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4 15:08:34

스테판 다비샤

파일:보스니아 왕국 국장.png
보스니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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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2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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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다비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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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jepan Dabiša}}}
파일:스테판 다비샤.jpg
출생 미상
사망 1395년 9월 8일 (향년 불명)
보스니아 왕국 보보바츠
재위 보스니아 국왕
1391년 3월 ~ 1395년 9월 8일
배우자 옐레나 그루바
자녀 스타나 코트로마니치
아버지 니노슬라프 코트로마니치 또는 블라디슬라프 코트로마니치
가문 코트로마니치 가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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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니아 왕국 제2대 국왕.

2. 생애

보스니아 반샤그 제7대 반(Ban)인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의 아들 니노슬라프 코트로마니치의 사생아라는 설과 블라디슬라프 코트로마니치의 사생아라는 설이 제기되나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불분명하다. 라구사 공화국 연대기 작가 마브로 오르비니에 따르면, 그는 네레트바의 주파[1]을 지배했으며, 1366년 부크 코트로마니치트브르트코 1세를 몰아내고 보스니아 반 직위를 찬탈할 때 도와줬다. 그러나 1367년 트브르트코 1세가 부크를 꺾고 복위한 뒤 영지와 직위를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1390년 6월 초에 크랄예바 수체스카의 관리를 맡은 걸 봤을 때, 1380년대에 트브르트코 1세와 화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91년 3월 10일, 보스니아 왕국의 건국자이자 중세 보스니아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트브르트코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에게는 아들 트브르트코 2세가 있었지만, 귀족들은 스테판 다비샤를 왕위에 올렸다. 그가 왕위에 오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학자들은 트브르트코 2세가 너무 어려서 트브르트코 1세의 확장 정책으로 확보한 영역을 제대로 관리하기 어려울 거라 보고, 코트로마니치 가문 인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를 옹립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 나폴리 왕국에 사절을 보내 보스니아 국왕이 된 것을 알렸다. 베네치아 왕국은 1391년 6월 1일 그를 인정한다고 통보했으며, 라구사도 6월 15일 그에게 시민권을 주며 보스니아 국왕 직위를 인정했다.

얼마 후, 트브르트코 1세에게 정복되었던 스플리트, 트로기르, 시베니크 시가 보스니아에게 반기를 들 낌새를 보였다. 여기에 트브르트코 1세가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 달마티아를 석권한 것에 불만을 품은 지기스문트가 이 움직임을 부추겼다. 한편,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헝가리 왕위롤 놓고 분쟁을 벌이던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도 1391년 여름에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귀족들을 고위 관직에 선임함으로써, 그 일대에 대한 다비샤의 주권 대신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받으려 했다. 1392년 봄 오스만 제국군 경기병대가 보스니아를 침공했지만 격퇴되었다. 한편, 지기스문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에게 보스니아에서 이단인 보고밀파와 "분열주의자"인 정교회가 여전히 강성하다며, 이들을 토벌할 십자군을 단행하자고 주장해 승인을 받아냈다. 하지만 지기스문트가 보스니아를 상대로 벌인 공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단지 1년 안에 다비샤와 휴전 협저을 맺은 것만 전해진다.

그러나 다비샤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 대귀족들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1394년 6월, 다비샤는 라디슬라오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지기스문트의 적이었던 달마티아 대귀족 이반 호르바트와 갈등을 벌였다. 그는 브라치, 흐바르, 코르출라 섬에서 차출한 병력을 파견해 호르바트가 다스리는 도시인 오미스를 포위하도록 했다. 당시 지기스문트는 달마티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다비샤의 오미스 포위로 인해 호르발트의 병력 상당수가 그쪽으로 보내진 틈을 타 공세를 개시했다. 이어진 도보르 전투에서, 이반 호르바트는 지기스문트에게 참패하고 생포된 뒤 처형되었고, 지그문트의 군대는 보스나 강에 있는 도보르 시를 파괴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다비샤는 도보르 시 인근 진영에서 지기스문트를 찾아가,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고 충성을 서약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넘기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더해, 지기스문트를 자신의 주권자이자 보스니아 왕좌의 지명 상속인으로 인정했다. 그가 이토록 가혹한 조건에 동의한 계기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대가로, 지기스문트는 다비샤를 헝가리의 최고위 관리에 포함하고 소모기의 백작에 선임했다. 1395년 3월 말, 다비샤는 자후를례의 비슈체에서 라구사 당국에 서신을 보내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라구사 공화국이 의사를 보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비샤는 1395년 9월 8일에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니콜리치 귀족 가문의 일원인 옐레나 그루바와 결혼해 딸 스타나 코트로마니치를 낳았다. 스타나는 보스니아 귀족 유라즈 라디보예비치와 결혼했다. 그는 생전에 아들을 낳지 못했기에, 자기가 죽으면 지기스문트가 보스니아 왕위를 물려받는다고 약조했다. 하지만 보스니아 귀족들은 이를 묵살하고 옐레나 그루바를 보스니아 여왕에 옹립했다.


[1] 네레트바 강 상류와 코니츠 시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