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06 11:09:23

하마(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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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의 명물인 오론테스 강의 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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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 앗 딘 모스크

아랍어 [1] حماة
시리아어 [2] ܚܡܬ
히브리어 [3] חֲמָת‬>
영어 Hama
1. 개요2. 역사
2.1. 상고대 (vs 아시리아)
2.1.1. 성경에서
2.2. 헬레니즘 & 로마 시대
2.2.1. 크리스트교와 동로마 제국 시기
2.3. 이슬람의 도래2.4. 중세2.5. 근대2.6. 근현대 : 프랑스의 위임통치2.7. 독립, 그 이후 : 격랑의 소용돌이2.8. 현재 : 시리아 내전

1. 개요

시리아 중서부에 위치한 인구 50만의 도시로, 다마스쿠스, 알레포, 홈스에 이어 시리아에서 4번째로 큰 도시였다.[4]오론테스 강[5]변에 위치하며, 다마스쿠스로부터 북으로 213km, 홈스로부터는 46km 떨어져 있으며 알레포로 부터는 남쪽으로 120km 떨어져 있다. 하마 주의 주도이다.

히타이트 제국 시절에 설립되어 3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유구한 도시이며 구약 성경에도 자주 등장한다. 전쟁 이전까지 시리아의 농업, 면직업, 양모 산업의 중심지였다. 중세 시대부터 관개 농업과 정원 관리를 위해 쓰인 거대한 수차 17개와 장기 왕조가 세운 알 누리 모스크가 랜드마크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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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대, 고대 ( ~ 330년)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된다.

2.1. 상고대 (vs 아시리아)

하마 일대에는 기원전 1500년 이전부터 도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미탄니 제국과 히타이트 제국의 지배를 거쳐 신히타이트 연맹의 도시 국가 중 하나인 하마투와나로 알려졌다. 기원전 1000년 경부터 하마에서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시리아 서부 일대에는 아람인들이 거주했는데, 기원전 856년에 시리아 북부를 평정한 아시리아 제국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853년, 하마부터 다마스쿠스, 암몬, 이스라엘에 이르는 이른바 셈족 계열의 왕 12명이 연합하여 칼카르 전투에서 아시라아 군대에 맞섰다. 양군 도합 약 15만이 격돌한 대전투는 무승부로 끝났고, 이후로도 아시리아는 조금씩 레반트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기원전 743년, 아시리아 군대는 하마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였고 이후 하마는 그에 조공을 바치며 연명하다 결국 기원전 738년에 아시리아에 편입되었다.

기원전 720년, 아시리아의 이스라엘 정복을 틈타 하마는 독립을 쟁취했지만 사르곤 2세의 빠른 대처로 진압되었으며, 반란을 주도한 옛 왕은 화형에 처해졌고 시민들은 메소포타미아로 이주당했다. 이후 도시에는 서부 이란 출신의 이주민들이 유입되었다. 이후 하마는 한세기 간의 아시리아 지배를 거쳐 신바빌로니아 (칼데아), 그리고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의 수중에 들어긴다.

2.1.1. 성경에서

구약에서 하마는 하마스(...)로 불리며 가나안 인들의 도시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솔로몬 왕 대에 이스라엘 영토가 되었고 이후 상실했다가 여보로암 2세가 회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그 진위 여부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마에서 관련 유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

2.2. 헬레니즘 & 로마 시대

페르시아 시기를 거쳐 도시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아시리아에 의해 추방되었던 아람 인들이 돌아왔다. 이후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의 별명인 Epiphanes (신의 현신)를 하마의 새 이름으로 주었고 따라서 도시는 한동안 에피파니아 (Epiphania)라고 불리게 되었다.

2.2.1. 크리스트교와 동로마 제국 시기

로마제국 후기에 시리아 일대는 그리스도교가 다수가 되었고 교회가 다수 세워졌다. 동로마 시기에 도시는 에마스 (Emath)로 불렸고 사산 제국과의 전쟁을 기록한 6세기 말 ~ 7세기 초엽의 역사가 요안니스의 출생지였다.

2.3. 이슬람의 도래

638년, 우바이둘라가 이끄는 정통 칼리파 군대에 점령되며 '하마'라는 옛 이름을 회복했다. 이후 우마이야, 압바스, 함단 왕조의 지배를 거친 도시는 968년, 니케포루스 2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에게 함락되었고 이때 7세기에 지어진 대 모스크 (마스지드)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어진 파티마 왕조의 지배기에 하마는 독립을 시도했다가 그의 신하국인 미르다스 왕조에게 점령되어 약탈을 당했다. 이러한 수난기는 뒤이은 셀주크 제국의 통치와 십자군 시기까지 이어졌다.

2.4. 중세

1108년에 탕크레드가 이끄는 십자군이 점령했으나 1114년에 셀주크 제국이 수복하였다. 이후 하마는 기존의 알레포 대신 음쪽의 다마스쿠스의 관할이 되었고 셀주크의 신하국인 부리 왕조가 지배하였다. 도시는 1133년, 일식을 틈타 잠입한 십자군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되기도 하였고 1157년에는 지진으로 시가지가 일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1172년, 도시를 접수한 장기 왕조의 누르 알 딘은 시내 중심부에 자신의 이름을 딴 마스지드를 지었다.

3년이 지난 1175년, 살라딘이 하마를 접수하며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집트에서의 아이유브 조는 1250년에 맘루크 왕조에 의해 전복되었으나 하마에서 만큼은 아브 알 피다를 비롯한 아이유브 가문이 1342년까지 통치하였다. 그 이유는 하마에서 태어난 아이유브 가문의 장군 알 피다가 맘루크 왕조 하에서 십자군에 대한 재정복 전쟁에서 큰 공를 세웠기 때문이다. 1260년에 아인잘루트 전투와 1303년 마르즈 앗 사파르 전투를 앞둔 몽골군에게 도시가 약탈된 것 외에는 13 ~ 14세기의 하마는 안정을 유지하며 번영하였다.

시가지는 오론테스 강의 양안으로 확장되었고 구시가지 근교에 아이유브 아미르[6]의 이름을 딴 알 만수리야라는 신시가지까지 조성되었다. 수십개의 마드라사 (모스크)와 학교, 도서관, 병원, 시장, 그리고 도시의 랜드마크인 거대한 물레방아 (노리아스)가 세워진 도시는 시리아 중부를 대표하게 되었다. 1335년에 하마를 방문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나무와 과일이 가득한 정원들로 인해 쾌적한 도시였다고 기록하였다. 1400년, 하마는 다른 시리아 지역과 함께 티무르에게 점령되었고 이때 시타델이 파괴되었다.

2.5.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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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년, 맘루크 왕조가 셀림 1세의 오스만 제국에게 대패하며 하마를 비롯한 시리아는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다. 오스만 시대에 하마는 처음엔 알레포 관할에 속했다가 18세기 초에 다마스쿠스 관할로 바뀌었는데, 1742년에 다마스쿠스의 총독 (왈리)였던 아젬 가문의 아사드가 행궁으로 지은 궁전이 남아있다. 현재 하마 역사박물관으로 쓰이는 아젬 궁전이 바로 그것. 400여년에 걸친 오스만 시대에도 하마는 꾸준히 그 영향력을 유지했다. 1858년, 하마의 인구는 3만명이었고 시내에는 14개의 카라반사라이가 있었다. 1864년, 도시는 신설된 하마 산작의 치소가 되었다.

2.6. 근현대 : 프랑스의 위임통치

1918년, 하심 가문의 아랍 군대와 영, 프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시리아를 점령했다. 하지만 당초 약속과는 달리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 통치령으로 전락했고 자원을 수탈당했다. 그러던 1925년, 시리아 남부의 드루즈 지도자들이 구속당하는 일을 계기로 시리아 대봉기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하마에서도 이슬람 주의자들의 주도로 시민군이 프랑스 분견대를 몰아내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5일, 프랑스 군이 도시를 폭격하여 시가지 일부가 파괴되고 민간인 3백여명이 희생되자 아젬 가문 등 원로 인사들이 성문을 나가 프랑스 측과 협상하여 더이상의 출혈을 막았다. 2주 후 다마스쿠스의 봉기군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대학살을 당해 큰 피해를 입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2.7. 독립, 그 이후 : 격랑의 소용돌이

1946년, 시리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는 혼런스러웠으며 당시 시리아 제 3의 도시였던 하마는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후에 바트당으로 합쳐지는 아랍 사회당이 하마에서 생겼고 1963년에 토지 개혁이 일어났다. 1964년, 바트당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에도 하마는 그 중심이었다. 봉기는 정부군의 탱크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후 하마는 반정부 지역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2.7.1. 하마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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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알 누리 모스크
무슬림형제단의 반정부 봉기의 중심이 되어 이슬람 원리주의의 해방구가 되었으나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마 학살 문서 참고.

2.8. 현재 : 시리아 내전

2011년, 아랍의 봄과 함께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에서 하마는 또다시 반정부 기류의 거점이 되었다. 정부군의 가혹한 진압으로 2백여명이 희생되었고 2012년까지 하마 시와 그 근교에서 수십명 단위의 학살이 있었다. 그 후로는 다행히 큰 인명피해 없이 정부군 수중에 남아있는 상태이다.

2023년 튀르키예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


[1] 발음 : Ḥamāh‎[2] 발음 : Ḥmṭ‎, 성채를 의미[3] 발음 : Ḥamāth[4] 시리아 내전을 거치며 인구가 급감했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다.[5] 로마 시대 시리아 속주의 중심이었던 안티오키아 (현재 터키의 안타키아)를 지나는 강으로 유명하다.[6] 아마 1244년부터 무려 40년간 통치한 알 만수르 2세로 추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