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1 12:40:38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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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cond_Vatican_Council_by_Lothar_Wolleh_005.jpg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회식 장면.


개회식 동영상.

1. 개요2. 배경3. 내용4. 주목할 만한 결과5. 평가와 영향6. 바깥고리

1. 개요

Concilium Oecumenicum Vaticanum Secundum
Second Vatican Council (VC2로 줄여쓰기도 한다)

1962년 10월 11일부터 1965년 9월 14일까지 4회기 동안 로마에서 개최된 가톨릭 교회의 제21차 보편공의회.

이 기간 동안 계속해서 회의를 한 것이 아니라 한 회기(1개월에서 3개월)씩 4번 회의가 진행되었다. 교황 요한 23세의 재위 기간 동안에 개최된 첫 번째 회기는 1962년 10월 11일부터 12월 8일까지 진행되었고, 교황 바오로 6세의 재위 기간 동안에 개최된 나머지 3개의 회기는 1963년 9월 29일부터 12월 14일까지, 1964년 9월 14일부터 11월 21일까지, 1965년 9월 14일부터 12월 8일까지 진행되었다. 즉, 이 공의회의 시작은 교황 요한 23세가 했고, 마무리는 교황 바오로 6세가 했다.

'제2차' 라는 수식어에서 보듯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또한 존재하나, 교황의 권위를 강조하여 "교황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 회의의 주요 내용이었기 때문에 교회 내부는 크게 혁신되지 않았다. 하지만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의 썩은 부분을 들춰내는 대격변 수준으로 가톨릭을 바꾸었다. 더이상 세속적인 권력을 탐하지 않고 권력이라는 족쇄에게 작별을 고했으며, 정교분리 원칙을 확실히 하여 신자들이 가톨릭 정당에 투표하지 않으면 생기던 불이익을 해소하였고, 교황의 위치를 권력의 정점에서 사목자 본연의 위치로 돌려놓는 등 가톨릭을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여기 기재된 내용이 끝이 아니라 더 많은 개혁이 존재하므로,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관련 전문서적을 읽기를 추천한다. 변화와 개혁의 규모가 가톨릭이라는 종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평가받는 정도이다. 당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비오 9세와 달리 개최한 업적만으로도 기적심사를 면제받아 성인품에 올랐으며, 이는 가톨릭 내부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와 영향을 인정한다고 볼 수 있다.

2014년 4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요한 23세를 시성하여,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2. 배경

1860년대 가톨릭은 급변하는 시대상황의 한가운데에서 변화하느냐, 전통을 고수하느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던 차였다. 근대 이후 과학과 세속권력은 점차 기존의 신권(神權)을 압도해갔고, 프랑스 혁명 등의 여파로 그 흐름은 결정적이 되었다. 1869년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권과 특히 교황권의 우위를 재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청과 가톨릭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쇠퇴했다. 1ㆍ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가톨릭은 전화(戰禍)를 누그러뜨리는 데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알로이스 스테피나츠 등 나치에 협조하거나 방관한 일부 주교들의 사례 등) 그릇된 폭력에 맞서지 못하고 외면하는 일도 있었다.

1950년대 말 젊은 가톨릭 신자들과 새로운 세대 성직자들은 바티칸의 완고한 권위주의가 공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에서 똑같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경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쾌감을 느꼈다. 20세기 중반 이후 결혼은 35년 이상 유지되었고, 이혼할 권리를 원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커졌다.

한편 전후 베이비붐으로 피임에 반대하는 인구학상의 논거는 약해졌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이에 반대했던 교회 당국은 고립되었다. 서유럽 전역에서 미사 참례율이 낮아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1] 문제는 이미 신자들이 사는 현실 한가운데에 있었다. 좀 더 명민한 가톨릭 지도자들이 알아차렸듯이 더 이상은 이런 문제를 전통과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다룰 수 없었고, 1940년대 말과는 달리 반공주의를 자극한다고 해도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톨릭은 굼떴고, 주요인사들은 여전히 구시대적인 교권의 절대성 고수에만 매달려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상황을 타개한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1958년, 교황 요한 23세가 즉위하였다. 요한 23세의 전임 교황인 비오 12세는 권위적인 보수파였던 데다가 치세 동안 건강 문제 때문에 교황의 정치적 권한을 비서 수녀파스칼리나 레네르트에게 위임할 정도였다. 파스칼리나 수녀는 여교황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이 권력을 행사하여 추기경단을 비롯한 가톨릭 수뇌부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런 두 사람의 행보에 질려버린 보수파를 비롯한 가톨릭 상층부는 적당히 나이도 많고 성품도 온화해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론칼리 추기경을 교황 요한 23세로 선출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온화하여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가톨릭 내부만이 아니라 격변하는 세상의 흐름에도 주목하여 가톨릭이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교황이 되자 이를 실현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보수파들의 반대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962년 10월 11일 공의회를 열어 이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를 꾀하였다.

당시 공의회는 그 규모뿐만 아니라 구성에 있어서도 특기할 만했는데, 당시 공의회에는 가톨릭 주교들 외에도 이제까지 이교(離敎), 이단으로 규정되던 다른 계열 기독교 교회 및 공동체의 대표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초청받았다. 또한 준비위원회 작업은 교황청 관료들이 맡았으나, 일단 공의회가 열린 뒤에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공의회 신부들이 각 위원회에 배속되었다. 전 세계 각지의 가톨릭 주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현장의 목소리를 쏟아내었을 때, 역시 자리에 참석한 교황청 관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들이 사목현장과 괴리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공의회의 토론을 거쳐 개정된 교령들과 확대된 위원회의 작업 결과는 대체로 진보적인 방향으로 기울었다.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의 후임자 바오로 6세 때에도 매년 가을에 회기를 시작하는 방식으로 계속되어 1965년 12월 8일에 폐회했는데,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16개의 문서를 교령화했다.

3. 내용

각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교회에 관한 교리 헌장 CONSTITUTIO DOGMATICA DE ECCLESIA〉에는 교회의 성직위계 체제에 대해서는 주교들의 역할에 무게를 둠으로써 제1차 바티칸 공의회교황을 군주로 강조한 것과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나 주교들과 주교단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교황의 수위권과 그리스도교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서의 권위를 통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주교들은 아무런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는 전통적 교리 역시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주교들의 단체인 주교단은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을 그 단장으로 포함시켜 이해해야만 권한을 가지는 것이고, 목자(사제)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대한 교황의 수위권은 전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로마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대하여 직책상으로 완전한 최상 전권을 가지며, 언제나 자유로이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교회 헌장 22항)

또한 평신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들이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선교사명에 참여해야 할 근거를 제시했다. 공의회 참석자들은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 순례자들로 묘사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래 가톨릭교회가 사상과 의식(儀式)면에서 지녀온 방어적이고 완고한 자세를 바꾸기 위한 신학적 명분을 제시했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 방식이 좀더 쌍방 유대적인 관계로 변화할 수 있었다.
  •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교리 헌장 CONSTITUTIO DOGMATICA DE DIVINA REVELATIONE〉에서는 성경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성경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 〈전례에 대한 헌장 CONSTITUTIO DE SACRA LITURGIA〉은 평신도들이 미사에 더욱 많이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미사 및 7성사 때 사용하는 내용 & 형식 & 언어에 생긴 중대한 변화를 만들기를 지시했다. 이 헌장의 성립으로 이제까지 라틴어로만 진행할 수 있었던 각종 성사들은 라틴어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있지만 해당 포교지역의 언어로 진행할 수 있게 되고, 전례서의 번역이 허용되는 등, 현지화를 융통성 있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로마 전례 양식을 제정, 발표했다. 현대 가톨릭 신자들이 접하는 가톨릭 의례는 1970년대 이후 제정된 것이다. 물론 로마 전례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조금씩 변하긴 했지만, 공의회 이후에 발표된 전례는 대대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아예 버전이 다른 것으로 간주한다.

    기존에는 전에 있던 전례서를 일부 수정하면 그만이었던 반면, 새 전례는 아예 전례서를 새로 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새 전례 이전 전례서를 사용하고 싶어했다. 구판 전례서를 사용할 때에는 로마 미사 전례서(Missale Romanum) 1962년판을 사용해야 하는데, 구판 중에서는 1962년판이 가장 최신(?)이기 때문이다. 새 전례를 정착시키고자 교황청에서는 구판 전례서를 사용하려면 해당 사제는 자기 상관인 주교에게 명시적으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정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가 '이미 공의회 이후 새로 제정한 전례가 완전히 정착했기 때문에 구판 전례를 자유로이 허용하여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신자들이 원하면 집전자는 상관 허락 없이 로마 미사 전례서 1962년판을 사용할 수 있다고 허용했다. 로마 미사 전례서 1962년판은 라틴어 외 언어로 번역하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레 라틴어 미사로밖에 거행할 수가 없다. 이후 1962년판을 따르는 라틴어 미사가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게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의 경우 일선 사제가 트리엔트 전례를 집전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장상(교구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고 한다.
  •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CONSTITUTIO PASTORALIS DE ECCLESIA IN MUNDO HUIUS TEMPORIS〉은 인류가 겪고 있는 심각한 변화들을 인정하고, 교회와 계시의 의미를 현대 문화의 필요 및 가치와 연관 지으려고 했다.

이 공의회는 그 외에도 주교들의 사목 의무, 에큐메니즘, 동방전례교회들, 사제들의 사목과 생활, 사제직에 대한 교육, 신앙생활, 교회의 선교활동, 평신도의 전도의무, 사회적인 교류방법 등에 관한 교령(구체적인 질문들에 대한 문서)을 공포했다.
더 나아가 종교의 자유, 비(非) 기독교 종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 기독교 교육에 관한 선언들(특정 논제에 관한 문서들)도 공포하였다. 특히 타 종파에 대한 이제까지의 경직된 태도를 허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로 보고 그들의 교회와 전통 중에서 진정하고 긍정적인 요소는 배우고 토의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또한 타 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로 돌아서게 한 초석이 되었다.

이 문서들은 교황 요한 23세가 즉위하기 수십 년 전부터 교회생활 여러 분야[2]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쇄신을 반영했다.

4. 주목할 만한 결과

  •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라틴어로 봉헌되던 미사가 각 나라 언어로 봉헌되기 시작했다.[3]
  •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교회 분열로 갈라진 정교회와 화해하였다.
  • 다른 종교에도 배울 점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종교관을 고백했다.[5]
  • 유대인예수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동안의 오랜 입장을 수정하여 반유대주의를 억제할 교회의 책임을 인정했다.[6]
  •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곧 사회적 불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예언자적인 책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 신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톨릭이 교회의 안위를 위한다는 이유로 나치 독일 등의 전체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한 일이 영향을 준 것이다.
  • 현대 사회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인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에서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폭력에 반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5장> 중
  • 탓 없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선하게 살 경우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였다.[7] 왜냐하면 선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고, 최대한의 내적 양심의 명령을 따라 본인이 알고 있는 선에서라도 가능한 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은총을 간직하려고 노력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외적인 비가톨릭 신자일지라도 본인의 고의적이지 않은 무지의 상황에서라면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다만, 이러한 공의회의 해설은 흔한 오해와는 달리, 기존에 없었는데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갑자기 뜬금포로 새로 생겨난 신학이 아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한참 전부터 가톨릭의 공식적인(혹은 주류적인) 신학 견해였던 것을 무류성으로서 재확인한 것일 뿐이다.[8][9] 반면에 보수 개신교는 비신자의 구원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여지를 인정하는 것조차 대단히 이단시한다.
여기서의 '자기 탓 없이'가 어느 정도까지 적용가능한지, 그리고 탓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적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공의회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는데, 사실 몇몇 비신자들의 오해와는 달리 이 범위는 공의회 이전부터 비교적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상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참조.[10]
  • 평신도의 역할을 과거에 비해 긍정했다. '교계 사제직'과 구분되는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개념도 이때 도입되었다. 전자는 성직자에 국한된 것이라면, 후자는 평신도들도 해당된다.
여기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개신교 예배 참관 및 개신교 성경, 개신교 서적, 타종교 서적, 기타 이단종파 서적의 '허가 없는' 열람 및 소지 행위는 1917년판 구 교회법에 최대 파문형벌까지 명시되어 있는, 고해성사 봐야 할 대죄였다.[11] 이것들 중 허락없는 타 종교 및 타 종파 서적 열람의 교회법상 처벌 규정이 해제된 것인데, 금서목록 제도에 대해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했던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외적인 강제규범으로서의 금서목록은 해제되었으나, 이는 여전히 가톨릭 신자들이 지켜야 할 양심법으로 남아있다"고 직접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오해하면 안 될 것이, 위급한 상황, 즉 가톨릭 미사를 도저히 참례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 때의 고의적인 정교회 성찬예배, 그리고 어느 때이든 개신교 예배성공회 감사성찬례에 고의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여전히 금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타 교파의 영성체 참여 또한 개방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가톨릭 사제성당이 주변에 없어 절박한 필요성의 상태가 아닌 일반 상황에서의 고의적 정교회 영성체, 그리고 어느 경우든 개신교 성찬식에 참석하는 것은 여전히 죄악이다.
마찬가지로 개신교를 비롯한 타 교파와의 성경 공동번역 작업도 허용되었다.[12] 이 공의회 직후에 영미권 최초의 공동번역 성경인 RSV-CE가 1966년에 출간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개신교와의 협업을 통한 《공동번역성서》가 출간되었다.[13] 또한 타 교파와의 공동(에큐메니컬) 기도회, 예배(미사와 같은 성찬예배, 일반예배)가 가능해졌다. 유의점으로는, 일치기도회 등의 행사는 가톨릭교회 당국자들이 결정하는 것이지, 평신도가 그런 것도 아닌데 에큐메니컬에 편승하겠답시고 허락없이 타 종파 예식에 개인적으로 참가하는 것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다.[14]
  • 매년 1월 18일에서 25일 사이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등이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 일치기도회가 이 시기부터 활성화되었다.
  •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적극 긍정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가톨릭계 정당(혹은 지역교회가 후원하는 특정 우익 정당)에 투표하지 않는 신자들이 파문이나 조당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졌다. 이것이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가 더 이상 특정 우익정당을 지지해야 할 종교적 책임이 없어진 것이다. 만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아니었다면, 한국 천주교가 민주화 운동을 이끌기는커녕 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을 찍지 않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파문의 위협을 줬을 여지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한편 아직도 극보수 전통 가톨릭 내에서 자유민주주의는 '현대주의의 오류'로 보는 시선이 팽배하다. 다만, 자유민주주의를 긍정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자유민주주의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보존하는 데 전제군주제/기타 독재체제에 비해서 현실적으로 유리하다는[15] 교회의 판단과 자유민주주의가 가톨릭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깐 조건부 긍정에 가깝지, 개신교 진보파, 중도파처럼 완전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16] 세속의 보수적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와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회도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인데[17], 민중의 뜻(속칭 '민의') 내지는 민주적 절차에 따른 결정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18] 사회교리서를 보더라도 자유민주주의 제도 자체는 존중하면서도 민주적 결정의 오류 가능성에 대해서도 유의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중도좌파적으로 서술되었다고 하는 DOCAT도 마찬가지). 저항권 행사에 대해서도, 그것이 폭력적으로 흘러가는 경우에는 현대 가톨릭 교회에서도 딱히 긍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보충 설명을 하자면, 위 단락 하단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가톨릭 신앙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므로, 가톨릭 교리와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거스르는 정당, 단체에 지지하거나 참여, 옹호하는 것은 여전히 교회법과 교령으로 적극 금지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교황청에서는 지속적으로 동성결혼, 낙태, 안락사 등 가톨릭 윤리에 거스르는 정책을 펴는 정치단체, 정책에 지지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교령과 훈령을 내고 있으며, 이는 신자가 따라야 할 의무이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등의 한국 천주교회 교회법에서도 이런 정신을 따라 모든 신자들에게 가톨릭 교회나 미풍양속에 관하여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홍보물의 제작에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한 관여하여서는 안 된다(가톨릭 교회법전 제831조 1항,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제239조)고 규정하고 있다.

5. 평가와 영향

1970년대 초반 이 문서들과 공의회의 전반적인 토의 내용들이 교회생활 전반에 걸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심지어 공의회 교부들도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생겨났다. 또한, 이 공의회의 진행 과정에서 당시 주교였던 성 요한 바오로 2세베네딕토 16세 등이 교황청에서 주목을 받고 중용되는 계기를 잡았다.

또한 전후 유럽의 부활 속에서 과거의 죄과와 완고한 권위주의에 갇혀 있던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여 현대적 삶의 딜레마에 대한 교회의 반응을 바꾸었다. 교회는 더 이상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과거의 교회와는 달리 자유민주주의[19]와 혼합경제, 현대과학(진화론 포함), 합리적 사고(합리주의), 나아가 세속 정치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한다는 의사표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는 이에 그치지 않고, 권위주의 정권의 지지기반으로서의 가톨릭의 역할을[20]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아시아아프리카,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가톨릭교회는 최소한 권위주의 정권의 반대자들 편에 섰다. 한국 천주교의 민주화 운동도 잘 알려진 사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가톨릭교회 내의 개혁가들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꾸준히 하락하던 유럽 가톨릭 신자들의 종교의식 참여율을 역전시키기도 역부족이었다. 이탈리아에서도 전체 가톨릭 신자의 미사 참례율은 1956년 69%에서 12년 뒤에는 48%로 하락했다. 그러나 68 혁명 이후 유럽에서 종교의 쇠퇴 현상은 결코 가톨릭 신앙에만 국한되지는 않았고(개신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음), 미국에선 오히려 가톨릭의 세가 왕성해졌기 때문에[21] 이를 근거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를 실패로 판단하는 것은 과도하게 경솔한 견해다.

사실 세속적 관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거둔 진정한 성과는, 아니면 적어도 촉진하고 인정했던 바는 첫째는 대륙 유럽에서 정치와 종교가 궁극적으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더 이상 기독교 정당에 투표하지 않았을 때 파문이나 조당의 위협을 당할 필요가 없어졌다. 바티칸의 이러한 조치는 스페인에서 가톨릭교회의 뒤늦은 '국교 해제'를 밀어붙이는 데 성공적으로 기여함으로써 프란시스코 프랑코 생전에 교회와 정권 사이에 간격을 벌렸고, 스페인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구체제'와 연합했던 데에서 연유하는 몇가지 곤란한 결과는 면하게 해줄 수 있었다. 둘째는 교황에 대한 세계적 존경을 좀 더 높였다는 점이다.

이 결과에 반발하여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성 비오 10세회를 설립하였다. 그 밖에도 베트남의 응오 딘 툭 대주교도 공의회에 반발하다가 교황공석주의자가 되어버려 교도권에서 파문을 당하고 이탈하였으며, 요한 23세 이전 비오 12세 치하 동안 바티칸의 실세였던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도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2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세계 각지에서 성서 공동번역이 활발해졌다. 우선, 영미권에서는 RSV-CE와 예루살람 성경이 발간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공동번역 성서가 발간되었다. 미국 가톨릭에서는 Confraternity Bible를 대체하는 New American Bible이 발간되었다.

가톨릭 내 일부 진보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작일 뿐"이라며 제3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주창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참고 하지만 자칫 3차 공의회를 성급히 개최했다간 의도와 달리 더 보수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성도 있다는 진보파 내부의 반론/비판도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 제도권 내 보수파와 진보파의 입장이 미묘하게 다른데, 일단 제도권 내 보수파에서는 '2차 공의회는 이전의 공의회와 다르게 교리를 수정한 공의회가 아니라 단지 사목적 방침에 관한 공의회였다'고 보는 반면에[23], 진보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했던 진정한 개혁 정신을 적극 실천해야 한다.'[24]고 주장한다. 일단 신학적인 결론만 보면 보수파의 주장대로 이 공의회는 교리 수정 목적의 공의회가 아니라 사목적 공의회가 맞는다. 따라서 많은 성직자들이 소위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이유로 교회의 신앙과 규정과도 어긋난 다원주의나 전례 남용 등을 보이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25] 그러나 성 비오 10세회 계열 전통주의자들의 주장처럼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무류성이 없다거나[26] 거짓 공의회라거나 하는 주장 역시도 오류이다. 반교도권 이교들은 루터를 매우 증오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하는 행동은 루터와 전혀 다를것이 없다.[27]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그간의 가톨릭의 모든 보편 공의회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에서 이어진 권위로 보증된 무류한 교회의 가르침이다.[28]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1965년에 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고 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연구하거나 공의회 정신에 따르려는 가톨릭 신자들이 필수적으로 새겨야 할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든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신앙, 전통, 수덕(극기하고 덕을 쌓음), 사랑의 실천, 희생정신,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자가에로의 충성에 대해 교회가 가르쳐온 바를 완화한다고 생각하던지, 원리원칙도 없고 초월적인 목적도 없이 나약하고 변덕스러우며 상대적인 세속적 사고방식에 대해 관대하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던지, 이전보다 더 쉽고 덜 철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형태를 포용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황 바오로 6세[29]

또한,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는 2007년 6월 29일 발표한 <교회에 대한 교리의 일부 측면에 관한 몇 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과 해설>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바꾸지 않았고 그러한 의도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를 발전, 심화시키고 더욱 완전하게 설명하였다.고 확인하였다.
요한 23세, 1962년 10월 11일 연설: “…… 공의회는 …… 가톨릭 교리를 바꾸거나 벗어나는 일 없이 전체를 온전하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 그러나 우리 시대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빼지 않은 온전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새로운 열정으로, 차분하면서도 충실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 그리스도교 신앙과 가톨릭 신앙과 사도 신앙에 충실한 모든 이가 강렬하게 바라는 대로 바로 이 교리를 더욱 널리,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 마땅히 신앙으로 따라야 하는 이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교리는 우리 시대의 요구에 맞게 연구하고 설명하여야 합니다. 동일한 근본 의미와 내용만 유지된다면, 신앙의 유산 자체와 존엄한 교리에 담긴 진리들과, 그것을 알리는 방식은 서로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54(1962), 791-792.
첫 번째 물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관한 이전 교리를 바꾸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물음은 앞에서 바오로 6세께서 말씀하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된 교회의 ‘새로운 면모’의 의미와 관련된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가르침에 근거한 답변은 매우 명료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이전에 갖고 있던 교회에 관한 교리를 바꾸려는 의도가 없었고 따라서 바꾸지 않았다. 공의회는 다만 이 교리를 깊이 있게 하고 더 유기적으로 설명하였다. 실제로 이는 바오로 6세께서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을 공포하는 연설에서 밝히신 바 있다. 그 연설에서 교황께서는 ‘교회 헌장’이 교회에 관한 전통 교리를 바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정되던 것이 이제 분명해졌고, 불확실하던 것이 이제 명쾌해졌으며, 숙고하고 토론하고 때로 논쟁하던 것이 이제 하나의 분명한 정식으로 종합되었습니다.”2)[2.]라고 단언하셨다.

또한 그 이후에 공의회가 가르친 교리와 이 교리를 받아들여 심화한 교도권 문서들의 가르침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어서, 그 자체로 어떤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를 들어,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은 단지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의 가르침들을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재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이러한 분명한 천명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본성에 관한 전통 가톨릭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해석의 대상이 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 그러하다. 곧,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일종의 ‘획기적인 변혁’을 기대하거나, 심지어는 다른 측면들은 거의 제외하고 일부 측면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깊은 취지는 분명히 교회에 관한 담론을 하느님에 관한 담론 안에서 그리고 그 아래에서 다루려는 것이었고, 따라서 참으로 신학적인 교회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공의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러한 측면이 가려져 왔다. 흔히 개별적인 교회론을 표명하기 위하여 이를 상대화하고, 또 흔히 이 동일한 공의회의 가르침에 대한 편파적이나 편중된 이해를 부추기는 특정 단어나 구절[31]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교회 헌장’의 교회론과 관련하여, 일부 핵심 개념들은 교회의 인식 안에 자리를 잡게 된 것 같다. 곧,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 교황의 수위권과 더불어 주교 직무에 대한 재평가인 주교들의 단체성, 보편 교회 안의 개별 교회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교회 일치의 측면에서 교회 개념의 적용과 타종교들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경에서 말하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 Ecclesia Catholica)는 정식으로 표현된 가톨릭 교회의 특수성에 관한 문제가 그러하다.

이어지는 물음들에서, 이 문서는 이러한 개념들을 일부 검토하고 특히 가톨릭 교회의 특수성과 이에 대한 이해가 교회 일치의 측면에서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고 있다.

6. 바깥고리



[1] 그때까지 순종했던 촌락 주민들의 지리적 이동과 사회 이동, 여성의 정치적 해방, 복지 국가 시대에 들어서 가톨릭교회의 자선과 교구 학교의 중요성이 감소한 일 등.[2] 성서, 에큐메니즘, 전례, 평신도 선교 의무 등.[3] 한국 가톨릭에서도 이전에는 라틴어미사가 봉헌되고 있었다. 참고로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미사 본다.'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본다'는 "볼 일을 보다.", "업무를 보다."라는 말처럼 '~을 경험한다, 처리한다'는 는 의미로 사용된 표현이다. 난해한 라틴어로 미사를 드린 것과는 무관하다. 또한 종교의례에 참석하는 것을 '~본다'고 표현하는 용법의 연장선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법회를 본다', '굿을 본다', '예배를 본다' 하는 말도 우리나라에서 멀쩡히 쓰인다.[4] 아래 정교회와의 화해와 견주어 꽤나 큰 사건이었다. 물론 천주교 신자들 중에선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개신교 자체에 반감을 품거나 개신교와의 교회 일치 운동에 결사 반대하는 보수성향 신자들이 있으나, 천주교 제도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예전처럼 개신교를 이단 내지 사이비라 매도하지 않는다. 물론 개신교가 올바른 가톨릭에서 갈라진 '열교'(이단 종파)라는 교리 자체는 여전하다. 현대 가톨릭이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라 부르는 것은 교리 외적인 대외적 화해를 위한 사목적 배려 차원에 가깝다.[5] 많은 이들이 오해하지만, 가톨릭예수가 유일한 구세주이며, 가톨릭 교리를 제대로 알게 되었으면서 고의적으로 가톨릭을 거부한다면 사후에 지옥에 떨어진다는 교리를 포기한 적 없다. 특히 한국에서는 보수적 성향의 한국의 개신교 교단 이미지가 워낙 나쁜 데다가 한국 가톨릭이 약간이나마 유순한 인식이긴 해서 이런 오해를 하는 듯. 또한 가톨릭 신자들은 죽어서 무조건 천국에 간다는 확신에 찬 사람이 드물다. 보수 개신교회처럼 "무조건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양분하지 않고, 그 중간 지대에 연옥이라는 곳이 있다고 믿기 때문.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면 연옥이 어떤 곳인지 나온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녔으나 완전 착하게 희생하고 살아서 천국에 갈 만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인 강도 등의 죄를 짓고 악하게 살아서 지옥에 갈 것도 아닌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지옥보다는 그 강도가 덜하지만 역시 일정기간은 벌을 받고 회개해야 하는 중간감옥 정도인 연옥으로 간다고. 대다수 신자들이 자신들은 연옥에 가리라 생각하기에, 매년 위령성월(11월)이 되면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6] 교회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시절부터 유대인들의 탄압을 금지해왔었다.[7]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교회헌장 16)[8] 일부 전통주의 이단들은 이것을 보고 종교다윈주의라고 비판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전통주의자들이 존경하는 보수 교황 비오 9세는 공식문서(Singulari quadam, 1854)에서 처음으로 선의의 무지를 인정하였다. “사도적인 로마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으며 … 그러나 불가피하게 참된 종교를 모르는 사람에게 하느님 앞에 이 일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이치이다.”[9] 1950년대 이전의 성모승천 교리라거나 19세기 이전의 성모무염시태 교리처럼.[10] 흔히 "이건 옛날 관점이고 지금은 달라진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가톨릭 교리신학에 대한 오해중 하나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전 가톨릭 교리를 부정하거나 변경하는 것이 아님을 신앙교리성에서 공식 발표하였고, 애초에 이 공의회 자체는 믿을 교리를 바꾸는 공의회가 아니라(교황이나 공의회라도 이전 교황이나 공의회가 장엄 교도권으로 무류하게 선언한것은 변경이나 수정이 불가능하다.) 사목적(교회생활적, 대외적) 요소를 개혁하는 공의회였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도 기존 가톨릭의 교리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11]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아예 원천금지되었던 건 아니다. 공의회 이전에도 고해신부나 주임신부, 또는 상위 성직자의 신중한 허가(관면)를 받았을 경우 학술적, 연구적 목적으로 타 종파 서적을 열람, 소지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신자 본인이 가톨릭 교리에 해박하고, 연구를 위한 경우에 한정하여 타 종파 단체에 참관 목적으로 어느 정도 머물 수도 있었다. 또한 결혼식 같은 행위에서, 비종교적 목적으로 타 종파인 신자의 들러리를 서주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엔 타 종파 결혼예배에 그냥 자리에만 앉아있는 식으로 수동적으로만 참가해도 교리적으로 죄까지는 안 되었다(출처: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형중 마태오 신부 저, 상해천주교요리, 중권 신덕 설명 중) 다만 완전한 우상숭배죄에 들어가는 행위, 예를 들면 굿(강신술) 참관이나 집전, 구경 같은 것은 엄금되었고 이 규정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유효하다.[12] 이는 현행 교회법에도 규정되어 있다 (제825조).[13] 가톨릭 교회의 개신교 성경 사용에 대해서, 에큐메니컬 성향의 천주교 신자들은 개신교 성경의 신학적 시각에 유념하며 보조적 용도로 활용한다면 상관 안 하지만, 보수적 성향의 신자는 금지에 가까운 권면을 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과거와 달리 단순히 개신교 성경을 열람했다고 해서 반드시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일 뿐이며, 가능한 한 가톨릭 성경을 보아야 할 양심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례용이나 신앙교육자료용으로는 반드시 가톨릭 교회의 인가를 받은 번역만을 써야 하며, 개인통독용으로도 교회의 인가를 받은 번역본을 사용하는 것이 강력히 권고된다. 당연하지만 《공동번역성서》도 가톨릭 교회의 인가를 받은 정식 가톨릭 성경 중 하나다.[14] 출처: 천주교 대구대교구 김경식 보니파시오 몬시뇰 저, 《생활교리》.[15] 아돌프 히틀러,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 프란시스코 프랑코, 북한 등의 독재정권의 만행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16] 개신교 보수파는 신정주의를 외치는 또라이를 빼고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은 원래부터 현대 가톨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개신교 진보파 일각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전통 가톨릭의 반동적인 비판이라는 맥락은 아니며, 세속적 진보주의 급진파의 자유민주주의 비판(부르주아 민주주의 운운)과 맥락이 닿아있다.[17] 정치적으로 강경 진보 입장에 있는 일부 사제나 평신도 정치인들이 급진적 민주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급진적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교도권의 입장과 거리가 있다.[18] 세속의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은 민의(민중의 일반의지)나 민주적 결정 그 자체가 무오하다고 믿지만, 가톨릭 교회는 그러한 관념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유민주주의자들은 그것의 오류 가능성을 (원론적으로는) 부정하진 않는다. 물론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은 민중(대중)의 정치적 의사(속칭 '민의')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대의명분이자 정치의 목적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의와 그에 의한 정치적 의사결정이 '원론적으로 무오류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있으면 근거 제시해서 추가 요망. 이들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은 차라리 '물론 민의에도 오류가 있을수는 있지만, 어쨌건 정치적 결정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대중이니 권리 역시 대중이 가져야 한다'는 것에 더 가깝다. 즉, 민의가 무오류하고 완전하기에 민의에 따라 정치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민의에도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의 대안이 없으니 민의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오히려 '무오류성'은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는 데 더 적절한 개념이다. 세속주의, 인본주의적인 정치세력과는 달리 종교집단인 가톨릭은 '인간의 이지를 뛰어넘는 전지전능한 절대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가톨릭의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 역시 '결코 오류가 없는 선하신 절대신의 의지'가 되는 것. 말하자면 민의는 인간의 의사인 만큼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건 당연한데, 신이라는 가정을 두지 않는 세속적 민주주의자들이 '틀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민의를 따르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종교(가톨릭)주의자들은 '인간의 판단은 틀릴 수 있지만 신의 뜻은 언제나 옳으니 인간의 뜻보다는 신의 뜻에 따르는 정치를 해야 한다' 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은 민의와 민주적 결정을 무오류하다고 믿는다' 고 주장하는 것은 그냥 가톨릭 종교주의자의 정치적 입장에서 '신의 뜻' 을 '민의' 라고 이름만 바꿔버리는 수준의 잘못된 이해이다.[19] 2차 공의회 이전에는 가톨릭 교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사상에 대해 그리 옹호하는 입장이 아니었으며, 일부 교황이나 성직자들은 '현대주의의 오류'라 하여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실제로 2차 공의회를 거부하는 극보수파 신자들은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가톨릭 왕정체제나 군사독재체제를 그리워한다.(전자의 경우 입헌군주제면 가능해도 전제군주제는 당연히 무리다.)[20] 이탈리아의 가톨릭 신자에게는 '기독교민주당에 반대하여 투표하는 행위는 영적 부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었다. 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에서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21] 그런데 사실은 가톨릭 문화권 출신 이민자(아일랜드, 이탈리아, 폴란드, 히스패닉 등)의 급증 때문이긴 하다.[22] 그래도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는 성 비오 10세회나 응오 딘 툭 대주교처럼 교황청과 대립각을 세우며 이탈하는 행보를 보이지는 않고, 평생을 교도권에 남아 있었다.[23] 이건 SSPX도 비슷한 입장이긴 하다. 하지만 SSPX-MC와 공석주의, 대립교황 진영에서는 '2000년간 가톨릭 교회가 수호해왔던 전통 교리를 변개한 처사였다'고 본다.[24] 2차 공의회는 '미완의 개혁'이었다고 보는 생각이 암암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25]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이 주장을 견지한다.[2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무류성을 부정하는 이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이나 도덕의 문제를 결정하지 않았으므로 무류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오류이다. 1964년 3월 6일 위원회 선언에는, “공의회의 관습과 현 공의회의 사목적인 목적을 고려하여, 이 거룩한 공의회는 교회가 믿어야 할 신앙이나 도덕의 문제에 관한 것들도 결정하며, 이를 공의회가 그러한 것으로 분명히 선언할 것이다.”라며 신앙이나 도덕의 문제에 관한 것들도 결정한다고 명시되어 있다.[27] 1517년 신학자들이 논문을 발표하는 관례에 따라, 테첼 신부가 비텐베르크에 오자, 루터는 그를 반박하기 위한 95개조 조항의 논문을 성당 문에 부착하였다. 이때 루터는 신학자 에크와의 논쟁에서, 교황 수위권과 공의회 무류성을 거부하였다.[28] 노트르담 대학 교수 출신의 미국의 유명한 가톨릭 평신도 철학자인 랄프 맥키너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무오류성을 부정하겠다면 마찬가지로 트리엔트 공의회나 그 이전의 모든 가톨릭 공의회의 무류성 역시 부정당해야 한다. 다른 모든 공의회는 인정하면서 2차 바티칸 공의회만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현대 가톨릭의 위기 진단》, 천주교 서울대교구 이재룡 시몬 신부 옮김, 가톨릭출판사)[29] 디트리히 폰 힐데브란트 저, <하느님의 성 안에 들어온 트로이의 목마>에서 인용.[2.] 바오로 6세, 1964년 9월 21일 연설, AAS 56(1964), 1010.[31] 대표적으로, 양심적 삶과 자연법에 합당한 삶을 살았던 불가항력적 비가톨릭 신자의 구원 가능성을 논하는 구절을 마치 "가톨릭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고의적 냉담자나 배교자도, 타종파인과 타종교인도, 무신론자도 전부 다 구원받는 개방적인 종교가 되었다"는 식으로 철저히 왜곡하는 사람들이 강경 반가톨릭 개신교인들부터 일부 극렬 전통 가톨릭 교인들, 세속적 자유주의자들까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이는 명백히 악의적인 왜곡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가톨릭은 공의회 이전이나 이후나 고의적인 불신자, 대죄인의 사후 지옥벌을 부정하지 않으며, 엄밀히 말해 공의회 선언의 해당 구절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유물이 아닌, 이전부터 교리로서 믿어져오던 것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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