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550년 스페인 서북부의 바야돌리드에서 일어난 논쟁.2. 배경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수많은 인디오[1]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잔혹한 식민통치가 계속 되자 스페인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이런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오들이 스페인의 가혹한 통치로 점점 인구가 감소하면서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엔코미엔다[2]를 폐지하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엔코미엔다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던 스페인 대귀족들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3] 이에 카를로스 1세는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오들의 지위와 권리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하고 바야돌리드에서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3. 전개
이 회의에서 저명한 스페인의 석학인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는 "인디오들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 강압적 방법으로 지배하고 통치해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반면, 도미니코회 수사인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인디오들에게도 이성이 있으며, 강압적인 방식이 아닌 설득과 교육으로 인디오들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맞섰다.당대의 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자였던 세풀베다는, 아메리카에 대한 군사적 정복을 옹호하던 이였고 이에 맞선 라스 카사스는 1544년 66세이 나이로 치아파스 지역의 주교로 부임했었고 1547년까지 아메리카에 실제로 머물러 있었다.
세풀베다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군사적 정복을 옹호한 인물이었는데, 1529년에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십자군 거병을 요구하기도 한 인물이었다. 세풀베다로 대표되는 호전적 정신은 에라스뮈스의 평화주의에 맞서 군사적 정복을 옹호한 카프리의 영주 알베르토 피오의 후원을 받았다. 상기한 대로 세풀베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대가였으며, 이에 따라 세풀베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적 노예 상태에 대한 이론을 전개한 것을 역설할 수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티노의 '죄에 대한 징벌로서의 노예' 이론을 전개하였고 그 근거로 인디오들의 우상숭배, 식인 풍습, 인신공양 등을 제시하였다.
한편 라스 카사스는 "인디오들의 토지 소유권 역시 자연법과 국제법에 따라 하느님 앞에서 존중되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고대 유럽에도 야만적인 그리스-로마, 켈트 게르만 이교도의 우상숭배, 식인 풍습, 인신공양들이 만연했으며, 예수님과 12사도들은 이들 죄인을 사랑과 복음으로 죄악을 회개시켜 교화했었다고 했다. 신대륙의 인디오들도 문명을 쌓은 이성인들이므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다고 처벌되어서는 안 되며, 악의적으로 복음의 전파를 막는 이들만이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교황이나 그리스도교 군주가 보편적인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타 문명인이 자리잡은 아메리카에 대한 군사적 정복은 합당하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원주민 교화론자들의 의견에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큰 변화가 옛 아즈텍 영역 전체에서 일어났으니, 아즈텍인이 믿던 인신공양의 종교적 메커니즘이, 가톨릭의 성체성사 교리 안에 완벽히 녹아들어[4], 남미인들의 급속도의 가톨릭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소식이 스페인으로 전해지자, 원주민에 대한 차별론은 그 힘을 크게 잃었다.
4. 결과 및 의의
논쟁 끝에 교황 특사는 라스카사스의 의견을 수용하여 "인디오에게도 이성과 문화가 있으며 우리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이니 인디오들을 노예로 삼거나 가혹한 처우를 해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따라 인디오를 노예로 만드는 모든 행위가 불법화한다.그런데 인디오를 노예로 삼지 못하게 되자, 노예상인들은 "아, 그러면 아프리카인을 끌고와서 노예로 부리면 되겠구나?"라는 신박한 결론을 내린다(...) 애초에 레콩키스타 이전인 수십년 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 살고 있던 북아프리카 출신 무슬림들이나 오스만 제국, 아라비아 일대의 이슬람 왕조들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삼았던 것은 유구한 풍습이었으며[5] 당시 원주민은 가혹한 노동 뿐만 아니라 이미 천연두와 같은 각종 질병들의 전파로 인구가 급감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원주민이 아닌 흑인을 노예로 부리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 아프리카의 중서부 지역의 흑인을 대규모로 노예로 끌고 오며 그들은 바야돌리드 논쟁과 같은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도 논쟁 당시 인디오 대신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자고 주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흑인이 학대받는 모습을 보고 후회하고 노예제 철폐를 주장한다. 당연하게도 스페인 정부는 이러한 주장을 무시했고, 흑인 노예 무역 금지를 비롯한 노예 철폐는 한참 지난 뒤에야 이루어진다.
그래도 이 논쟁은 근대 국제법의 탄생에 직결되며 몽테뉴가 1580년에 "야만인의 악행엔 정죄하면서 우리의 악행엔 눈이 멀었다"라고 개탄하는 등, 자기 반성적 태도를 부른다.[6]
상기의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해, 프랑스의 작가 장클로드 카리에가 쓴 소설도 있으며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 있다 (바야돌리드 논쟁, 샘터, 2007).
[1] 여기서는 역사적 명칭을 따라 원주민 대신 '인디오'를 쓴다.[2]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아 아메리카 대륙 등지를 지배, 관리하는 제도를 뜻한다.[3] 콩키스타도르의 반발로 인하여 라스카사스는 1546년에 주교직에서 물러났고 국왕은 1549년에 엔코미엔다에 대한 개혁 조항을 포기했다.[4] 성체성사의 교리는 신의 몸과 피를 먹음으로서 희생과 초월적인 사랑을 가르친다. 이 교리는 많은 부분에서 아즈텍 신화의 교리 및 제례 의식과 완벽하게 맞물렸다.[5] 무함마드를 따르던 최초의 흑인 무슬림 빌랄도 노예 출신이었다.[6] 상기 내용들의 출처는 주로 대서양 문명사, 김명섭 교수 저, 256-2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