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4 14:50:33

프리예즈다 1세

보스니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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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5대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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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예즈다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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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jezda I}}}
출생 1211년
사망 1287년 (향년 75~76세)
재위 보스니아
1250년 ~ 1287년
아버지 라다보예
배우자 바니카 엘리자베타
자녀 프리예즈다 2세,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
가문 코트로마니치 가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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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 등장하는 보스니아 반샤그 제5대 반(Ban).

2. 행적

라다보예의 아들로, 1211년경 우가르스카에서 출생했다. 보스니아 제4대 반 마테이 니노슬라프와 사촌 관계라고 전해진다. 교황청이 마테이 니노슬라프와 주고받은 편지에 따르면, 프리예즈다는 본래 가톨릭 신자였다가 보고밀파로 개종했고, 마테이의 통치 기간 동안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교황청은 그의 개종을 신뢰할 수 없다며, 아들 프리예즈다 2세를 도미니코회에 인질로 보내게 했다. 마테이는 프리예즈다 2세의 석방을 위해 로마에 사절을 보내 프리예즈다 부자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보증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34 ~ 1241년 보스니아 십자군 기간 동안,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형제이자 크로아티아 공작 칼만은 십자군을 이끌고 보스니아 대부분을 석권하고 마테이를 보스니아 서부 산악지대로 일시적으로 밀어냈다. 그 후 프리예즈다는 칼만에 의해 반으로 추대되었지만, 1241년 칼만이 모히 전투에서 몽골제국군에게 참패해 목숨을 잃은 뒤 마테이의 반격으로 보스니아가 도로 마테이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헝가리로 망명했다. 그 후 헝가리에서 지내던 마테이는 1250년 마테이가 사망한 뒤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마테이의 아들들을 밀어내고 보스니아 반이 되었다. 이때 보스니아에 속했던 우솔라와 솔리는 벨러 4세가 선임한 반의 통치를 받았고, 나중에는 마초 반샤그에 복속되었다. 마초 반샤그는 나중에 마초 공국으로 승격되었고, 보스니아 역시 복속했다.

프리예즈다 1세는 보스니아 반으로 부임한 후 보고밀파를 토벌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교황청은 도미니코회에 프리예즈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이 분명하니 아들을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1253년 11월, 벨러 4세는 그가 보고밀파를 상대로 활약한 것을 기려 "Fidelis Noster"(우리의 충실한 사람들)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고르니 미홀작 인근의 보스니아 외부 지역을 수여했다. 1254년, 벨러 4세는 세르비아 왕국을 공격해 자훔리예를 공략한 후 프리예즈다 1세에게 수여했지만, 허아길와 세르비아 사이에 평화 협약이 체결된 뒤 도로 세르비아에 넘어갔다. 1260년, 프리예즈다 1세는 보헤미아 국왕에 맞서는 벨러 4세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1270년 프리예즈다 1세를 든든하게 지원해주던 벨러 4세가 사망한 뒤 헝가리에서 내란이 일면서, 프리에즈다 1세의 권력은 쇠퇴했다. 헝가리의 재무관인 우그린 챠크를 포함한 여러 헝가리 귀족이 보스니아를 자기들 직함에 넣었으며, 보스니아의 일부 귀족은 프리예즈다를 능가하는 영향력과 위신을 가졌다고 한다. 1284년, 프리예즈다 1세는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드라구틴의 딸인 젤리사베타와 차남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를 결혼시킴으로써, 세르비아의 협력을 받아 이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1287년 5월 슬라보니아의 제멜니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성명 미상의 슬라보니아 귀족의 딸 바니카 엘리자베타와 결혼해 프리예즈다 2세,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를 낳았다. 그가 사망한 뒤 두 형제가 보스니아를 분할하여 통치했지만, 1290년 프리예즈다 2세가 사망하면서 스테판 1세 코트로마니치가 단독 군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