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12:27:35

주라지 브란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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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르 브란코비치 스테판 브란코비치 스테판 토마셰비치 }}}}}}}}}}}}

<colbgcolor=#ff0000><colcolor=#fff>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2, 4대 데스포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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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지 브란코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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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주라지 브란코비치.jpg
출생 1377년
브란코비치 가문 영주권 프리스티나
사망 1456년 12월 24일 (향년 79세)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스메데레보
재위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1427년 ~ 1439년
세르비아 데스포티스 (복위)
1444년 ~ 1458년
아버지 부크 브란코비치
어머니 마라 라자레비치
형제 그르구르, 라자르, 마리아
배우자 이리니 칸타쿠지니
자녀 토도르, 그르구르, 마라, 스테판, 카타리나, 라자르
가문 브란코비치 가문


1. 개요2. 생애
2.1. 데스포티스가 되기 이전의 행적2.2. 1차 재위2.3. 망명기2.4. 2차 재위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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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2, 4대 데스포티스. 1439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했다가 1444년 복위했다.

2. 생애

2.1. 데스포티스가 되기 이전의 행적

1377년경 프리스티나에서 코소보와 코파오니크 산지, 타라 강, 모라차 강 상류를 중심으로 페치, 프리즈렌, 부치트른, 즈베칸, 코마라니, 트레프차 시를 점거하던 세르비아 영주 부크 브란코비치와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초대 공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의 장녀 마라 라자레비치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그르구르, 라자르, 마리아[1]가 있었다.

아버지 부크 브란코비치는 1389년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와 함께 1차 코소보 전투를 치른 뒤, 1391년 오스만 술탄국의 군사적 압력에 굴복해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의 가신이 되었다. 그러나 부크는 바예지트 1세에게 충성을 바치길 싫어했고, 1394년 왈라키아 공작 미르체아 1세를 응징하려는 바예지트 1세의 원정에 가담하지 않았다. 1396년 오스만 술탄국에 반기를 들고 헝가리 왕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에 바예지트 1세는 보복에 나섰고, 프리슈티나를 비롯한 영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헝가리 왕국으로 도주했다. 이후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의 주도로 결성된 십자군에 가담했다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뒤 옥고를 치르다 1397년 10월 6일 사망했다.

바예지트 1세는 부크 브란코비치의 사후 그의 영지 대부분을 자신을 충실하게 섬긴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2대 공 스테판 라자레비치에게 넘겼고, 부치트른 등 일부 지역은 부크 브란코비치의 미망인이자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여동생인 마라 라자레비치와 자식들에게 넘겼다. 이후 주라지는 스테판 라자레비치와 함께 바예지트 1세의 충실한 가신으로서 복무했다. 그러던 1402년, 바예지트 1세와 티무르앙카라 전투를 치렀다. 그는 스테판 라자레비치와 함께 바예지트 1세의 편에서 싸웠지만 참패를 면치 못한 뒤 겨우 피신했다. 바예지트 1세는 생포되었고, 형 그르구르는 생포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 후 세르비아로의 귀환길에 오른 주라지는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머물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그런데 스테판은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7세를 설득해 주라지를 지하 감옥에 가두게 했다. 스테판이 조카를 가두게 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일로 주라지와 스테판 라자레비치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주라지는 로돌프라는 인물에 의해 감옥에서 탈출한 뒤 오스만 술탄국의 발칸 지역을 지배하던 쉴레이만 첼레비에게 합류한 뒤 스테판과 싸우기 위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쉴레이만으로부터 군대를 제공받은 뒤, 스테판의 귀환을 막기 위해 코소보와 메토히야 등지의 도로를 장악했다.

1402년 10월 말, 스테판의 군대는 바르에서 여동생 엘레나의 남편인 주라지 발시치의 영지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를 거쳐 슈코더르로 이동한 뒤, 뒤이어 코소보로 이동했다. 그는 적군이 통제하는 주요 도로를 피해 산길로 이동하다가 그라차니차에 이동했다. 11월 21일, 트리폴리 인근에서 주라지와 스테판이 격돌했다. 스테판은 대부분의 병력을 형제 부크의 지휘하에 둬서 주라지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일부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분견대를 상대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사전에 스테판과 내통했던 우글레사 발코비치가 스테판의 편으로 넘어갔고, 그 덕분에 스테판이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반면 부크 라자레비치는 주라지에게 격파되었지만, 주라지는 오스만군이 무너진 걸 보고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했다.

이후 주라지는 스테판과 여러 차례 소규모 접전을 치르다가 1404년 말 평화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테판에게 반감을 품었던 그는 1408년 말 스테판의 남동생 부크가 자신과 권력을 공유하고 일부 영토를 떼주지 않는 형 스테판에게 분노해 쉴레이만 첼레비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일으키자 여기에 가담했다. 스테판은 이에 맞서 필리포 스콜라리가 이끄는 헝가리군과 합세한 뒤 코소보로 진군했지만, 그해 6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베오그라드로 도주했다. 쉴레이만은 베오그라드를 포위하면서, 이후 서부 모라바 강 일대를 포함한 세르비아 남부 지역이 부크에게 넘겼다. 부크는 그곳에서 독립적으로 통치했고, 브란코비치 가문도 쉴레이만을 주권자로 인정했다.

이 무렵, 무사 첼레비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쉴레이만과 대적하기 위해 발칸 반도로 진군했다. 스테판은 비트코를 무사에게 파견해 동맹을 맺고 쉴레이만에 공동으로 대항하기로 했다. 1410년 초, 무사의 군대는 갈리폴리를 점령했고 뒤이어 잠볼을 공략했다. 스테판은 그 덕분에 포위망을 풀고 세르비아의 최고 통치자로 돌아올 수 있었고, 부크와 주라지는 무사를 주권자로 받들었다. 당시 아나톨리아에 있던 쉴레이만은 즉시 발칸 반도로 돌아가려 했다. 스테판과 무사는 쉴레이만의 군대를 수송하던 함대를 공격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 그들은 갈라타 인근에서 일부 선박을 파괴했지만, 쉴레이만군이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는 걸 막지 못했다. 이에 부크와 주라지는 다시 쉴레이만 쪽으로 돌아섰다.

1410년 6월 15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육지 성벽 바로 앞에 있는 골든 혼 해안의 요새인 코스미디온 인근에서, 쉴레이만과 무사가 맞붙었다. 주라지는 무사 편에 섰고, 스테판은 쉴레이만 편에 섰다. 쉴레이만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을 복속하기 위해 스테판의 동생 부크와 주라지의 동생 라자르 브란코비치를 파견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르비아로 가던 중 7월 4일 플로브디프에서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생포되었다. 부크는 곧바로 처형되었고, 라자르 브란코비치는 인질로 잡혀 있다가 7월 11일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무사가 쉴레이만에게 또다시 패배하자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처형되었다. 스테판은 그 틈에 세르비아로 돌아온 뒤 형제 부크가 통치했던 남부 지역을 포함한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전역을 장악했다.

얼마 후, 무사는 쉴레이만의 추격을 피해 세르비아로 망명했다. 이후 쉴레이만의 독선적인 행보에 반감을 품은 튀르크 영주들이 대거 무사에게 가담하면서 상황은 무사와 스테판에게 유리해졌다. 1411년 초, 무사와 스테판은 세르디카 인근에서 쉴레이만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쉴레이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쪽으로 도주하다가 도중에 무사의 지지자들에게 생포되어 그해 2월 17일 살해되었다. 이후 주라지는 무사의 군대에 가담해 쉴레이만의 아들 오르한이 있던 마르마라해의 작은 마을 셀림브리아 공방전에 참여했다. 그런데 무사는 공방전 도중에 주라지를 죽이려 했고, 주라지는 급히 부하들과 함께 셀림브리아에 귀순한 뒤 테살로니키를 거쳐 1412년 가을 세르비아로 돌아왔다. 이후 스테판의 누이이자 주라지의 어머니 마라의 중재로 스테판과 주라지는 화해했다. 이리하여 세르비아에 분열을 야기한 두 사람의 갈등이 종식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2인자가 된 주라지는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지시에 따라 군대를 이끌었다. 1423년 초여름, 주라지는 스테판의 지시에 따라 8,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세르비아군 수장으로서 슈코더르를 포위했다. 주라지는 보자나 강을 따라 요새를 재건하고 보조나 강 입구에 슈코더르를 바다에서 물리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사슬을 설치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베네치아인들은 평화 협상을 요청했고, 양자는 8월 12일 슈코더르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스테판은 바르와 드라바스타로부터 연간 1,000 두카르를 받았고, 주라지를 이 도시들의 영주로 세웠다. 반면 코토르 울치니 및 슈코더르는 베네치아의 영토로 확인되었다. 이후 협상이 계속 논의된 끝에 1426년 4월 22일 부치트른에서 주라지와 슈코더르 총독 프란체스코 사이에 최종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스테판 라자레비치(1426년 7월 22일)와 베네치아 원로원(1427년 2월 3일)에 의해 비준되었다.

1426년경, 스테판은 여러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는 1402년 8월 피렌체 출신의 레스보스 영주 프란체스코 2세의 딸 헬레나 가틸루시오와 결혼했지만, 헬레나 가틸루시오가 이후 기록상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걸 볼 때 결혼 직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재혼하지 않아서 자식이 없었던 그는 루드니크 산 아래 스레브레니차에서 교회-영주 협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세르비아 총대주교 니코 1세와 영주 앞에서 사촌인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후계자로 선언하고 그를 그들의 영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충실할 것을 요청했다. 또한 그는 주라지에게 자신의 정책을 바꾸지 않고 계속 추진할 것을 요청했다.

1426년 5월, 스테판은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와 휴양지인 타타에서 접견한 뒤 주라지 브란코비치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걸 인정해달라고 청했다. 지그문트는 베오그라드와 골루박, 마츠바 및 드리나 강 서쪽 지역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주라지 브란코비치가 데스포티스로 집권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1427년 7월 19일,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코스마이 산지의 글라바에서 사냥하던 중 뇌졸중 또는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그리하여 주라지는 세르비아 전제군주국 제2대 데스포티스로 등극했다.

2.2. 1차 재위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급사했을 당시, 주라지는 제타(현재 몬테네그로)에 있었고,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는 왈라키아에 있었다. 두 사람은 전령으로부터 스테판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베오그라드로 달려갔다. 이후 1427년 9~10월 베오그라드에서 협상한 끝에, 주라지는 자신의 집권을 용인받는 대가로 베오그라드를 헝가리에 넘기기로 했다. 그 후 지그문트는 베오그라드와 골루박을 다뉴브 강을 따라 형성된 헝가리 방어 체계에 포함하려 했다. 골루박 요새를 다스리던 세르비아 영주 예레미아는 자기가 스테판 라자레비치에게 12,000두카트를 넘겨주고 이 요새의 소유권을 얻었으니, 지그문트 역시 자기에게 그만한 돈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그문트가 거부하자, 예레미아는 오스만 술탄국에 귀순하기로 했다. 이에 주라지가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골루박 성문 앞에서 예레미아의 부하들에게 공격받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지그문트는 무력으로 골루박을 점령하기로 하고, 골루박 요새의 다뉴브 강 건너편에 성 라슬로 요새를 건설했다. 예레미아는 오스만 술탄국에 구원을 요청했고, 오스만군은 즉시 군대를 보냈다. 지그문트는 1428년 6월 초 오스만군에게 패배한 뒤 헝가리로 퇴각했다. 그 후 주라지는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 협상을 요청했다. 오스만 측은 그에게 세르비아는 그의 것이 아니라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것이었으며, 이제는 술탄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주라지는 술탄에게 경의를 표하겠다고 맹세했다. 여기에 연간 50,000 두카트를 공물로 바칠 것이며,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오스만 술탄국의 원정에 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수도는 본래 베오그라드였지만, 이제 헝가리 왕국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새 수도가 필요했다. 주라지는 스메데레보를 새 수도로 낙점하고 요새를 건설하기로 했다. 스메데레보 요새는 다뉴브 강과 예자바 강의 교차점에 지어졌다. 오스만 술탄국이 금방이라도 쳐들어올지 두려웠던 그는 백성들을 대거 동원해 요새 공사를 가능한 한 빨리 끝내라고 독촉했다. 스메데레보 요새는 1430년에 완공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 일로 세르비아인들의 민심을 많이 잃었다. 그렇게 스메데레보를 건설하는 동안, 그는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8세의 사절로부터 데스포티스의 왕관을 받았다. 1430년 오스만 제국이 테살로니키를 점령했을 때 많은 시민의 몸값을 대신 지불했으며, 아들 중 한 명을 오스만 군대에 합류시켜 두라초를 포위하고 알바니아 영주 존 카스트리오티를 공격하는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1433년, 보스니아 왕국에서 트브르트코 2세라디보이 오스토이치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주라지는 보스니아 대귀족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와 함께 라디보이를 지원해 보스니아 대부분을 공략하도록 도와주고, 트브르트코 2세가 즐라토노소비치 가문으로부터 몰수한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1434년 4월 20일, 주라지의 막내딸 카타리나와 첼레 백작이며 헝가리 국왕 지그문트의 부하인 울리히 2세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헝가리와의 동맹을 강화하고 싶어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스만 술탄국은 1434년 중반에 재상 메흐메트 사리제파샤를 스메데레보로 파견해, 주라지의 큰딸 마라가 술탄 무라트 2세의 첩실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주라지는 세르비아 영주와 성직자들을 소집해 장시간 논의한 끝에,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해 가을, 무라트 2세는 마라를 데려오기 위해 대신 몇 명을 파견했고, 주라지는 딸을 넘겨줬다.

1439년, 무라트 2세는 유럽에서 십자군이 재차 결성되어 장차 발칸 반도로 진격할 것이며, 세르비아 전제군주국도 여기에 가담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무라트 2세는 그 전에 세르비아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60,00 ~ 70,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일으킨 뒤 한 분대를 노보 브르도로 파견했고,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스메데레보로 진군했다. 1439년 4월 말 또는 5월 초 스메데레보에 도착한 오스만 제국군은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주라지는 헝가리 왕국으로 달아났고, 그의 아들 그르구르 브란코비치와 처남인 토마스 칸타쿠지노스가 임시로 데스포티스를 맡아 스메데레보 수비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3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식량이 바닥나자, 두 사람은 성이 함락되어 약탈과 학살에 직면하는 걸 막기 위해 성문을 개방하기로 했다. 술탄 무라트 2세는 그르구르에게 세르비아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도록 했지만, 얼마 후 마음을 바꿔 에디르네에 있는 자신의 첩실이자 그르구르의 여동생인 마라에게 보냈다.

2.3. 망명기

주라지는 헝가리 왕국으로 망명한 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세르비아를 되찾으려 했지만, 1439년 9월 로마왕이자 헝가리 국왕 알브레히트 2세가 돌연 사망한 뒤 알브레히트 2세의 갓난아들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간의 헝가리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주라지는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편에 서는 한편, 아들 라자르를 라디슬라우스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내전의 향방이 라디슬라우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기병 수백 명 및 아내 이리니와 함께 헝가리를 떠나 자그레브로 간 후, 1440년 7월 말에 라구사 공화국에 도착한 뒤 제타로 가서 부드바와 바르로 이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세력을 규합해 오스만 술탄국에 빼앗긴 세르비아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제타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집안인 크르노예비치 가문이 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자, 1441년 4월 제타로 떠나 라구사로 이동했다. 오스만 측이 라구사에 사절을 보내 주라지를 넘기라고 요구하자, 라구사 측은 "우리 도시는 피난처가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자유도시다"라며 거절했다. 그러면서 주라지가 라구사에 있는 편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장 좋은 보장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은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1443년 11월, 주라지는 후녀디 야노시의 헝가리군에 가담해 니시 전투와 즐라티차 전투의 승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이후 무라트 2세는 첩실 마라에게 그녀의 아버지에게 헝가리와 오스만 술탄국 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전하게 했다. 주라지는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인 뒤, 후녀디 야노시에게 광대한 영지를 넘기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에 응하도록 했다. 그 결과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술탄은 1444년 세게드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종식했다. 그해 8월 22일, 주라지는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수도 스메데레보에 돌아와서 정식으로 데스포티스에 복위했다. 그러나 그가 부재한 사이에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많은 영토가 베네치아 공화국 및 세르비아의 여러 영주들의 소유로 넘어갔다. 그의 권력은 오직 상부 제타 일대에서나 통했다.

2.4. 2차 재위

1444년 11월 10일,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 왕국의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오스만 술탄국과의 평화 협약을 깨고 십자군을 또다시 일으켰다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참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주라지는 대세는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오스만 술탄국에게 전적으로 충성했다. 한편, 주라지는 자기가 부재한 동안 광산 마을인 스레브레니차를 탈취한 보스니아 국왕 스테판 토마시를 적대했다. 1445년 4월, 세르비아군이 공세를 개시해 스레브레니차와 드리나 계곡 전체를 탈취했다.

1446년 가을, 스테판 토마시는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한 뒤 주라지와 협의해 두 사람이 마을과 광산 수입을 나눠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주라지는 내심 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에 보스니아를 공격해달라고 청했다. 1448년 3월, 오스만군이 스테판 토마시의 영지를 침입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해 9월 중순, 주라지의 처남 토마스 칸타쿠지노스는 토마시가 파견한 군대를 격파하고 스레브레니차를 공략했다. 1449년 2월, 토마시는 다시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했다. 이후 1451년까지 적대 행위가 이어졌지만, 주라지는 끝내 스레브레니차를 탈환하지 못했다.

1446년, 헝가리 섭정 후녀디 야노시가 바르나 전투의 참패를 설욕하고 니코폴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했다. 후녀디 야노시는 여러 통치자에게 원조를 요청했는데, 그중엔 주라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쟁 참여를 거부했고, 후녀디 야노시가 준비하고 있는 원정을 무라트 2세에게 알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녀디와 그의 군대는 1448년 마치 적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처럼 세르비아로 진군해 모라바 계곡을 철저히 약탈했다. 그는 이에 대응해 알바니아의 영주 스컨데르베우가 후녀디 야노시와 합류하는 걸 저지했다.

1448년 10월 17~20일,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과 무라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이 2차 코소보 전투를 치렀다. 후녀디 야노시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헝가리로 퇴각하려 했지만, 도중에 세르비아인들에게 체포되어 주라지에게 넘겨졌다. 주라지는 모라바 계곡을 약탈한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지하 감옥에 한동안 가뒀다가 100,000두카트의 몸값을 받고 그의 장남 후녀디 라슬로를 인질로 삼은 채 헝가리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1451년 2월, 무라트 2세가 사망했고 뒤이어 메흐메트 2세가 새 술탄으로 등극했다. 메흐메트 2세는 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마라를 하렘에서 내보내 그에게 돌려보냈다. 1453년 4월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전을 감행했을 때, 주라지는 세르비아군 분견대 1,500명을 파견해 오스만군을 도왔다. 여기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 아래에 터널을 파는 걸 돕고자 노보 브르도와 광부들을 보냈다. 노브 브르도 인근의 작은 마을인 오스트로비치 출신의 세르비아 군인이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전에 참여했던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가 훗날 폴란드로 망명한 뒤 집필한 저서 <예니체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메흐메트 2세는 주라지에게 카라마니아의 영주에 맞서 싸울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라지는 이에 응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이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냈다. 군인들은 돌아가고 싶었지만,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자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고 한다.

주라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을 받고 사흘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뒤 술탄에게 사절을 보내 축하 인사를 건네게 했고, 메흐메트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콘스탄티노포릴스의 교회 물품을 선물로 줬다. 또한 이피로스에 있던 루가의 유물이 그에게 구입되어 스메데레보로 옮겨졌다. 한편, 주라지는 포로로 잡혔던 많은 동로마 사람의 몸값을 내줘서 세르비아로 데려왔다. 이 중에는 프로코피우스의 사본 2권을 스메데레보에 가져온 건축가 도르제 칸타쿠지노스가 있었다.

그 후 코스탄티니예를 제국의 수도로 삼고 자신을 파디샤로 칭한 메흐메트 2세는 발칸 국가들 정복전에 착수했다. 그는 주라지에게 사절을 보내 스메데레보와 골루박을 넘겨준다면 소피아시 및 브란코비치 가문의 영지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주라지가 이 요구를 거부하자, 메흐메트 2세는 1454년 7월 데스포토비나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데스포토비나는 곧 함락되었고, 14세 이상의 남성은 모두 살해되었으며,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주라지는 공포에 질려 헝가리로 피신했고, 오스만군은 여세를 이어가 루드니크와 스메데레보를 포위했다. 루드니크 주민들은 자유롭게 다른 곳으로 가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항복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이를 묵살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후 스메데레보 공방전을 이어갔지만 수비대의 결사 항전에 부딪혀 고전하던 메흐메트 2세는 후녀디 야노시가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에디르네로 후퇴하면서, 수많은 세르비아인을 코스탄티니예로 끌고 갔으며, 크루셰바츠에 총독 3명을 남겨뒀다. 한편, 주라지는 헝가리군의 지원으로 스메데레보에 복귀했다.

후녀디 야노시는 1454년 가을 니시와 피로트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한 후 귀환했다. 그해 9월엔 니콜라 스코발리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봉기군이 바냐 지역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노브 브르도 인근에서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 패배하고 오스만군에 사로잡힌 뒤 꼬챙이에 산 채로 찔려 죽었다. 1455년 봄, 메흐메트 2세는 세르비아를 다시 침공해 노브 브르도를 포위했다. 노브 브르도는 40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되었고, 메흐메트 2세는 일부 병사를 예니체리로 삼고 다른 병사를 처형했으며, 700명의 여성을 병사들에게 분배했고, 성 니콜라스 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했다. 뒤이어 세르비아의 옛 수도 프리즈렌이 함락되었고, 레비슈카 성묘 교회가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그 후 메흐메트 2세는 테살로니키로 이동해 이듬해 원정을 준비했다.

1456년, 메흐메트 2세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베오그라드 공방전을 치렀다가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에게 완패했다. 오스만군은 퇴각하는 동안 세르비아를 지나면서 민병대의 연이은 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군의 위협에서 당분간 안전해졌다. 그해 12월 24일, 주라지는 스메데레보에서 생을 마감했고, 루드니크 산 아래 크리카 레카 마을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이리니 칸타쿠지니(? ~ 1457): 모레아 전제군주국데스포티스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의 딸.
    • 토도르 브란코비치(1415 ~ 1428): 요절.
    • 그르구르 브란코비치(1416 ~ 1459): 1439년 아버지 주라지를 대신해 데스포티스를 임시로 맡아 스메데레보 공방전을 치렀지만 3개월 만에 항복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군의 포로로 지내다가 아버지와 서신을 주고받은 정황이 드러났다는 이유로 1441년 술탄 무라트 2세의 명령으로 실명형에 처해졌다. 1456년 12월 아버지가 사망한 후 데스포티스에 오른 라자르 브란코비치가 어머니 이리니의 권한을 박탈하고 가혹하게 대하자 메흐메트 2세에게 망명했고, 1459년 아들 부크와 함께 오스만 제국군의 스메데레보 원정에 참여해 세르비아 전제군주국의 멸망에 일조했다. 이후 수도사로 지내다 1459년 10월16일 힐란다르에서 사망했다.
    • 스테판 브란코비치(1417 ~ 1476): 1441년 형제 그르구르와 함께 실명되었다. 1458년 형제 라자르가 사망한 뒤 그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 데스포티스가 되었지만 얼마 안가 보스니아 국왕 스테판 토마시와 헝가리 국왕 마차시 1세에 의해 폐위된 뒤 알바니아로 망명했다가 이탈리아로 건너가 이탈리아 북부 프리올리 지방에 있는 베오그라드 성에서 여생을 보냈다.
    • 라자르 브란코비치(1421 ~ 1458): 두 형 그르구르, 스테판이 실명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1456년 12월 아버지 주라지 사후 데스포티스에 올랐지만 1458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 카타리나 브란코비치(1418/1420 ~ 1491/1492): 첼레 백작 우리히 2세의 부인.


[1] ? ~ ?, 왈라키아 영주 단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