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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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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공국
Kneževina Hrvata
파일:Balkans850.png
서기 7세기 ~ 925년
수도 정해지지 않음[1]
위치 달마티아
정치 체제 공국
국가 원수 반(Ban)
언어 고대 크로아티아어, 라틴어
종교 슬라브 신화, 가톨릭
종족 크로아트인
건국 이전 동로마 제국
계승국 크로아트 왕국
언어별 명칭
크로아티아어 Kneževina Hrvata
그리스어 Χρωβατία

1. 개요2. 역사3. 통치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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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7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옛 속주인 달마티아로 이주한 크로아트족이 세운 중세 국가. 이스트라 반도를 제외한 크로아티아 해안 지역과 산악 내륙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925년 토미슬라브 대공이 왕으로 승인받으면서 크로아트 왕국으로 전환되었다.

2. 역사

현대 학계에서는 "달마티아 크로아티아"(Dalmatinska Hrvatska) 또는 프리모스카 크로아티아(Primorska Hrvatska)로 칭하지만, 이는 현대에 만들어진 용어이며, 때때로 '크로아티아 공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교황청을 비롯한 당대 서유럽인들은 '크로아티아인의 땅(regnum Croatorum)'이라 일컬었으며, 동로마 사료는 '크로아티아(Χρωβατία)'라고 불렀다. 크로아티아는 로마 제국 시대에 달마티아 속주가 있던 곳에서 발흥했다. 7세기 달마티아 대부분은 아바르족이 이끄는 아바르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614년, 아바르족과 이들의 가신인 슬라브족이 달마티아 지방의 수도인 살로나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그러다가 아바르 칸국이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쇠락하자, 남슬라브 계열인 크로아트인들이 아바르족을 축출하고 달마티아 지방을 지배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저서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에 따르면, 크로아트인은 이라클리오스의 명령에 따라 아바르족을 몰아낸 뒤 달마티아에 정착했다. 이후 '포르가의 아버지'가 아르콘(Arcon)을 맡아 그들을 다스렸고, 포르가가 뒤를 이어 아르콘이 된 뒤 동로마 제국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자율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세례를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라클리오스는 이에 응해 주교들을 파견해 포르카와 주민들에게 셰레를 베풀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포르가가 통치한 영토가 Hlebiana, Tzenzena, Emota, Pleba, Pesenta, Parathalassia, Brebere, Nona, Tnena, Sidraga, Nina 등 11개 구역으로 구성되었으며, Kribasan, Litzan, Goutzeska에 반(Ban)이 별도로 무리를 이루어 통치했다고 밝혔다.

프랑크 왕국은 790년대부터 카롤루스 대제에 지도하에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그 결과 803년경, 프랑크 왕국은 판노니아 전체와 달마티아 북부 대부분의 주권을 확보했다. 814년, 닌(Nin)의 반(Ban)이었던 보르나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쿠스 1세가 오보트리테스 족, 티모치아니족, 하부 판노니아 슬라브 공작이자 프리올리 변경백인 류데비트와 헤르스탈에서 회동했을 때 구두스카니족의 지도자로서 참여했다. 학계에서는 구두스카니 족이 크로아티아 중부 리카 지방의 가츠카 강 어귀에 거주한 부족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보르나는 역사 기록에서 전해지는 크로아티아 공국의 첫번째 반이다.

819년 7월, 잉겔하임에서 또다른 제국 의회가 열러 제국에 반기를 든 하부 판노니아(일명 판노니아 크로아티아) 공작 류데비트를 진압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때 보로나는 제국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기록상에서는 이 시기에 "달마티아의 공작"으로 언급되었다. 보르나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쿠파 강에서 류데비트군과 맞붙었지만, 전투 중에 구두스카니족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참패를 면치 못하고 패주했다. 당시 류데비트의 시아버지였지만 보르나와 합류했던 드라고무즈(Dragomuž)도 이때 전사했다고 한다. 보르나는 본구그로 돌아간 뒤 구두스카니족을 복속했다. 그해 12월, 류데비트가 대군을 이끌고 달마티아를 침공해 많은 영역을 약탈했다. 보르나는 성에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비축한 후,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류데비트군이 지친 틈을 타 그들의 후방과 측면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3,000 병력과 300 마리 이상의 류데비트는 판노니아로 퇴각했고, 보르나는 사절을 루도비쿠스 1세에게 보내 이 소식을 전했다.

820년 1월, 아헨에서 제국 의회가 열렸다. 제국군은 이탈리아에서 동부 알프스 산맥을 거쳐 판노니아로 진군하는 부대와 케른티아를 거치는 부대, 바이에른에서 상부 판노니아를 거쳐 진군하는 부대의 3갈래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이때 보르나는 사절을 보내 작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부대와 바이에른에서 출발한 부대는 긴 경로로 인해 느리게 움직였고, 케른티아에서 출발한 부대는 드라바 강을 건너 류데비트를 상대로 3차례 승리를 거둔 뒤 빠르게 진군했다. 이윽고 세 부대가 연합한 뒤 하부 판노니아 일대를 황폐화하고 큰 손실 없이 귀환했고, 류데비트는 산악 성채에 숨었다.

821년 2월, 또다른 제국 의회가 아헨에서 열렸고, 3개 군대를 동원해 류데비트를 공격하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후 제국군이 투입되어 류데비트의 영지를 약탈하고 10월에 작전을 마치고 귀환했다. <프랑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보르나는 이즈음에 사망했고, 그의 조카인 블라디슬라브가 크로아트 족의 의지와 황제 루도비쿠스 1세의 승인으로 직위를 계승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러다슬라브의 이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블라디슬라브가 823년 이전에 사망하고 류도미슬이 뒤를 이었다고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류도미슬이 "달마티아의 공작"으로 언급되는 걸 볼 때, 그는 달마티아만 통치했고 리부르니아와 가츠카는 블리다슬라브가 통치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프랑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류도미슬은 보르나의 삼촌으로, 823년 류데비트가 제국군의 공세를 피해 자기에게 망명했을 때 한동안 손님으로 대접했지만 얼마 후 기습적으로 체포한 뒤 살해했다고 한다. 아마도 제국의 충성스러운 가신의 모습을 보여줘서 지위를 강화하려고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835년경에 집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슬라브는 말리 코자크(Mali Kozjak) 산의 경사면인 푸탈리에 성 유르자 교회를 세우고 스플리트의 동쪽 지역인 플리차의 라자네와 투가레를 영지로 수여했다.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을 치렀던 것으로 보이나 전쟁의 원인과 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839년,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트라도니코(Pietro Tradonico, 800 ~ 864)는 해군을 이끌고 달마티아 해안을 공격했지만 해안 요새인 성 마르틴에서 크로아트군을 상대로 고전한 뒤 미슬라브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 따르면, 크로아트족이 프랑크족에 대항해 7년간 투쟁한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사건이 미슬라브 치세에 벌어졌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845년 미슬라프의 뒤를 이어 크로아티아의 반이 된 트르피미르 1세는 공식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로타리우스 1세를 주군으로 섬기면서도 광범위한 자치권을 인정받고 통치를 행사했다. 작센인 신학자 고트샬크(Gottschalk, 805 ~ 868/869)에 따르면, 846년에서 848년 사이에 바다와 육지에서 동로마 제국베네치아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그에게 소속된 네레트바니족이 베네치아 도시 카오를레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자다르의 동로마 총독이 그의 군대에게 패배했다고 한다. 또한 고트샬크는 불가리아 제1제국이 854년에서 860년 사이에 크로아티아를 침공했지만, 트르피미르가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보스니아 북동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격퇴했다고 밝혔다. 고트샬크는 예정설을 주장했다가 이단으로 기소되자 동프랑크 왕국에서 탈출해 트르피미르의 궁정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파일:트르피미르 공작 기증서.jpg

852년 3월 4일, 트르피미르는 말리 코자크(Mali Kozjak) 산의 경사면인 푸탈리에 세워진 성 유르자 교회에 기부하고 증서를 발행했다. 일명 <트르피미르 공작의 기증(Povelja kneza Trpimira)>으로 알려진 이 기증서에서, 그는 자신을 "신의 은총으로, 크로아티아인의 통치자(Tirpimir, dux Chroatorum , iuuatus munere diuino)>라고 밝혔으며, 전임 반 미슬라브가 스플리트 대교구에 푸탈리의 재산을 기부한 것을 확인했다. 증인 목록에는 5명의 총독, 궁정 관리자, 3명의 신부, 다른 고위 인사 5명이 언급되었다.

파일:트르피미르 공작 비문이 새겨진 들보 조각.jpg

한편, 트르피미르는 아펜니노 반도의 베네딕토회 중심지인 몬테카시노에서 몇몇 베네딕토회 수녀들을 초대해 클리스(Klis) 기슭에 있는 리지니체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정착하도록 했다. 수도원에 정착한 베네딕토회 수녀들은 종교 생활과 교육 생활, 그리고 읽고 쓰는 능력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지니체에는 아래의 문구가 새겨진 제단 들보 조각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기도 했다.
...pro duce Trepim(ero)
트르피미르 공작을 위해

콘스탄티노스 7세는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서 트르피미르를 크레시미르 1세의 아버지라고 일컬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을 10세기로 정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트르피미르는 트르피미르 2세라고 추정한다. 베네치아 연대기 작가 이반 부제는 즈데슬라브가 트르피미르 가문 출신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트르피미르는 15세기와 16세기의 두 연대기로 구성된 <코로나 베네토룸(Corona Venetorum)>에서 크로아티아의 트르피미르 왕(Trpimir re di Croatia)으로 언급되었다.

864년 트르피미르 1세가 사망한 뒤의 상황은 불분명하다. 일설에 따르면, 트르피미르 1세의 장남 페타르는 일찍 죽었고, 또다른 아른 즈데슬라브가 뒤를 이었지만, 트르피미르 가문 출신이 아닌 도마고이에게 전복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설에 따르면, 도마고이가 페타르를 살해하고 크로아티아의 반이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와 16세기의 두 연대기로 구성된 <코로나 베네토룸(Corona Venetorum)>에 따르면, 도마고이는 "네레트반족의 지도자"(Domoghoi, prinze de Narentani)라고 한다.

865년, 베네치아 도제 오르소 파르티치파치오가 크로아티아 해안을 침공했다. 이후 도마고이는 아드리아해에서 베네치아 선박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하기 위해 인질을 제공하는 협약을 맺는 대가로 베네치아군이 물러나게 했다. 866년 사라센 해적이 달마티아 해안을 공격했다. 당시 그들은 바리타란토를 포함해 이탈리아 해안가 도시들을 보유했다. 사라센은 코토르, 키샨, 부드바를 파괴한 뒤, 라구사를 포위했지만 15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동로마 해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이후 도마고이는 871년 2월 가신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바리 토후국 정벌전에 참여했다. 바리 토후국이 멸망한 뒤, 베네치아 정부는 도마고이를 전복해 크로아티아 공국에 베네치아에 우호적인 지도자를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는 발각되었고, 도마고이는 음모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음모를 폭로한 공모자 역시 처단했다.

874년, 교황 요한 8세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파견된 교황 특사를 태운 선박이 크로아티아 해적에게 공격당한 것에 대해 따지는 편지를 도마고이에게 보냈다. 요한 8세는 이 서신에서 아드리아해에서 활개치는 해적을 억제해달라고 요청했으며, 그를 "영광스러운 공작 도마고이(Domagoi duci glorioso)"라고 언급하면서도 해적 토벌에 만전을 가하지 않는다면 도마고이가 결백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876년,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한 뒤 카를로만이 왕위에 올랐다. 도마고이는 이때를 틈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이스트리아, 우마그, 노비그라드, 시파르, 로빈 등 동프랑크 왕국에 속한 4개 도시를 습격해 파괴했으며, 피란 만에서 베네치아 선박을 습격했다. 이후 크로아티아군은 그라도 시를 공격했지만 베네치아 해군에게 격퇴되었다. 이 무렵 도마고이는 사망했고, 성명 미상의 아들[2]이 뒤이어 반이 되었지만 878년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1세의 지원을 받으며 크로아티아에 귀환한 즈데슬라브에게 축출되었다. 즈데슬라브는 크로아티아 공국과 전쟁을 치르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고, 동로마 제국을 주군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879년 5월 브라니미르의 봉기에 직면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크닌으로 진군했지만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즈데슬라브를 살해하고 크로아티아의 반에 오른 브라니미르는 즈데슬라브가 속한 트르피미르 가문에 속하지 않은 듯하다. 브라니미르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문과 이름의 형태로 볼 때 크로아티아 내륙에 거주하는 슬라브인일 가능성이 높다. 브라니미르가 도마고이의 아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 888년 이전에 닌(Nin)에서 건설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서 발견된 그의 비문에는 라틴어로 "(Bra)nnimero dux Slavorum(슬라브족의 지도자 브라니미르)"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스크라딘 인근에 발견된 로마네스크 교회에서 출토된 파편에는 "(Bra)nimero duce(m) Clavitnoru(m)(크로아티아의 지도자 브라니미르)"으로 적혀 있었으며, 1928년 벤코바츠 인근의 소포트에서 출토된 조각에는 "Branimiro com... dux Chruatoru(m)"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로 볼 때 그는 둑스(dux)와 반(Ban)을 동시에 칭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황 요한 8세는 그에게 둑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프린스(Prince)'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는 교황이 그를 특정 지역의 독자적인 통치자로 간주했음을 암시한다.

879년 5월 21일, 교황 요한 8세는 크로아티아를 기독교를 신봉하는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그해 6월 7일, 요한 8세는 5월 21일에 선포한 교서를 확인하면서, 즈데슬라브를 죽이고 작위를 찬탈한 브라니미르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가 로마 교회로 돌아온 것을 칭찬했고, 그를 "사랑하는 아들 브라니미르"라고 칭했다. 또한 닌의 주교 테오도시우스와 성직자들과 모든 평민들을 "사랑하는 아들들"이라고 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직속 관할권을 받고 있던 달마티아 주교들에게 로마 교구로 돌아가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로 볼 때, 브라니미르는 포티오스 분열 시기에 로마 교황의 편을 들었지만 달마티아는 동로마 제국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브라니미르는 닌의 주교 테오도시우스와 함께 요한 8세에게 답장을 보내, 크로아티아 국민의 이름으로 그에 대한 충성과 사도 베드로의 왕좌로의 복귀를 표명했다.

887년 9월 18일, 네레트바인들은 마카르스카 전투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파견한 군대를 물리치고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1세 칸디아노(Pietro I Candiano. 842 ~ 887)를 살해했다. 이반 부제에 따르면, 베네치아인들은 이때부터 아드리아해 항해를 위해 크로아티아인과 네레트바인들에게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달마티아의 도시와 섬들도 브라니미르에게 공물을 바쳤다. 스플리트는 200, 자다르는 110, 트로기르, 오소르, 라브, 크레스는 각각 100골드를 지불했다고 한다. 한편, 브라니미르는 모라비아에서 추방된 메토디오스의 제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후로 크로아티아 교회에는 라틴어 외에도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개발한 글라골 문자가 쓰였으며, 크로아티아 민속 문화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브라니미르는 892년 이전에 사망했고, 문치미르가 새 반이 되었다. 892년에 크로아티아 당국이 발간한 헌장에 따르면, 문치미르는 트르피미르 1세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에 많은 학자들은 브라니미르가 사망한 뒤 문치미르가 정변을 일으켜 권좌를 탈환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기록이 부족해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892년 헌장은 닌 교구와 스플리트 대교구가 트르피미르 1세갸 852년에 토지를 기부한 일을 놓고 벌인 분쟁을 다뤘다. 닌 교구는 트르피미르 1세가 말리 코자크(Mali Kozjak) 산의 경사면인 푸탈리에 세워진 성 유르자 교회에 기부했을 때 푸탈리의 재산을 영구적으로 넘긴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치미르는 닌 주교의 진술이 틀렸다는 결론을 내리고 아버지의 기부를 재확인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서 문치미르 통치 기간의 크로아티아 공국의 영역을 언급했다. 이에 따르면, 크로아티아 공국은 북쪽의 쿠파 강과 그보즈드강에서 남쪽의 세티나 강과 비오코보 강까지 뻗었으며, 네레트바 강에서는 훔 지역과 접했으며, 드리나 강까지 크로아티아 내륙으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또한 크로아티아 공국은 11개의 주로 나뉘었고, 3개 교구가 여기에 추가되었다고 한다. 또한 문치미르는 달마티아 해안가의 도시들로부터 경의를 받고 공물을 받았으며, 왕실 장관(iupanus palatinus), 철퇴 운반자(maccecharius iupanus), 신랑(cavallarius iupanus), 시종(camerarius iupanus), 잔 운반자(pincernarius iupanus)로 둘러싸였고, 자신만의 인장(annulo nostro)을 휴대했다고 한다. 한편, 문치미르는 남쪽의 라쉬카 공국에서 페타르 고이니코비치가 망명하자 그를 용숭하게 대접했으며, 나중에 라쉬카의 공작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원조했다. 896년 마자르족들이 판노니아 평원으로 이주해 오면서 판노니아 크로아티아 공국을 쳐 브라슬라브를 죽이면서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문치미르의 사망 시점과 후임 반인 토미슬라브의 집권 시기가 언제인지는 불분명하다. 스플리트 대주교 토마스가 쓴 13세기 연대기 <히스토리아 살로니타나(Historia Salonitana)>에서 토미슬라브가 914년에 벌어진 사건에 언급된 것을 봤을 때, 문치미르는 914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이다. 학계에서는 910년 즈음이었을 거라는 의견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베네치아 공화국 출신으로, <베네치아 연대기>를 집필한 안드레아 단돌로에 따르면, 마자르족이 914년과 921년에 크로아트족을 유린했다고 한다. <두클랴 성직자 연대기>에 따르면, 토미슬라브는 마자르족을 상대로 혈투를 벌인 끝에 925년경 드라바 강 우안에 있는 요새화되지 않은 지역에서 맞붙은 끝에 마자르족을 축출했으며, 하부 판노니아 일대(일명 판노니아 크로아티아)를 그때까지 자기가 통치하던 크로아티아 영역과 통합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 따르면, 크로아트인과 마자르족간의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고 밝히면서, 마자르족 장군들이 10세기에 드라바 남쪽의 세 요새, 즉 자그레브, 포제가, 부코보를 점령했다고 밝혔다. 이는 이전에 이 세 요새가 크로아트인들의 손아귀에 있었음을 암시하며, 일부 학자들은 토미슬라브가 드라바 강 연안 전투에서 승리한 뒤 세 요새를 점령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닌의 주교이며 토미슬라브의 최측근이었던 그르구르 닌스키(Grgur Ninski, 9세기 후반 ~ 928년 이후)는 928년 스플리트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닌 주교직이 폐지되면서 스크르딘의 주교로 옮겨졌다. 이는 판노니아 크로아티아에 속한 시사크 시가 토미슬라브의 통치를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하지만 그 외에 판노니아 크로아티아가 토미슬라브에게 통합되었다는 걸 드러내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가 판노니아 크로아티아를 통합했다는 <두클랴 성직자 연대기>의 내용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에 대해 학자들의 논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924년, 시메온 1세가 파견한 불가리아 원정대가 세르비아 지역을 공력해 그곳을 다스리던 크냐지 자하리야를 축출하고 세르비아를 장악했다. 토미슬라브는 자하리야를 비롯한 세르비아 망명자들을 받아들였고,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프로콘술의 직을 받는 대신 달마티아 테마의 통치권을 이양받았다. 926년 또는 927년, 시메온은 크로아티아에 알로고보투르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지만, 보스니아의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알고로보투르를 비롯한 대다수 장병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참회자 테오파네스, 게오르기오스 케드레노스, 게오르기오스 하마르톨로스, 요안니스 조나라스 등 동로마 제국 역사가들은 시메온 1세는 참패 소식을 접한 직후 심장마비에 걸려 사망했다고 기술했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제국의 통치에 관하여>에서 크로아티아가 기병 60,000명과 보병 100,000명을 배치할 수 있었으며, 각각 최대 40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80척의 대형 선박과 각각 10~ 20명의 선원이 탑승하는 100척의 소형 선박을 보유했다고 기술했다. 학계에서는 이를 명백한 과장으로 간주하지만, 토미슬라브 치세 당시 마자르족과 불가리아 제1제국을 물리쳤던 걸 볼 때, 크로아티아의 군사력이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건 사실이라고 본다. 또한 콘스탄티노스 7세는 크로아티아에는 닌, 비오그라드, 벨리신, 스크라딘, 흘리예브노, 스텁, 크닌, 코리, 클로북 등 인구가 많은 도시들이 여럿 있으며, 크로아티아 상인들은 네레트바 지역과 달마티아 만의 항구에서 베네치아까지 항해한다고 기술했다.

925년에 열린 제1차 스플리트 공의회는 교회 관할권과 크로아티아 교회에서 슬라브어가 예배에 사용되는 것이 거론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스플리트의 이반 대주교가 크로아티아 추기경의 명예를 누릴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에 닌의 주교인 그르구르 닌스키가 자신이 주교장이 될 자격이 있다고 교황 요한 10세에게 항의했다. 토미슬라브 역시 그르구르 닌스키를 옹호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928년에 열린 제2차 스플리트 공의회에서, 스플리트 대주교의 직위가 확정되었고 닌 교구직은 폐지되었고, 그르구르 닌스키는 스크르딘 주교로 옮겨졌다. 또한 슬라브어가 예배에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오직 라틴어만 사용할 수 있었다.

925년, 교황 요한 10세는 토미슬라브에게 답신을 보냈다. 이때 요한 10세는 "크로아티아의 왕(rex)"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이에 크로아티아 가톨릭 신부이자 역사가, 정치인인 프라뇨 라치키(Franjo Rački, 1828 ~ 1894)는 토미슬라브가 925년 즈음에 왕을 자처했다고 주장했다. <두클랴 성직자 연대기>는 토미슬라브가 달미 들판에서 동로마 황제게 보내준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거행했다고 기술했다. 크로아티아 역사가, 정치가이자 크로아티아 고고학의 창시자인 이반 쿠쿨예비치 사크친스키(Ivan Kukuljević Sakcinski, 1816 ~ 1889)는 대관식 장소는 'Duvanjsko polje(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서부의 카르스트 지역 고원 지대)'일 거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교황은 그를 왕으로 인정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임시로' 달마티아 테마를 관리하는 것만 받아들일 뿐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대다수 크로아티아 학자들은 925년 즈음에 토미슬라브가 교황 요한 10세의 승인을 받고 국왕을 칭하면서, 크로아트 왕국이 건국되었다고 본다. 이를 확증하는 고고학적 기록은 없으나, 그의 후계자들은 비문과 헌장에서 자신을 "왕"이라고 칭했던 것으로 볼 때, 크로아트 왕국이 토미슬라브의 시대에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 통치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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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르피미로비치 왕조
포르가 보르나 블라디슬라브 류도미슬
미슬라브 트르피미르 1세 도마고이 일리코
즈데슬라브 브라니미르 문치미르 토미슬라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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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독립국 국왕 · 크로아티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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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닌(Nin), 클리스(Klis), 비자치(Bijaći), 솔린(Solin), 크닌(Knin) 등 여러 본거지를 두었다.[2] 일리코로 알려졌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안드레아 단돌로 연대기의 라틴어 텍스트를 잘못 해석하여 만들어진 상상의 통치자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