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8-22 11:49:18

루도비쿠스 1세

파일:나무위키+유도.png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홀란트 왕국의 국왕 루이 1세에 대한 내용은 루이 보나파르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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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Ludovicus I (루도비쿠스 1세, 라틴어)
Louis I (루이 1세, 프랑스어)
Ludwig I (루트비히 1세, 독일어)
Lodewijk I (로더베이크 1세, 네덜란드어)
Ludovico I (루도비코 1세, 이탈리아어)
별칭 경건왕 루트비히 "Ludwig der Fromme"
사근사근한 루이 "Louis le Debonaire"
아키텐의 루이 "Louis the Aquitania"
생몰년도 778년 ~ 840년 8월 28일
재위기간 814년 1월 ~ 840년 8월 28일
출생지 푸아티에 샤스뇌유 (현 프랑스)
사망지 인겔하임 (현 독일)

1. 개요2. 제위계승3. 이어지는 반란들4. 신앙정책5. 사후

1. 개요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3대 국왕이자, 카롤루스 제국(카롤링거 제국)의 2대 황제다.

일명 경건왕 루도비쿠스 (라틴어: Ludovicus I Pius)

2. 제위계승

778년 카롤루스 대제의 6번째 아들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들이 모두 사망한 관계로 결국 카롤루스 대제의 유일한 적자로서 분할없이 모든 제국을 온전히 상속받게 된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이복 형 피핀 4세와 친형으로 피피노 카를로만, 소 샤를이 있었고, 쌍둥이 친형도 있었다. 쌍둥이 친형은 2세 때 죽게 된다.

그런데 형인 피핀 4세는 곱사등이었고 그로 인해 피핀 4세의 어머니는 카롤루스 대제와 이혼하고, 피핀 4세 역시 사생아로 격하되었다. 결국 이에 불만을 품고 792년 피핀 4세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를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수도원에 유폐당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806년 제국의 후계를 정할 때 루트비히 1세는 아키텐의 국왕이 된다. 하지만 810년 피피노 카를로만을 시작으로 811년 소 샤를과 피핀 4세 모두 죽게 되자 그는 카롤루스 대제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 되었고[1] 813년 아버지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공동통치자가 되었고, 814년 아버지가 죽자 단독통치자가 되었다.

3. 이어지는 반란들

카롤루스 대제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나 다섯 명의 형들이 줄줄이 요절하면서 운좋게 제위에 올랐으나, 그의 치세는 각종 반란들로 점철되어 있다. 밖으로는 아버지 카롤루스가 점령한 지역들인 크로아티아, 바이에른 등이 독립을 위한 반란을 일으켰고, 안으로는 조카와 아들들에 의한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반란들이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운좋게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는 스스로도 제위 계승 정통성이 상당히 떨어지고 자신의 지위가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는지 제위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제국 상속령을 발표해서 그의 세 아들 로타리우스 1세, 피핀, 루트비히 2세에게 제국의 영지를 상속하고 그들의 아들이 그들의 사후 상속하도록 했다. 또한 프랑크족의 분할 상속 전통이 왕국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하여 장자 상속제 성격을 일부 도입하는 시도를 보이게 된다. 즉 장남인 로타리우스 1세를 명목상 제국 전체의 지배자로 삼고, 그에게 영토의 중앙 지역을 물려줬다.

그러자 먼저 죽은 형의 아들인 조카 베른하르트 1세가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의 제위 계승이 정통성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막내 조카들의 부하가 되는 처사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트비히 1세는 베른하르트의 반란을 진압했고 조카와 그의 지지자들을 잔혹하게 처벌했다. 이로 인해 제국 내에서 그의 지지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루트비히1세는 노년에 이르멘가르트 황후가 죽자 불과 4개월 만에 바이에른의 유디트와 재혼하게 되는데 그녀는 장남 로타리우스 1세보다 어렸다. 딸뻘 나이되는 젊고 어여쁜 후처 유디트 사이에서 막내 아들 대머리 카를 2세이 태어나자 노년에 판단력이 흐려진 루트비히 1세는 자신이 이미 제국 상속령을 내려 세 아들에게 나누어졌던 영토의 일부를 떼어내서 대머리 카를에게 상속하게 하려 했다. 그러자 830년 장성한 세 아들인 로타리우스 1세, 피핀, 루트비히 2세가 협심해서 아버지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첫 반란은 진압당했고, 831년에 재차 반란이 일어났으나 역시 진압당했다.

하지만 833년 3차 반란 때 결국 그는 폐위당하고 수도원에 감금되게 된다. 하지만 834년 교황의 적극적인 지지로 기적적으로 제위에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강력해진 자신의 왕권을 이용해 막내 아들 대머리 카를 2세에게 많은 영토를 상속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838년 차남 피핀이 죽자 그 상속지의 대부분을 막내 카를 2세에게 나눠주는 바람에 여기에서 소외된 3남 루트비히 2세의 반발이 일어났고 그 반란 도중에 바이킹의 침공이 있어서 제국은 혼란에 빠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4. 신앙정책

경건왕이라는 별칭에서 보이다시피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부활절,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축일을 국가적인 행사로 치르게 하였고, 교회와 수도원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성직자들을 요직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정책으로 인해 그가 세 아들에 의해 폐위당했을 때 교황의 지지로 다시금 복위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사후

루트비히 1세는 아들들의 반란과 바이킹의 침공으로 점철된 재위 후반기를 보내다가 840년 죽음을 맞게 되는데 그의 사후 상속권 분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제위를 물려받은 장남 로타리우스 1세는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하려고 하다가 두 동생 즉 루트비히 2세와 카를 2세의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고 결국 두 동생이 반기를 들게 된다. 이 와중에 피핀의 아들인 조카 아키텐의 피핀 2세의 도움을 받게 되지만 역부족이었고, 843년 두 동생에게 굴복하여 베르됭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프랑크 왕국은 삼분할 당하게 된다.


[1]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인 조카 베른하르트 1세가 있었지만 나이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