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9 19:48:41

스테판 토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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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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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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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토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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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fan Tomaš}}}
파일:스테판 토마시.jpg
출생 1411년
사망 1461년 7월 10일 (향년 49~50세)
보스니아 왕국 보보비츠
재위 보스니아 국왕
1443년 11월 ~ 1461년 7월
아버지 스테판 오스토야
형제 라디보이 오스토이치
부인 보자차, 카타리나 코사차
자녀 스테판 토마셰비치, 이샤크 베이 크랄로글루, 카타리나
가문 코트로마니치 가문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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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니아 왕국 제7대 국왕.

2. 생애

1411년경 보스니아 왕국 제4대 국왕 스테판 오스토야사생아로 출생했다. 친형으로 라디보이 오스토이치가 있었으며, 이복형이자 스테판 오스토야의 적법한 아들로 스테판 오스토이치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신봉하던 보고밀파의 일원으로 자랐으며, 형 라디보이가 트브르트코 2세를 상대로 보스니아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내전을 벌이는 동안 잠자코 있었고, 보자차라는 평민과 결혼했다.

1443년 11월, 임종을 눈앞에 둔 트브르트코 2세는 지금까지 별다른 정치 활동을 하지 않던 스테판 토마시를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이는 자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라디보이에게 악감정을 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보스니아 귀족 대다수는 선왕의 지명을 받들어 스테판 토마시를 왕으로 선출했지만, 보스니아 대공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 등 친 오스만 인사들은 이를 거부하고 라디보이를 왕으로 받들었다. 코사차와 라디보이는 라구사 공화국에 토마시를 왕으로 인정하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

한편 트브르트코 2세 치세 때 추정 상속인으로 지명되었지만 1435년에 사망한 첼레 백작 헤르만 2세의 손자 울리히 2세는 보스니아 왕위가 자기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토마시의 반대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으려 했다. 이에 토마시는 로마 왕 프리드리히 3세와 라구사 및 베네치아 공화국을 포함한 외국 통치자들에게 자신을 보스니아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때마침 울리히가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를 헝가리 왕으로 세우기 위해 브와디스와프 3세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느라 바빴기에, 그는 형 라디보이만 신경쓰면 되었다.

1444년 1월, 토마시는 코사차 가문이 통치하는 자클루미야 지역으로 진군했다. 코사차 가문에 불만을 품은 가신인 라디보예비치 가문이 즉시 합류했고,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의 조카인 이바니시 파블로비치도 그에게 가담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을 치르는 터라 보스니아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고, 이 때문에 지원을 받지 못한 코사차는 3월에 그와 휴전을 맺기로 했다. 토마시는 헝가리가 자신에게 공격을 가할 것을 대비해 베네치아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했고, 그 대가로 베네치아에 마을 및 광산 일부를 25년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해 6월, 라디슬라우스 지지 세력을 꺾고 헝가리 국왕에 등극한 브와디스와프 3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중재에 따라 토마시를 보스니아 국왕으로 인정했다. 이에 토마시는 후녀디 야노시에게 자유로운 통행권, 거주권, 연간 소득 및 모든 문제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1444년 7월, 브와디스와프 3세는 토마시에게 자신이 오스만 제국과 맺었던 휴전을 깨고 전쟁을 재개할 테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토마시는 이걸 기회로 삼아 영토를 확장하기로 했다. 이보다 앞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은 보스니아로부터 은광 마을인 스레브레니차를 탈취했고, 이 은광은 다시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 그는 군대를 동원해 스레브레니차를 급습해 탈환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 및 십자군과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오스만 제국에 충성하는 코사차 가문과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급파한 튀르크 기병대와 합세한 코사차 가문이 반격을 개시했고, 8월에 토마시를 코조그라드에서 보보바츠로 밀어냈다. 그해 8월, 오스만군은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로 복위했다. 주라지는 코사차와 동맹을 맺고 토마시에 적대했다.

1444년 11월, 바르나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전사하고 십자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오스만 제국이 자신에게 보복하려 들 것을 우려한 토마시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25년간 마을 및 광산 일부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제공할 테니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베네치아는 이를 거부하고 코사차 가문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445년 4월, 토마시는 스레브레니차와 드리나 계곡 전체를 주라지에게 빼앗겼다. 그는 이바니시 파블로비치와 함께 동맹을 맺고 포모리예로 진군해 드리예바를 탈환했지만,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 가시화되자 이대로 전쟁을 이어가면 파멸 뿐임을 직감했다. 이에 코사차 가문과 평화 협상을 벌이는 한편 그들이 왕으로 내세우던 형 라디보이와도 화해했다.

그는 평민인 보자차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코사차 가문의 여식인 카타리나 코사차와 결혼해 완전한 화해를 이룩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먼저 사생아라는 꼬리표를 자를 필요가 있었다. 1445년 5월 29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스테판 토마시와 라디보이 오스토야를 보스니아 전임 국왕 스테판 오스토야의 합법적인 아들로 인정했다. 이때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로 약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1446년, 토마시는 레시나 주교 토마소 토마시니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해 5월 중순 밀로드라지에서 열린 행사에서 토마시와 카타리나 코사차의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며, 뒤이어 마일에서 부부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많은 보스니아 귀족들이 왕의 모범을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일부는 곧 보고밀파로 돌아갔다. 이후 그의 치세 동안 보스니아 전역에 교회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 세워졌다. 다만 그는 보고밀파가 보스니아에 아직 많다는 걸 인지해, 전임자들처럼 보고밀파 신자와 성직자들을 계속 존중했다.

1446년 가을, 토마시는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한 뒤 주라지와 협의해 두 사람이 마을과 광산 수입을 나눠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주라지는 내심 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에 보스니아를 공격해달라고 청했다. 1448년 3월, 오스만군이 토마시와 장인의 영지를 모두 침입해 약탈을 자행했다. 코사차 가문은 오스만 제국의 압력을 받고 주라지 편을 들기로 했다. 그해 9월 중순, 주라지의 처남 토마스 칸타쿠제노스는 토마시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하고 스레브레니차를 공략했다. 1449년 2월, 토마시는 다시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했다. 이후 1451년까지 적대 행위가 이어졌고, 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활발한 상업 활동을 벌였고 달마티아 상인들과 거래했으며, 소금 무역을 독점하고 광산을 적극적으로 개발해 수입을 늘리고자 애썼다. 그러다가 1451년 토마시와 코사차 가문이 화해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1451년, 코사차 가문이 라구사 공화국과 전쟁을 벌여 침체된 영지 경제를 개선하려 했다. 토마시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했지만, 라구사 공화국으로부터 코사차로부터 드리예바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호디제드를 탈환하는 걸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받자 이에 혹해 12월 중순 라구사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코사차 가문에 라구사를 공격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전쟁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1452년 3월,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와 아들 블라디슬라프 헤르체고비치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블라디슬라프가 아버지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한 뒤 자기와 함께 스테판 코사차의 다른 영지를 공략하는 데 협력해 달라고 청하자, 토마시는 이에 응해 그해 4월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고, 라구사군과 합세했다. 하지만 그는 내전에 직접 개입하기를 꺼렸고, 곧 북쪽으로 돌아가 오스만군의 침공을 막았다. 한편 스테판 코사차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베네치아는 블라디슬라프로부터 드리예바를 빼앗고, 블라디슬라프에 대한 민중 봉기를 유도했다. 토마시는 나중에 돌아온 뒤 드리예바에서 베네치아군을 내쫓았다. 그러나 블라디슬라프가 토마시가 자신의 영지라고 주장한 드리예바와 블라가이를 내주기를 거부하자, 토마시는 이에 불쾌감을 느끼고 라구사군과 함께 철수했다.

1453년, 헝가리 국왕 대신해 크로아티아를 반(Ban)으로서 통치하던 페타르 탈로바츠가 사망했다. 이에 토마시와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 모두 페타르 탈로바츠의 과부인 헤드비히 가라이에게 결혼 동맹을 제안해 탈로바츠의 영지를 장악하려 했다.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는 자기와 재혼하자고 제안했고, 토마시는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결혼하라고 제안했다. 이로 인해 토마시와 스테판 코사차는 서로 갈등을 벌여 전쟁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스만 제국이 곧 보스니아로 쳐들어올 것임을 직감하고 화해했다. 이후 헝가리 국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첼레 백작 울리히 2세를 크로아티아의 새 반으로 세우고 크로아티아 도시들의 지배권을 강화하게 하면서, 탈로바츠 가문의 영지를 확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456년, 토마시는 교황 갈리스토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의 신부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얼마 후,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보스니아 국왕과 코사차, 파블로비치 가문에 이례적인 요구를 했다. 그는 토마시에게 10,000짐의 식량을 보내라고 요구했고, 코사차에게는 8,000짐, 페타르 파블로비치에게는 4,000짐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군대를 보내주고 오스만 측에서 전쟁에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보스니아 중부의 2곳과 헝가리와 베네치아가 지배하는 달마티아 영토에 접한 2곳 등 총 4개 도시를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토마시는 이를 거부하면서, 메흐메트 2세가 보스니아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여기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기독교 연합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1456년 7월 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 오스만군이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에 궤멸되었지만, 그 직후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지휘관 후녀디 야노시를 비롯한 헝가리 지휘관들이 병사했다. 여기에 첼레 백작 울리히 2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장남 후녀디 라슬로에게 피살되었고, 후녀디 라슬로는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는 1457년 후녀디 가문이 일으킨 반란군을 피해 오스트리아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했다. 이렇듯 헝가리 수뇌부가 잇따라 죽으면서 헝가리 왕국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전락하자, 토마시는 자기가 기독교 연합을 이끌기로 마음먹었다. 1456년 8월, 라구사에 사절을 보내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려 하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뒤이어 교황청에도 사절을 보내 자신이 십자군 지도자로 나서려 하니 협조해달라고 청했다.

교황 갈리스토 3세는 토마시의 요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보스니아 국왕에게 십자군 십자가 , 교황의 깃발 , 십자군 기금을 건네고 1457년 7월 연합의 지도자임을 표시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힘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도모할 가망이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5세, 베네치아의 도제 프란체스코 포스카리,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청했지만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했다. 이후 카르바할 추기경이 보스니아로 파견되어 상황을 살펴본 뒤, 토마시 왕이 군대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걸 파악했다. 갈리스토 3세는 이에 환멸을 느끼고, 기독교 연합의 지도권을 알바니아에서 메흐메트 2세를 상대로 맹렬하게 저항하던 스컨데르베우에게 넘기기로 했다.

1458년 1월,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라자르 브란코비치가 사망한 뒤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혼란에 빠지자, 토마시는 지난날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이 탈취했던 드리나 강 계곡을 탈환했다. 그는 총 11개 마을로 구성된 이 지역에서 스레브레니차, 즈보르니크, 테오차크를 자기 영지로 삼고, 나머지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영주들에게 나눠줬다. 이후 그는 크로아티아로 시선을 돌렸다. 울리히 2세가 피살된 뒤 헝가리 왕국은 크로아티아의 새로운 반을 임명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사절을 보내 새로운 헝가리 국왕이 된 마차시 1세는 크로아티아를 점령한 뒤 보스니아나 베네치아 어느 쪽에도 좋은 이웃이 되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크로아티아를 나눠 가지고 반 칭호를 사이 좋게 쓰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비현실적인 제안이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토마시는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라자르 브란코비치의 미망인이자 동로마 제국 공주인 헬레나 팔레올로기나의 딸 옐레나를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동로마 제국의 혈통을 지닌 며느리를 확보하고, 스메데레보 요새와 그 주변으로 축소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을 보스니아에 편입하려 했다. 그 해 10월, 명목상 주권자인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계획을 알렸고, 12월 초 토마시 본인이 세게드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마차시 1세와 논의했다. 마차시 1세는 이에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토마시에게 가능한 한 빨리 아들을 보내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그가 보스니아를 오래 비운 사이, 오스만군이 보스니아로 쳐들어와서 보보바치와 브란두크를 포위했다. 토마시는 1459년 1월 중순 보스니아로 돌아와 오스만군을 격퇴한 뒤 호디제드로 진군해 오스만군을 몰아내려 했으나 공략에 실패하고 물러났다.

한편 스테판 토마셰비치와 옐레나의 결혼은 성사되었고, 토마셰비치는 스메데레보 성에 입성한 뒤 3월 21일 스테판 브란코비치를 밀어내고 새 세르비아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이제 그의 계획이 성립되는 듯했지만, 메흐메트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스메데레보 성벽 앞으로 진군하면서 상황이 급박해졌다. 스메데레보 성에 있던 형 라디보이 오스토이치와 토마셰비치는 겁에 질려 1459년 6월 20일 보스니아로 안전하게 돌아가게 해주는 조건으로 스메데레보 요새와 마을을 오스만군에 넘기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마차시 1세는 격노했고, 전 유럽에 토마시가 가장 중요한 요새를 적에게 팔았다고 주장했다. 토마시는 교황 비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형과 아들이 스메데레보를 지킬 가망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항복했을 뿐이며, 자신은 이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했다. 또한 7월에 만토바 공의회에 사절단을 보내 오스만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며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밀라노 공작부인인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가 안코나를 통해 병사 300명을 보스니아에 파견했지만, 다른 유럽 군주들은 그를 외면했다.

교황 비오 2세는 유럽 군주들이 그를 도우러 오지 않는 이유는 보고밀파가 여전히 보스니아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라며, 백성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데 힘을 기울이라고 촉구했다. 이에 토마시는 1459년 보고밀파 성직자들에게 개종하거나 자신의 영토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보스니아를 떠난 보고밀파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2년간 12,000명이 강제로 개종했고, 성직자 40명은 보고밀파를 신봉하는 코사차 가문의 영지로 도주했다. 1461년, 토마시는 이단 혐의로 기소된 세 사람을 로마에 있는 후안 데 토르케마다 추기경에게 보내 심문받게 했다.

1460년 초, 오스만 제국군이 보스니아 북동부의 우소라, 스레브레니차, 즈보르니크, 테오차크를 공략했다. 이제 오스만군은 사바 강을 건너 슬라보니아와 시르미아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에 토마시는 해외에 원조를 요청하고 망명을 준비했다. 그러던 1461년 6월 중병에 걸려 라구사에 사절을 보내 의사를 요청했지만, 그해 7월 10일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고, 사후 보보바츠의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세간에는 형제 라디보이와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현대 학계는 신빙성이 없다고 간주한다. 사후 스테판 토마셰비치가 보스니아의 새 국왕이 되었다.

3. 가족

  • 보자차: 평민이자 보고밀파 신자였다고 전해진다. 1445년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스테판 토마시를 스테판 오스토야 왕의 적법한 자식으로 인정했을 때 토마시와 그녀의 결혼을 취소했다. 이후 수도원에 보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스테판 토마셰비치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죽었다.
  • 카타리나 코사차(1424/1425 ~ 1478): 보스니아 대공 스테판 부크치치 코사차의 딸.
    • 이샤크 베이 크랄로글루(? ~ 1493년 이후): 본래 이름은 지그문트. 1463년 메흐메트 2세가 보스니아를 정복했을 때 포로로 끌려갔다가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 메흐메트 2세의 심복이 되었고, 산자크베이의 지위에 올랐다.
    • 카타리나 토마셰비치(1453 ~ ?): 1463년 메흐메트 2세가 보스니아를 정복했을 때 오빠와 함께 포로로 끌려간 뒤 이슬람교 신자가 되었지만,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