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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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27대 군주 Antiochus XII Dionysus 안티오코스 12세 | ||||
<colbgcolor=#000> 출생 | 미상 | |||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키아 | ||||
사망 | 기원전 82년 | |||
셀레우코스 제국 카나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87년 ~ 기원전 82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제호 | 안티오코스 12세 디오니소스 Antiochus XII Dionysus | ||
가족 | 안티오코스 8세 그리포스(아버지) 트뤼파이나(어머니) 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첫째 형)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둘째 형) 필리포스 1세 필라델포스(셋째 형) 데메트리오스 3세 에우카에로스(넷째 형) 라오디케 7세 테아(여동생) 클레오파트라(딸) 안티오치스(딸) | |||
참전 | 셀레우코스 내전, 나바테아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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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27대 군주. 형들인 필리포스 1세와 데메트리오스 3세가 내전을 벌이는 틈을 타 다마스쿠스를 점거하여 시리아 남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바테아 왕국과 두 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기원전 82년 카나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안티오코스 8세와 트뤼파이나의 막내 아들이다. 형으로 셀레우코스 6세, 안티오코스 11세, 필리포스 1세, 데메트리오스 3세가 있었고, 여동생으로 라오디케 7세 테아가 있었다. 형들이 안티오코스 9세와 안티오코스 10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기원전 87년 제국을 양분한 데메트리오스 3세와 필리포스 1세가 내전을 벌일 때, 그는 권력의 공백이 생긴 다마스쿠스에서 할거했다. 파르티아의 구원 덕분에 데메트리오스 3세를 무너뜨리고 안티오키아를 점거한 필리포스 1세는 다마스쿠스를 점거한 동생과 대립했다.그는 형이 다스리는 시리아 북부 대신 남부의 나바테아 왕국과 하스몬 왕조 유대 왕국을 노렸다. 기원전 83년, 안티오코스 12세는 나바테아 정벌에 착수했다. 필리포스 1세는 동생이 다마스쿠스를 비운 틈을 타 쳐들어갔는데, 도시 총독 밀레시우스가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밀레시우스는 새 주인으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자 반기를 들어 필리포스 1세를 다마스쿠스로부터 몰아냈다. 안티오코스 1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필리포스 1세는 이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지만, 안티오코스 12세는 시리아 북부를 공략하려 하지 않았다.
기원전 82년, 안티오코스 12세는 나바테아 원정을 재차 감행했다. 그는 지중해 해안가를 따라 진군하다가 유대 왕국의 영역을 통과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 왕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는 그가 유대를 정복하려고 쳐들어오는 걸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야나이 방어선'을 건설했다고 한다. 방어선은 카파사바에서 요파 인근까지 28km에 달했다고 하지만, 안티오코스 12세는 방어선을 뚫고 계속 행진했다고 한다. 이후 셀레우코스군과 나바테아군은 카나 마을 인근에서 격돌했다. 카나 마을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학자들은 사해의 남서쪽일 거라고 추정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나바테아군은 위장 퇴각했다가 추격하는 적을 향해 맹렬히 반격했다. 안티오코스 12세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공격을 견뎌냈지만,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다가 그만 전사했다고 한다. 왕의 전사에 전의를 상실한 셀레우코스군은 붕괴되었고,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3세는 다마스쿠스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10세의 아내로 그때까지 잠적해 있었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가 안티오코스 12세의 전사를 기회삼아 아들 안티오코스 13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6세기때의 역사가 요안니스 말라라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12세에겐 클레오파트라와 안티오치스라는 이름의 두 딸이 있었다고 한다. 부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진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