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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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23대 군주 Antiochus X Eusebes 안티오코스 10세 | ||||
<colbgcolor=#000> 출생 | 기원전 113년경 | |||
셀레우코스 제국 안티오키아 | ||||
사망 | 기원전 92년 또는 기원전 88년 | |||
셀레우코스 제국 길르앗 | ||||
재위 | <colbgcolor=#000> 셀레우코스 군주 | |||
기원전 95년 ~ 기원전 92년 또는 기원전 88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 제호 | 안티오코스 10세 에우세베스 Antiochus X Eusebes | ||
가족 | 안티오코스 9세(아버지) 클레오파트라 4세(어머니)[1]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부인) 안티오코스 13세 아시아티코스(아들) | |||
참전 | 셀레우코스 내전, 파르티아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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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왕조의 23대 군주. 아버지 안티오코스 9세를 죽인 셀레우코스 6세를 폐위시킨 뒤 셀레우코스 6세의 동생들과 내전을 벌이다가 파르티아의 침공에 맞서던 중 전사했다.2. 생애
안티오코스 9세의 유일한 아들로, 어머니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클레오파트라 4세일 가능성이 높다. 안티오코스 9세와 클레오파트라 4세는 기원전 114년에 결혼했고, 안티오코스 10세는 왕위에 오를 때부터 성인이었으니, 113년경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96년 아버지가 셀레우코스 6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목숨을 잃자, 기원전 95년 아라두스로 가서 왕을 칭했다. 그는 동전 위에 '에우세베스'(Eusebes: 경건한 인간)와 '필로파토르'(Philopator: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라는 별칭을 새겼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사촌인 셀레우코스 6세가 보낸 암살자로부터 목숨을 구했는데, 시리아인들은 그의 경건함 덕분에 살아났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그를 사랑했던 창녀가 밀고해준 덕분이었다고 한다.그는 아버지 안티오코스 9세와 결혼했다가 안티오키아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온 계모[2]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했다. 키케로는 안티오코스 13세가 안티오코스 10세의 아들이라고 언급했다. 화폐학자 브라이언 크리드는 2002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공동 통치자의 초상화가 새겨진 주화 동전을 찾아낸 뒤, 이 새로 발견된 왕에게 '셀레우코스 7세'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하지만 동전의 상태가 심하게 손상되어 일부 글자를 읽을 수 없기에, '셀레우코스'라는 명칭을 거부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아르메니아의 명군이자 정복군주였던 티그라네스 2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죽인 뒤
"셀레우코스의 후계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사로잡았다."
라고 선언했다. 이에 따른다면, 안티오코스 10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의 사이에서 여러 아들과 딸을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키케로의 언급으로 전해지는 안티오코스 13세 외에 다른 아들들은 문헌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기원전 94년, 안티오코스 10세는 안티오키아로 진격하여 부친의 원수인 셀레우코스 6세를 킬리키아로 몰아냈다. 셀레우코스 6세는 몹수에스티아로 피신한 뒤 거기서 세금을 뜯어내려 했다가 민중의 폭동으로 피살되었다. 기원전 93년 초, 셀레우코스 6세의 형제들인 안티오코스 11세와 필리포스 1세가 몹수에스티아를 약탈해 형 셀레우코스 6세의 복수를 단행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11세는 안티오키아로 진격해 형의 원수인 안티오코스 10세를 몰아내고 몇달 동안 수도에서 통치했다. 안티오코스 10세는 병력을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했고, 기원전 93년 말 안티오코스 11세를 축출했다. 그는 셀레우코스 6세를 죽이는데 큰 역할을 하고 이로 인해 약탈을 당했던 몹수에스티아에게 보상하고자 자치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왕실의 내전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다마스쿠스에 할거한 데메트리오스 3세는 형제를 죽인 안티오코스 10세에게 복수하려고 들었다. 안티오코스 10세는 그와 몇년간 전쟁을 벌였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외세가 침략해왔다. 이 외세의 정체에 대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파르티아라고 했고, 아피아노스는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라고 했다. 현대 학자들은 여러 정황 증거와 고고학적 물증을 토대로,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10세는 길르앗의 여왕 라오디케가 파르티아와 싸우는 걸 도우러 갔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이 '길르앗의 여왕 라오디케'의 정체에 대해 많은 이론이 제기되고 있는데, 안티오코스 9세의 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일이 언제 벌어졌는지에 대해 기원전 92년이라는 설과 기원전 88년이라는 설이 제기되는데, 기원전 92년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이후 데메트리오스 3세가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의 화폐를 주조한 사실이 고고학적 증거로 확인된 걸 볼 때, 그가 안티오코스 10세의 뒤를 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주도권을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