을 거부하였다. 2013년 8월 28일 토트넘 핫스퍼로 이적하는 에릭 라멜라의 대체자로 AS 로마 이적이 결정되었다. 이적료는 1100만 유로이며 성적에 따른 보너스가 최대 400만 유로이다. 계약은 5년간이다. 로마의 황태자나 다름 없었던 라멜라의 대체자로 영입되었고, 계약조건에 바이아웃 2천만유로를 포함시켰다는 소문이 도는 등의 이유로 로마팬에게 크게 환영받지 못하였지만, 14-15시즌 로마 선수 중 최다 득점을 기록하는 등 나름대로 활약했다. 그러나 득점이 시즌 초반에 집중되었고, 후반기에는 거의 접기매크로 수준의 속터지는 플레이를 보여주며 주전 자리도 뺏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2015년 8월 31일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의 1년 임대 이적이 확정되었다. 랴이치의 임대 계약에는 완전 이적 옵션이 포함되어 있다.

인테르 이적 후 초반에는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의 염려를 샀으나 이후 스테반 요베티치와 같이 출전하는 경기에선 과거 피오렌티나 시절이 연상될 만큼의 찰떡 호흡을 보여주고 있다. 10라운드 볼로냐 전에서 어시스트를 주며 첫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고, 대승을 거둔 13라운드 프로시노네 전에선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그 경기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연이은 활약에 완전이적 옵션 행사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되고 있는 중. 15 라운드에선 프리킥 골까지 터트렸다. 그러나 이후 큰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고 AS 로마 복귀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다. ACF 피오렌티나로의 리턴 루머가 나오는 상황.

2.3. 토리노 FC

2016년 7월 19일 토리노 FC 이적이 결정되었다. 이적료는 850만 유로 + 보너스 50만 유로이다.

토리노 이적 이후 안드레아 벨로티, 이아고 팔케와 삼각 편대를 이루며 토리노의 공격을 이끄는 중이다. 8R 팔레르모전에서 2골을 넣으며 토리노에서의 데뷔 골을 기록했고 9R 라치오전에서도 골을 넣으며 2경기 연속 득점에 성공했다. 이후로도 벨로티, 팔케와 함께 많은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지난 몇 시즌 간의 부진을 잊게 만드는 활약을 보여줬다. 비록 시즌 중후반기 들어서 체력적으로 지친 모습이 나와 잠시 기대치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으나 유벤투스와의 토리노 더비에서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넣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17-18 시즌은 벨로티 부진으로 팬덤에선 그의 테크닉을 인정하는 것은 맞지만, 너무 볼호그가 되는 느낌인지라 벨로티의 장점을 못살리고 있다. 가끔 나오는 득점, 테크닉으로 토리노를 잘 모르는 축구팬들에겐 '이 놈이 진짜 크랙이고 에이스네' 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랴이치는 지금 부진하다.

2.4. 베식타스 JK

2019년 7월 1일, 650만 유로의 이적료로 베식타스 JK에 입단하였다. 24경기 5골 6어시를 첫시즌에 기록하였고,
그 다음시즌에는 22경기 2골 4도움의 성적을 기록한다.

2.5. 파티흐 카라귐뤼크 SK

2022년 9월 28일, 파티흐 카라귐뤼크 SK로 이적했다. 계약 기간은 2024년까지.

2.6. FK 노비 파자르

2023년 9월 14일, FK 노비 파자르로 이적했다.#

3. 국가대표 경력

세르비아 U-21 대표로 2008년 9월 7일 헝가리 U-21 경기에서 U-21 대표로 데뷔하였다. 2010년 11월 불가리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A 대표로 데뷔하였다. 2012년 5월 이후에는 아래의 국가 문제에서 대표에서 제외되었다. 2012년 5월 26일, 스페인 대표와의 친선 경기에서 경기 전 국가 제창시 세르비아 국가를 노래하지 않아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감독이 대표 추방 처분을 내렸다.

2015년 6월 7일 아제르바이잔과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 골을 넣었다. 2017년 11월 14일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친선 경기에 선발 출전해 전반전에 날카로운 프리킥을 찼지만 조현우의 세이브에 막혔으나, 후반전에는 역습 찬스를 놓치지 않고 선제골을 넣었다.

4. 플레이 스타일

피오렌티나에서 어린 나이에도 팀의 공격을 이끌어 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훌륭한 드리블, 찬스 메이킹 능력을 갖고 있다. 당시 피오렌티나의 에이스라고 불리던 스테판 요베티치와 비교해도 개인의 폭발력 면에서는 더 우월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1][2]다만 스킬을 조합해서 내놓는 플레이의 가짓수가 적어 다소 뻔한 패턴이 많은데, 이 패턴이 읽혀 막히기 시작하면 상대 수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홀로 싸우면서 조급하게 경기를 하는 편이다

드리블과 기회 창출 능력에 더불어 킥력이 매우 좋은 선수이다. 토리노에서는 팀의 세트 피스를 전담하는데 랴이치의 발에서 많은 골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2016-17시즌 세리에 A에서 랴이치보다 세트피스에서 많은 도움을 기록한 선수는 발테르 비르사 뿐이고, 유럽 최고의 프리키커인 피야니치가 그와 동률인 4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또한 도움 능력 뿐 만이 아니라 직접 프리킥으로 골을 만들어 내는 경우도 상당하다. 유벤투스와의 토리노 더비에서 터졌던 프리킥 골은 세계적인 골키퍼들도 막기 어려울 정도로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리그에서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했을 정도로 득점력은 준수한 편이다. 다만 원샷 원킬 유형이 아니라 여러번 차서 1, 2번 들어가는 유형이다. 다 잘만들어 놓고 허무하게 놓치는 경우도 상당하며 이 부분만 고쳐진다면 한 시즌에 리그에서 15골을 넣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이 경우는 고치기가 쉽지 않다는게 흠이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6. 기타

델리오 로시 감독이 피오렌티나에 부임했던 당시 교체에 불만을 품고 벤치로 향했다. 폭행당했던 바 있다. 자세한 당시 상황은 여기(1분 17초 경)에서 볼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델리오 로시 감독은 경질되었다.

시니사 미하일로비치 감독과 호흡을 많이 맞췄는데, 피오렌티나 시절을 시작으로, 국대에서도 만난 적이 있으며, 토리노에서도 만났었다.


[1] 몰론 요베티치가 크고 작은 부상으로 폭발력이 많이 죽었다는 점을 감안 해야겠지만.[2] 프리시즌 때 훈련 중 같은 팀 동료에게 당한 거친 파울로 인한 팀킬로 십자인대 파열되기 전 갓 20살이었던 요베티치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공격수가 될 재능이었고 리버풀을 피렌체 홈에서 수비진들을 가지고 놀았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