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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11, 13대 반 보스니아 초대 국왕 {{{#fff {{{+1 트브르트코 1세}}} }}} {{{#fff Tvrtko I}}} | |
출생 | 1338년 |
사망 | 1391년 3월 10일 (향년 52~53세) |
보스니아 왕국 보보바츠 | |
재위 | 보스니아 반 |
1353년 ~ 1365년 | |
보스니아 반(복위) | |
1366년 ~ 1377년 | |
보스니아 국왕 | |
1377년[1] ~ 1391년 3월 10일 | |
배우자 | 도로테야 브딘스카 |
자녀 | 트브르트코 2세 |
아버지 | 블라디슬라프 코트로마니치 |
어머니 | 옐레나 수비치 |
형제 | 부크 코트로마니치, 스테판 오스토야? |
가문 | 코트로마니치 가문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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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니아 반샤그 제11, 13대 반(Ban), 보스니아 왕국 초대 국왕. 보스니아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손꼽히는 명군이다.2. 생애
1338년경 보스니아 반샤그 10대 반 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의 동생인 블라디슬라프 코트로마니치와 크로아티아계 헝가리 귀족인 클리스 백작 죄르지 2세 수비치의 딸 옐레나 수비치의 장남이다. 형제로 부크 코트로마니치가 있었다. 1398 ~ 1404년, 1409 ~ 1418년 보스니아 국왕을 역임한 스테판 오스토야가 그의 형제라는 설이 있으나 불분명하다. 아버지 블라디슬라프는 스테판 2세 치세 때 크로아티아 대공 칭호를 받고 형과 함께 보스니아를 공동으로 통치했다.1353년 스테판 2세가 사망한 뒤, 트브르트코 1세가 15살의 나이에 반이 되었다. 그의 나이가 성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블라디슬라프가 섭정을 맡았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보스니아 각지를 돌며 가신들의 특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35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 엘레나가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즉시 두 아들을 데리고 헝가리로 가서 헝가리 국왕이자 보스니아의 주권자인 러요시 1세로부터 트브르트코 1세의 반 계승을 승인받았다. 다만 다만 형제 중 한 명이 보스니아에 있을 때 다른 한 명은 러요시 1세의 궁정에 있어야 하며, 보고밀파를 박해하는 데 힘을 기울이라는 조건이 달렸다. 옐레나는 복귀 후 밀레에서 귀족 의회를 소집한 뒤 자신과 장남이 보스니아 반샤그 전역의 지배자임을 공인받고, 그 대가로 귀족들의 영지와 특권을 확인했다.
1355년 5월, 옐레나와 트브르트코 1세는 수비치 가문이 쇠락하면서 그들의 땅을 놓고 분쟁이 지속되자 군대를 이끌고 두브노로 진군했다. 이후 달마티아 반과 협상한 끝에, 트브르트코 1세의 외할아버지인 죄르지 2세 수비치가 소유했던 모든 도시와 고모 카타리나가 소유한 도시를 상속받는다는 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그가 그 도시들을 진짜로 소유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는 트브르트코 1세가 지나치게 강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1357년, 그는 드리예바를 포함한 하부 보스니아 일대와 서부 자후믈례 대부분을 스테판 2세의 딸이자 자기 왕비인 엘리자베타의 지참금으로 내주라고 요구했다. 트브르트코 1세는 감히 러요시 1세를 거역할 수 없어 그 지시에 따랐다. 그 해 7월, 러요시 1세는 트브르트코와 부크를 보스니아와 우소라의 통치자로 확정했지만, 하부 보스니아와 자후믈례는 의도적으로 그들의 직함에서 제외했다.
그 후 수년간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던 트브르트코 1세는 1363년경 헝가리 출신의 보스니아 주교 페테르 시클로시와 결등을 벌였다. 페테르 시클로시는 1365년 1월 보스니아 주교에 부임한 이래 보고밀파를 보스니아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가톨릭이 확고히 자리잡게 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트브르트코 1세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겨우 잠잠해졌던 가톨릭과 보고밀파의 갈등이 재개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급기야 페테르가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 보고밀파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키자고 주장하자, 트브르트코 1세는 그가 외국군을 끌여들어 자신의 권력을 박탈하려 든다고 여겨 강한 적대감을 품었다. 트브르트코 1세는 페테르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지만, 페테르에게 고용된 독서가에게 보낸 편지가 발각되면서 실패했다.
1363년, 러요시 1세는 페테르의 종용에 따라 보스니아 이단자들을 근절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4월에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고, 5월에는 라구사 공화국 관리들에게 보스니아에 전쟁이 터질 예정이니 상인들더러 보스니아를 떠나도록 종용하게 했다. 그 후 러요시 1세가 친히 이끄는 헝가리군이 하부 보스니아를 침공했고, 한달 후에는 헝가리의 팔라티노인 콘트 미클로시(Kont Miklós)와 에스테르곰 대주교인 아파티 미클로시(Apáti Miklós)가 이끄는 군대가 우소라를 공격했다. 블라트코 부코슬라비치를 비롯한 여러 보스니아 귀족은 러요시 1세에게 항복해 클류치 요새를 넘겼지만, 부카츠 흐바티니치는 플라바 영지에 있는소코 그라드 요새에서 농성해 헝가리군을 돌려보냈다. 여기에 스레브네크 요새는 러요시 1세의 공세에 용감하게 저항해 격퇴했다. 기록에 따르면, 러요시 1세는 이때 인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러요시 1세는 공세를 중단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러요시 1세가 철수한 후 보스니아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1365년 하반기, 베네치아 공화국과 라구사 공화국은 트브르트코 1세의 가신들이 스테판 2세가 맺었던 자유 통행 조약을 무시하고 상인들을 혹독하게 대한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1366년 2월, 보스니아 귀족들이 트브르트코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트브르트코 1세와 엘레나를 축출하고 동생 부크 코트로마니치를 보스니아 반에 옹립했다. 부크가 귀족들에 의해 억지로 추대되었는지, 반란을 주도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이후의 전개를 보면 반란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트브르트코 1세는 어머니와 함께 헝가리 왕실에 귀순한 뒤 헝가리의 종주권을 철저히 받들겠다고 약속한 뒤,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고 1366년 3월 보스니아로 돌아왔다. 부크는 이에 맞서 싸워 1년간 버텼다. 그러나 보스니아의 강력한 귀족 집안인 산코비치 가문이 트브르트코 1세로 이탈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지다가, 결국 1367년 말에 수도 보보바츠를 상실하고 추방되었다. 그 후 부크는 교황 우르바노 5세에게 찾아가서 보고밀파 박해에 전력을 기울일 테니 트브르트코 1세를 몰아내고 자기가 보스니아 반이 되는 걸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러요시 1세가 트브르트코 1세를 옹호하자 교황청이 개입을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1374년 트브르트코 1세는 불가리아의 도로테아와 결혼한 뒤 부크와 화해했고, 그를 보스니아의 주니어 반으로 선임해 자신의 통치를 돕도록 했다.
1371년,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세르비아 제국이 붕괴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는 여러 공국으로 나뉘었는데, 트브르트코 1세는 모라비아 일대를 통치한 세르비아 영주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반면, 루드니크, 폴리믈리예, 상부 포드리나 일부, 자후믈례 동부 일부, 트레비네, 코나블레 교구 및 라구사 공화국과 접경하는 영지를 관리하는 니콜라 알토마노비치와 갈등을 벌였다. 니콜라는 트브르트코 1세와 부크가 내전을 치렀을 때 부크를 지원했고, 라자르로부터 루드니크를 탈취했다. 여기에 프리즈렌을 공략하고 장차 세르비아의 새 군주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에 트브르트코 1세와 라자르는 서로 동맹을 맺고 니콜라를 공동으로 대적하기로 했고,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도 두 사람을 지원했다.
1373년 가을, 트브르트코 1세는 헝가리 기병 1,000명을 지원받은 뒤 라자르와 함께 공세를 개시해 니콜라를 격파하고 그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후 두 사람은 니콜라의 옛 영지를 나눠가졌는데, 보스니아는 프드리나, 폴리믈리예, 자후믈례 상부 지역을 확보했다. 한편, 제타 공국의 발시치 가문은 트브르트코 1세와 니콜라가 전쟁을 벌인 틈을 타 트레비네, 코나블레, 드라체비차를 점령해, 보스니아와 국경을 접했다. 그 후 양측간의 국경 분쟁이 이어졌고, 트브르트코 1세는 1377년 초 트레비나, 코나블레, 드라체비차를 급습해 공략했다. 이에 분노한 주라지 1세 발시치(Đurađ I Balšić)는 보스니아를 침공해 네베신예를 약탈했다. 하지만 주라지 1세가 1378년 1월 13일에 급사한 뒤, 제타 공국은 이웃 공국들의 공세로 영역을 상당수 잃었다. 트브르트코 1세는 이 때를 틈타 1377년에 공략한 영토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졌고, 자신이 확보했던 영토와 보스니아 사이의 해안 지대 역시 합병했다. 이리하여 보스니아는 코토르와 라구사 사이의 아드리아 해안지대의 주인이 되었다. 이러한 정복 과정에서, 트브르트코 1세가 점령한 세르비아 영토에 살던 정교회 신자, 사제, 수도자들이 보스니아에 대거 편입되었다.
1377년 가을, 트브르트코 1세는 자신이 세르비아의 상당 부분을 확보했으며, 친할머니 엘리자베타가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의 딸인 걸 근거로 삼아, 자신이 세르비아의 왕실인 네마니치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그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학계에서는 성 데메트리오스의 축일인 10월 26일에 대관식을 거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나, 어디서 거행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본다. 라구사의 연대기 작가 마브로 오르비니는 밀레셰바 수도원에서 거행되었다고 기술했고, 20세기 세르비아 역사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였지만, 현대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역사가들은 보스니아 밀레 마을에 있는 성 니콜라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 거행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이 수도원은 트브르트코 1세의 전임자 일부의 유해가 매장되었고, 트브르트코 1세의 후계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트브르트코 1세는 대관식을 치른 뒤 왕호에 네마니치 왕들과 연관하기 위해 상징적인 이름인 스테판을 덧붙였으며, 라구사 공화국에 서신을 보내 라구사가 13세기부터 세르비아 왕들에게 지급했던 성 데메트리오스의 수입을 자기에게 주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를 비롯한 몇몇 세르비아 영주의 인정을 받았을 뿐이고, 다른 세르비아 영주들은 무시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국왕이 된 트브르트코 1세는 경제 정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라구사와 코토르 등 해상 도시들이 식량 운송을 위해 자국 영토를 이용하는 걸 이용해 통행세를 거둬들였고, 금속 광석과 금속 가공물(주로 은, 구리, 납)을 수출해 국고를 늘렸다. 그러던 1378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이 전쟁을 일으켰다. 러요시 1세는 제노바 편을 들었고, 베네치아와 대립하던 라구사 공화국도 제노바를 지지했다. 베네치아는 그해 8월 코토르를 점령한 뒤 트브르토크 1세에게 자기 편을 들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트브르트코 1세는 이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그러던 중 코토르 관리들이 베네치아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자기들이 세르비아 왕국에 속했다는 걸 이유로 트브르트코 1세에게 귀순하겠다고 약속했다. 라구사 공화국은 자기네 영향권에 있던 코토르가 보스니아에 들어가자 격분해 보스니아에 대한 금수 조치를 내렸다. 트브르트코 1세는 라구사로부터 코토르를 방어했지만, 코토르는 1379년 6월 러요시 1세 쪽으로 충성할 대상을 바꿔버렸다.
코토르를 귀속시키지 못한 데다 라구사 공화국의 금수조치로 인한 보스니아 경제가 피해를 입었고, 해상 무역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필요성이 생기자, 트브르트코 1세는 아드리아 해 동부 연안에 새 도시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었다. 1382년 초, 트브르트코 1세는 코토르 만에 도시와 요새를 건설하도록 하니, 이 도시가 바로 헤르체그 노비(Herceg Novi)이다. 그는 이 도시를 통해 소금 무역의 새로운 활로를 뚫으려 했다. 소금을 실은 첫 배가 도착한 그해 8월부터 무역 활동이 시작되었고, 코토르와 달마티아, 이탈리아 반도 상인들은 이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라구사인들은 소금 무역 독점권을 잃게 생긴 것에 불만을 품고 헤르체그 노비의 상업 활동을 방해했으며, 보스니아와 베네치아에 대항하기 위해 달마티아 도시들의 동맹을 결성했다. 이에 트브르트코 1세는 11월에 라구사 공화국과 타협해 소금 무역에서의 우선권을 그들이 가지는 걸 인정하기로 했고, 라구사 공화국은 금수조치를 풀기로 했다.
1382년 9월 11일,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가 사망했다. 이후 헝가리에서 계승 분쟁이 벌어지자, 트브르트코 1세는 1357년에 러요시 1세의 압력 때문에 지참금으로 내줘야 했던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1383년 봄 해군을 건조한 그는 베네치아로부터 2척의 갤리선을 추가로 구매했고, 베네치아 귀족을 제독으로 고용했다. 또한 오푸젠 인근에 새로운 도시인 브르슈타니크를 건설했다. 이러한 그의 움직임을 전해들은 헝가리의 새 여왕 마리어와 어머니 엘리자베타는 왕위가 지극히 불안한 상황에서 그와 싸우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그의 호의를 얻기 위해 양보하기로 했다. 1385년 봄, 마리어 여왕은 트브르트코 1세가 명목상으로나마 헝가리의 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코토르를 양도했다. 보스니아 왕국은 아드리아해의 주요 무역 도시인 코토르를 손에 넣으면서 큰 수입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제타 공작 뱔샤 2세 발사치도 이 도시를 원했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1385년 사브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으면서 무산되었다. 뒤이어 제타 공작에 오른 주라지 2세 발시치는 보스니아에 대한 적대감을 유지했다.
1385년, 헝가리에서 라디슬라오를 받드는 세력과 마리어 여왕과 남편인 지기스문트를 받드는 세력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라디슬라오의 편을 들었고, 라디슬라오가 헝가리를 장악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마리어와 지기스문트 부부에게 충성을 표하던 달마티아 도시들을 노렸다. 1387년 7월 클리스 요새를 공략한 뒤 스플리트와 자다르로 진군해 주변 지역을 약탈했지만, 두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해 11월 오스트로비차 요새를 함락시켰고, 뒤이어 트로기르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여기에 슬라보니아에서도 별도로 별동대를 보내 약탈 행진을 벌이도록 했다.
1388년, 보스니아군이 달마티아 깊숙이 침투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자, 달마티아 도시들은 지기스문트에게 자신들을 돕거나 부득이 항복하는 걸 승인해달라고 간청했다. 지기스문트가 라디슬라오의 군대와 전면전을 벌이느라 그들을 도울 겨를이 없자, 스플리트, 자다르, 시베니크는 저항 의지를 포기하고 트브르트코 1세와 협상한 끝에 1389년 6월 15일까지 지기스문트가 원조해주지 않으면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가 달마티아에 원정가느라 보스니아 동부를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보스니아 왕국의 급격한 확장을 질시하던 제타 공작 주라지 2세 발시치가 오스만 제국군에게 보스니아에 대한 습격전을 벌여달라고 요청했다. 1388년, 랄라 샤힌 파샤가 이쓰는 오스만과 제타 연합군은 보스니아로 진군해 빌레차까지 진군했다. 이에 트브르트코 1세의 가신인 훔스키와 보스티아 대공 블라트코 부코비치가 요격에 나섰고, 1388년 8월 말 빌레차 전투에서 적군을 자클루 미안 협곡으로 유인한 뒤 격멸했다. 랄라 샤힌 파샤는 대다수 병력을 잃고 패주했다. 이에 경각심을 느낀 트브르트코 1세는 주라지 2세와 협상한 끝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1389년 6월 15일 1차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다. 트브르트코 1세는 충실한 봉신인 라자르를 도와주는 게 달마티아를 확보하는 것보다 우선한다고 여기고, 군대에 달마티아를 떠나 라자르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그 후 치러진 전투에서 상당수의 보스니아 귀족이 전사했고, 라자르 역시 전사했지만,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도 죽었다. 트브르트코 1세는 전투에 참여한 블라트코 부코비치의 편지를 근거로 삼아 기독교 연합이 승리했다고 확신하고, 여러 기독교 국가에 승리를 알렸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라자르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또다른 가신 부크 브란코비치는 트브르트코 1세의 적인 지기스문트에게 귀순했다. 이렇듯 코소보 전투로 충실한 가신들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가 세르비아 왕위를 주장하는 건 공허한 일이 되었다.
1390년 보스니아 왕국의 영역.
그가 코소보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군대를 철수하자, 달마티아 도시들은 태도를 바꿔 항복을 거부했다. 이에 트브르트코 1세는 군대를 재차 동원해 달마티아로 진격했고, 1389년 11월에서 12월까지 이어진 일련의 전투와 소규모 접전에서 헝가리군을 물리쳤다. 결국 1390년 5월, 달마티아의 거의 모든 해안 도시와 달마티아 섬은 트브르트코 1세에게 귀순했다. 트브르트코 1세는 자신을 "신의 은총으로, 라쉬카, 보스니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포모리예의 왕"이라고 칭했다. 이후 달마티아에서 여전히 자신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유일한 도시인 자다르를 공략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1390년 9월부터 지기스문트와 평화 협상을 시작하는 등 자기가 확보한 영역을 공고히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작업이 채 끝나지 않은 1391년 3월 10일, 트브르트코 1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후 밀레 마을의 성 니콜라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트브르트코 1세는 생전에 불가리아 차르 이반 스라치미르의 딸인 도로테아와 결혼해 트브르트코 2세를 낳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스테판 1세의 아들 니노슬라프 또는 블라디슬라프의 사생아인 스테판 다비샤가 왕위를 쟁취했고, 귀족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치다가 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여기에 달마티아를 빼앗긴 것에 반감을 품은 지기스문트가 개입하면서, 트브르트코 1세가 이룩한 위업은 수년 안에 흐지부지되었고 보스니아 왕국은 심각한 내란에 휘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