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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크로아티아 반 브라니미르 Branimir | ||
제호 | 브라니미르 (Branimir) | |
출생 | 미상 | |
사망 | 892년 (향년 불명) | |
재위 | 크로아티아 공국의 반 | |
879년 ~ 8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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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상에서 전해지는 크로아티아 공국의 9번째 반(Ban).2. 행적
베네치아 연대기 작가 이반 부제는 "즈데슬라브에 지친 브라니미르라는 슬라브인이 그의 공국을 찬탈했다"고 기술했다. 이로 볼 때, 브라니미르는 즈데슬라브가 속한 트르피미르 가문에 속하지 않은 듯하다. 브라니미르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문과 이름의 형태로 볼 때 크로아티아 내륙에 거주하는 슬라브인일 가능성이 높다. 브라니미르가 도마고이의 아들 중 하나일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없다. <시비달레 복음서>에는 그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888년 이전에 닌(Nin)에서 건설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서 발견된 그의 비문에는 라틴어로 "(Bra)nnimero dux Slavorum(슬라브족의 지도자 브라니미르)"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스크라딘 인근에 발견된 로마네스크 교회에서 출토된 파편에는 "(Bra)nimero duce(m) Clavitnoru(m)(크로아티아의 지도자 브라니미르)"으로 적혀 있었으며, 1928년 벤코바츠 인근의 소포트에서 출토된 조각에는 "Branimiro com... dux Chruatoru(m)"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로 볼 때 그는 둑스(dux)와 반(Ban)을 동시에 칭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황 요한 8세는 그에게 둑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프린스(Prince)'라는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는 교황이 그를 특정 지역의 독자적인 통치자로 간주했음을 암시한다.
879년 5월 21일, 교황 요한 8세는 크로아티아를 기독교를 신봉하는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교서를 반포했다. 그해 6월 7일, 요한 8세는 5월 21일에 선포한 교서를 확인하면서, 즈데슬라브를 죽이고 작위를 찬탈한 브라니미르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가 로마 교회로 돌아온 것을 칭찬했고, 그를 "사랑하는 아들 브라니미르"라고 칭했다. 또한 닌의 주교 테오도시우스와 성직자들과 모든 평민들을 "사랑하는 아들들"이라고 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직속 관할권을 받고 있던 달마티아 주교들에게 로마 교구로 돌아가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로 볼 때, 브라니미르는 포티오스 분열 시기에 로마 교황의 편을 들었지만 달마티아는 동로마 제국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브라니미르는 닌의 주교 테오도시우스와 함께 요한 8세에게 답장을 보내, 크로아티아 국민의 이름으로 그에 대한 충성과 사도 베드로의 왕좌로의 복귀를 표명했다.
887년 9월 18일, 네레트바인들은 마카르스카 전투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이 파견한 군대를 물리치고 베네치아 도제 피에트로 1세 칸디아노(Pietro I Candiano. 842 ~ 887)를 살해했다. 이반 부제에 따르면, 베네치아인들은 이때부터 아드리아해 항해를 위해 크로아티아인과 네레트바인들에게 공물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달마티아의 도시와 섬들도 브라니미르에게 공물을 바쳤다. 스플리트는 200, 자다르는 110, 트로기르, 오소르, 라브, 크레스는 각각 100골드를 지불했다고 한다. 한편, 브라니미르는 모라비아에서 추방된 메토디오스의 제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후로 크로아티아 교회에는 라틴어 외에도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가 개발한 글라골 문자가 쓰였으며, 크로아티아 민속 문화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892년경 사망했고, 트르피미르 1세의 막내아들 문치미르가 뒤이어 크로아티아의 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