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20:56:14

칸타브리아



스페인어: Cantabria
영어: Cantabria
일본어: カンタブリア
중국어: 坎塔布里亚
칸타브리아 (스페인)
Cantabria

1. 개요2. 주기와 상징3. 자연 환경4. 역사5. 정치6. 도시7. 언어8. 스포츠


1. 개요

스페인의 자치 지방. 스페인 북부에 위치해 있고 동쪽으로는 바스크, 서쪽으로는 아스투리아스, 남쪽으로는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에 접해 있다. 역사적으로 라 몬타냐(La Montaña)[1]라고도 불렸다. 현재 560,000명이 살고 있다.

2. 주기와 상징

파일:칸타브리아 기.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Coat_of_Arms_of_Cantabria.svg.png

주기 가운데의 문양은 아래의 칸타브리아의 문장과 같다.

문장의 좌상단에는 배가 있고 그 위에는 두 사람의 머리가 있다. 우상단에는 탑이 나타나 있고 중앙부에는 쇠사슬과 파도 문양이 있고 하단에는 문양이 나타나 있다. 하단부의 문양은 칸타브리아 석비[2]의 문양을 딴 것이다.

해당 문장은 1248년 레콘키스타 당시 칸타브리아 해군의 세비야 정복을 기념하는 것이다. 여기서 탑은 세비야의 토레 델 오로를 본떴다고 알려져 있고 쇠사슬은 세비야 인근의 과달퀴비르 강을 막고 있던 쇠사슬을 뚫고 세비야를 정복한 것을 기념한 것이고 배는 칸타브리아 해군을 상징한다. 배 위의 두 사람의 머리는 산탄데르와 칸타브리아의 수호 성인인 성 헤미테리오와 성 첼레도니오를 나타낸다.[3]

3. 자연 환경

칸타브리아의 Cant가 고대 이베리아어로 산을 나타내는 말일 만큼 산이 많은 지역이다.

해안 지역은 폭 10km 정도의 계곡이 존재하고 이것이 완만하게 커지는 편이다. 이 계곡의 고도는 500m 이하로 이 계곡은 리아스식 해안과 모래 사장을 만드는 하천의 하구에 의해 부서져 절벽을 이루게 되면서 바다와 만난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산탄데르 만에서 잘 나타나는 편이다. 남쪽으로 가면 해안의 길쭉한 땅이 다시 융기해 산지와 만난다.

산지 지역은 바다와 평행하게 융기한 산맥으로 만들어진 긴 장벽을 이루고 있어서 칸타브리아 산맥의 일부를 이룬다. 산맥은 대부분이 카르스트 지형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서 칸타브리아 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산지 지역은 600m에서 1000m에 달한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 환경 덕분에 칸타브리아 지역은 작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7개의 국립 공원이 있고 습지 생태계가 잘 형성되어 있다.

스페인 하면 생각나는 건조한 기후가 아니라 상당히 습윤한 편에 속한다. 연 강수량은 1200mm으로 산지 지역에서는 푄 현상에 의해 강수량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4. 역사

로마 공화정 시대의 대 카토에브로 강 수원 지역의 민족을 칸타브리 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역사적 기록에서의 첫 등장이다. 칸타브리 족의 기원은 켈트족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고 인근 바스크족과도 약간의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명확하지는 않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이미 칸타브리 족이 카르타고의 용병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이고 몇 번의 격돌에서 칸타브리 족이 활약한 장면이 등장한다.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히스파니아의 패권을 확보한 뒤에도 쉽사리 굴복하지 않고 로마에 반기를 든 부족들을 후원하며 독립을 이어갔다. 그러나 기원전 29~19년 칸타브리아 전쟁에서 패하면서 로마에 귀속되었다.

로마 제국 쇠락 이후 수에비족과 고트족의 각축장이 되었다가 결국 서고트 왕국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고 서고트 왕국은 칸타브리아 지방에 칸타브리아 공국을 세워 다스렸다. 칸타브리아 공국은 동쪽으로는 바스크 지역까지, 서쪽으로는 현재의 아스투리아스 지역 일부까지 지배했다.

이후 후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공략에 밀리는 상황에서 칸타브리아는 천혜의 자연 환경 덕에 완전히 점령당하는 상황은 모면하게 되었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시원점이 된다. 특히 아스투리아스 왕가는 칸타브리아 일대를 시원으로 삼고 있었기도 했다. 그러나 아스투리아스-레온 왕국을 거치면서 칸타브리아라는 지역명 대신 아스투리아스 지역의 일부 지방 정도로 알려졌고 기록 상에도 아스투리아스로 더 많이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에 벌어진 레콘키스타에도 크게 일조하는데 특히 칸타브리아 지방에는 해군들이 유명해 해전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중세 시대 이후 카스티야 왕국 지배하에서는 아스투리아스와 구별해 라 몬타냐라는 지역명을 흔히 사용했다. 이 명칭은 메세타 고원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것이 칸타브리아 지역을 일컫는 말로 사용된 것으로 지금도 라 몬타냐라는 지역명은 흔히 사용될 정도.

르네상스 시대에는 칸타브리 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며 칸타브리아 지역의 정체성이 명확해졌다. 정확히는 칸타브리 족의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는 가운데 논쟁이 발생하면서 칸타브리아 지역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대부분의 인구가 희생된 무서운 전염병이 휩쓴 뒤로 18세기까지 경제적 침체를 겪게 된다.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스페인 독립 전쟁에서 왕당파의 지지자였던 라파엘 주교는 자신을 칸타브리아 섭정이라고 칭하면서 칸타브리아 지역 군대를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라레도와 산탄데르 등지에서 칸타브리아 독립 요구가 등장하게 되고 카스티야에서 독립된 왕국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서로의 경쟁 끝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스페인 내전기를 거치면서 산탄데르 일대의 지역에 칸타브리아라는 지역명을 쓰는 것은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비추어져 크게 탄압받았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치하에서 자치 지역 승격을 요구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결국 프랑코 사후에야 칸타브리아는 자치 지역으로 승격되는데 성공한다.

5. 정치

파일:칸타브리아 의회 로고.png
칸타브리아 의회의 원내 구성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연립 여당
[[칸타브리아 지역주의자당|칸타브리아 지역주의자당
8석
]]
칸타브리아 사회당
8석
야당
[[인민당(스페인)|인민당
15석
]]
[[복스(정당)|복스
4석
]]
재적
35석
}}}}}}}}}


역사적 카스티야 강역의 일부인가 아닌가로 정체성 논란이 있는데 본격적인 분리주의까진 안가는 스페인 내 지역간 갈등치곤 상당히 험악하다.

6. 도시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중심 도시는 산탄데르다. 산탄데르와 제 2의 도시인 토레르베가는 연담 도시가 형성되어 있어 있고 양자를 합치면 칸타브리아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이 지역에 살고 있다. 옆 지역인 바스크 지역(특히 비스카야)에 대한 베드 타운이 일부 형성되어 있기도 하고 전형적인 베드 타운인 카스트로 우루디아레스는 정식 인구수가 고작 20,000명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거주자는 두 배 이상일 것으로 추산되어 있기도 하다.

7. 언어

공용어인 스페인어가 주로 사용되지만 레온 방언인 칸타브리아어도 사용된다. 그러나 칸타브리아어는 규정화된 문법이나 표기법이 확립된 언어가 아니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칸타브리아어는 주로 칸타브리아 서부 지역에서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8. 스포츠

지역 내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팀은 산탄데르라싱 데 산탄데르다. 이와 칸타브리아 더비를 이루는 토레라베가의 힘나스티카가 지역 라이벌로 활동하고 있다. 물론 최근 성적은 힘나스티카가 좋지 않은 편. 칸타브리아 또한 바스크나 갈리시아 등의 타 지역처럼 자치 지역 대표팀이 존재하고 대표팀 소속이었던 선수 중 가장 유명한 선수는 이반 엘게라가 있다.

럭비나 핸드볼 팀도 있고 과거에는 농구 팀도 존재했다.


[1] 스페인어로 산이라는 뜻.[2] 칸타브리아 석비는 로마 시대 이전에 세워진 사암 석비로 가장 유명한 것은 칸타브리아의 산탄데르에서 발견된 것이다. 특히 칸타브리아 석비 가운데의 문양은 라바루라고 불리고 고대 로마 시대 이전 이베리아 원주민의 군기의 문양으로 추정된다.[3] 산탄데르에 기념 수도원이 있고 라 리오하의 칼라오라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칼라오라의 수호 성인이기도 하다. 특히 과거에 기념 수도원으로 썼던 곳은 오늘날에는 산탄데르 대성당으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유서깊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