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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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15대 군주 Antiochus VII Sidetes 안티오코스 7세 | ||||
<colbgcolor=#000> 출생 | 기원전 164년 또는 기원전 160년 | |||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키아 | ||||
사망 | 기원전 129년 | |||
파르티아 엑바타나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138년 7월 또는 8월 ~ 기원전 12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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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데메트리오스 1세(아버지) 라오디케 5세(어머니)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형) 클레오파트라 테아(부인) 안티오코스 9세 키지케노스(장남)[1]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차남)?[2] | |||
참전 | 파르티아 전쟁 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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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15대 군주. 혼란에 빠진 제국을 재정비하고 파르티아를 상대로 수차례 승리하며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는 등 명군으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나, 엑바타나 전투에서 파르티아군의 매복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셀레우코스 왕조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된다.2. 생애
데메트리오스 1세와 라오디케 5세의 차남으로, 형으로 데메트리오스 2세가 있었다. 에우세비우스는 그가 전사했을 때 35세였다고 기술했다. 이에 따른다면, 그는 기원전 164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반면에 헬레니즘 제국 관련 역사가 에드윈 로버트 베반은 데메트리오스 1세가 기원전 162년에 집권할 때까지 라오디케 5세와 결혼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안티오코스 7세가 태어난 해를 기원전 160년으로 지정했다. 부친이 기원전 162년 즉위한 이래, 그는 형과 함께 왕족으로서 대우받았다. 그러나 기원전 150년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반란으로 부친이 폐위된 뒤 아내 라오디케 5세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그는 형 데메트리오스 2세와 함께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 도시 팜필리아 인근 시데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 때문에, 그는 나중에 '시데 출신'이라는 의미의 '시디테스'(Sidete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기원전 147년, 형 데메트리오스 2세가 라스테네스가 이끄는 크레타 용병대와 함께 시리아로 돌아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지원을 받으며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와 내전을 벌였다. 수년간의 전쟁 끝에 기원전 145년 오이노파루스 강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1세를 격파하고 안티오키아에 입성했다. 그러나 크레타 용병대의 전횡을 전혀 막지 않았고, 이에 반발하여 봉기한 안티오키아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바람에 민심을 잃었다. 지난날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섬기다가 정권이 바꾼 뒤 축출당한 디오도토스 트리폰 장군은 이 때를 틈타 아라비아에 숨어지내던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의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 6세를 옹립한 후 안티오키아를 공략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셀레우키아로 도주한 뒤 그곳에서 세력을 갖춰서 디오도토스와 맞섰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는 데메트리오스 2세 세력과 안티오코스 6세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기원전 142년 또는 141년 안티오코스 6세가 사망하자, 디오도토스 트리폰이 왕을 자칭했다.
기원전 138년, 데메트리오스 2세가 동방 영토를 계속 잠식하는 파르티아에 대항하여 원정을 떠났다가 매복에 걸려 사로잡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리하여 데메트리오스 2세가 가지고 있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동방 영토가 고스란히 파르티아의 수중에 넘어갔다. 당시 모종의 이유로 로도스 섬에 머물고 있었던 안티오코스는 이 소식을 듣자 스스로 왕을 자칭한 뒤, 군대와 함대를 조직한 후 유대 대제사장 시몬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카베오기> 제 1권에 기록된 편지에서, 그는 자신을 '바실리오스'로 묘사하며 이전의 특권과 자유를 확인해줄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새로운 특권을 약속했다. 가령 유대인들은 스스로 주화를 주조할 수 있었고, 새로 지은 요새에 대한 권리가 확인되었으며, 공물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후 형수인 클레오파트라 테아가 통제하는 항구 도시 셀레우키아 피에리아에 상륙한 뒤, 기원전 138년 10월 이전에 그녀와 결혼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안티오코스 7세는 군대를 정비한 뒤 북상하여 디오도토스 트리폰과의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고 기원전 138년 중반 안티오키아를 탈환했다. 디오도토스는 도르로 이동한 뒤 농성전을 벌였으나 함락이 임박하자 해로를 통해 오르토시아로 탈출한 뒤 고향인 아파메아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도 포위되었다. 결국 기원전 138년 말 또는 기원전 137년 초 처형되거나 사로잡히기 전에 자살했다. 이로써 안티오코스 7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단독 군주로 자리잡았다. 이후 내우외환으로 쇠락해진 제국을 되살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먼저 주변국과의 외교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로마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기원전 134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히스파니아의 누만티아를 포위하고 있을 때, 안티오코스 7세가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아테네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아테네 시내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한편, 자신이 왕이 되는 데 크게 기여한 도시인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기원전 138년 또는 137년부터 '거룩하고 불가침한 도시'로 지정하고, 면세 혜택을 부여했다. 또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도시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한 반면, 반역자 디오도토스 트리폰에게 충성을 바쳤던 도시들에게는 벌금을 매겼다.
<마카베오기>에 따르면, 그는 집권 전에는 유대에게 달콤한 제안을 했지만 집권 후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친구 아테노비오스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다윗 성에 주둔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비대를 철수시키는 대신 유대 밖의 모든 유대인 소유의 성읍에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은 1,000달란트를 납부하라고 했다. 그러나 시몬이 100달란트만 납부하겠다고 했기에, 아테노비오스는 협상을 중단하고 돌아갔다. 이후 안티오코스 7세의 임명을 받은 에피스트라테고스는 팔레스타인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고 시민들을 다스릴 권한을 가졌다. 그는 케돈 시를 요새화하고, 유대와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기원전 135년 2월, 시몬이 사위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아들 마타디아, 유다와 함께 피살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오코스 7세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안티오코스 7세는 응답하지 않았다. 얼마 후 시몬의 셋째 아들인 요한 히르카노스 1세가 프톨레마이오스를 몰아내고 대제사장에 등극했다.
기원전 130년대 중반, 안티오코스 7세는 마카베오 가문의 내분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유대로 진격하여 유대인이 사는 시골들을 황폐화시킨 뒤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는 성벽 주변에 이중 참호를 파고 도시를 매일 공격했다. 요한 히르카노스는 식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투를 치를 수 없는 자들을 도시에서 내쫓았다. 안티오코스 7세도 받아주지 않았기에, 그들은 전선 사이에 갇혀 굶어죽어갔다. 공성전이 1년간 이어지자 수세에 몰린 요한 히르카노스는 사절을 보내 평화를 요청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왕의 고문들은 유대인을 전부 소탕하라고 권고했지만,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유대인들이 모든 무기를 버리며 유대 밖의 도시들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세금을 내고, 예루살렘에 수비대를 두는 걸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유대인들이 수비대를 예루살렘에 두는 것에 거부감을 내비치자, 그는 수비대를 두는 걸 포기하고 대신 인질들을 인도받고 500달란트의 은화를 받기로 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요한 히르카노스는 다윗 왕의 능을 도굴하여 확보한 은으로 배상금을 납부했다고 한다. 그 후 유대는 안티오코스 7세 치세 동안 셀레우코스 왕조의 봉신이 되었다.
이렇게 유대를 제압한 뒤, 그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제국 전역과 유대 및 타국에서 보내온 병력까지 규합하여 수만명의 병력을 편성한 뒤, 기원전 131년 3월 동방으로 출정했다. 이후 파르티아와 3차례 맞붙어 모두 승리하고, 유프라테스 강 일대를 평정한 뒤 바빌론을 탈환했다. 당시 파르티아는 북부 영토를 수시로 습격해오는 유목민인 사카족을 막느라 주력군을 그쪽으로 돌렸기 때문에 안티오코스 7세의 공세에 전력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파르티아 군주 프라아테스 2세는 협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7세가 제시한 조건[3]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협상이 결렬되었다. 기원전 130년, 안티오코스 7세는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티그리스 강을 건너 제국의 옛 수도 수사를 탈환하고, 뒤이어 메디아 일대를 평정했다.
프라아테스 2세는 북부 영토를 습격해오는 샤카족과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뒤, 반격할 기회를 노렸다. 데메트리오스 2세를 석방시켜서 안티오코스 7세에 맞서 내전을 벌이도록 유도하는 한편, 적군이 파르티아 심장부에서 겨울 동안 주둔하면서 민중과 갈등을 빚는 걸 지켜봤다. 기원전 129년 2월 또는 3월, 파르티아 주민들이 봉기하여 마을에 주둔한 셀레우코스군 장병들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티오코스 7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소규모 기병대만 이끌고 달려갔다. 프라아테스 2세는 드디어 고대하던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그가 병사들을 구하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엑바타나의 좁은 계곡에 군대를 매복시켰다.
얼마 후 병사들을 구출한 뒤 숙영지에 귀환하던 안티오코스 7세는 매복 공격을 받았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친구들은 일단 후퇴하여 목숨을 보전하자고 권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하고 사력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와 클라우디우스 아엘리아누스는 격렬하게 싸우다가 사로잡힐 위기에 몰리자 목숨을 끊었다고 기술했다. 이리하여 무너져가던 셀레우코스 제국을 회생시킬 명군이 될 수 있었던 그는 허망하게 죽었고, 제국은 이후로 다시는 중흥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끝없는 쇠락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