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1 07:38:59

제자르 파샤

오스만 시기 아크레 기반 군벌
자히르 알 우마르 아흐마드 제자르 파샤 술레이만 파샤
파일:제자르 파샤 오스만.jpg

1. 개요2. 생애
2.1. 이집트의 알리 베이 휘하2.2. 베이루트 공방전2.3. 집권2.4. 세력 확장
2.4.1. vs 유수프 시하브2.4.2. 남레바논 쉬아 세력 일소2.4.3. 북레바논 평정2.4.4. 다마스쿠스 총독
2.5. 세력 유지
2.5.1. 맘루크 반란과 유수프 제거2.5.2. 다마스쿠스 총독2.5.3. vs 바시르 시하브
2.6. 나폴레옹 전쟁
2.6.1. 아크레 공방전 (1799년)
2.7. 말년
2.7.1. 레바논 개입과 실패2.7.2. 야파 문제와 반란2.7.3. 다마스쿠스 총독2.7.4. 죽음과 사후 혼란
3. 평가4. 정치와 군대5. 경제와 종교6. 건축

1. 개요

오스만어 جزّار أحمد پاشا
아랍어 أحمد باشا الجزّار

오스만 제국 하에서 1776 ~ 1804년 아크레를 중심으로 레반트 해안을 지배한 보스니아계 튀르크 군벌. 기존에 일대에서 자립을 꾀하던 자히르 알 우마르를 배신, 그의 토벌을 도운 후 시돈 총독으로 봉해진 것을 시작으로 1785년부터는 비정기적으로 다마스쿠스 총독을 맡는 등 시리아 일대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자히르의 아들들, 드루즈 산지의 아미르 유수프 시하브, 자발 아밀의 쉬아 셰이크 나시프 앗 나사르 등 토착 세력들을 전부 격파 혹은 복속시킨 그는 1789년 휘하 맘루크 반란을 진압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1799년에는 나폴레옹의 아크레 침공 역시 영국 해군의 도움으로 격퇴하며 유럽에까지 명성을 떨쳤다. 자히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고, 아크레에 많은 건물들을 세웠다. 그러나 전임자와 달리 제자르 파샤는 타종교에 그리 관대하지 않았고, 높은 세금으로 내륙의 농민들이 타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아크레, 베이루트 등의 항구들은 번영하였으며 다마스쿠스에 견주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2. 생애

1730년경 보스니아에서 기독교도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부터 각지를 전전하였다. 고향을 등진 원인에 대한 여러 설이 있는데, 16세의 나이에 형수를 강간했거나 17세에 자신을 거절한 여인을 칼로 찌른 후 고향을 떠났다고도 한다. 선원으로 일하던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아나톨리아를 떠돌았는데, 우연히 총독 헤키모을루 파샤의 눈에 들어 그의 이발사가 되었다. 1756년 이집트 총독으로 봉해진 헤키모을루 파샤를 따라 카이로로 향한 그는 시타델에 머물렀다. 그 무렵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흐마드로 개명한 그는 이듬해 헤키모을루 파샤가 전임된 후에도 계속 이집트에 머물렀다. 다른 설에 의하면 그는 터키인 노예상에게 스스로를 팔아 이집트에 당도했다고도 한다. 여하튼 1758년 아흐마드는 메카 순례단의 일원이 되어 순례를 행하였고, 도중 아미르 알 핫즈 (순례 감독관)인 맘루크 살리흐 베이 알 카시미와 친해진 아흐마드는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경력을 쌓으며 알 부스나위 (보스니아인)로 알려진 아흐마드는 다른 맘루크인 압둘라 베이의 휘하에 들어갔고, 그를 섬기며 아랍어와 맘루크 체계를 익혔다.

2.1. 이집트의 알리 베이 휘하

그러던 1760년 무렵, 사실상 부친으로 여기던 압둘라 베이가 제다 부근 베두인들의 습격으로 살해당하자 복수에 나선 아흐마드는 해당 베두인들을 매복하여 70여명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이후 그는 아랍어로 '도살자'라는 의미인 알 자자르라는 별명을 지니게 되었고,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높게 여긴 다른 맘루크들의 지지에 따라 그 역시 맘루크가 되었다. 그리고 압둘라 베이의 상관이자 1764년 이집트의 실권자로 등극한 알리 베이 알 카비르 역시 그 충성심에 주목하여 아흐마드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1알리 베이는 아흐마드를 카이로의 산작 베이 (태수)로 삼았고, 이후 그의 정식 명칭은 아흐마드 '베이' 알 자자르가 되었다. 알리 베이의 정권 하에 아흐마드는 카이로의 법과 질서를 담당하는 행정관임과 동시에 주군의 정적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 주요 암살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던 1768년 9월 알리 베이는 자신의 경쟁자라 여긴 맘루크 살리흐 베이에 대한 암살을 지시하였다.

아흐마드는 옛 주군이자 친구인 살리흐 베이를 해치고 싶지 않았고, 몰래 그에게 명령을 누설하였다. 그러나 동맹이자 가까운 벗인 알리 베이가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라 믿지 않은 살리흐 베이는 아흐마드의 경고를 무시하고 알리 베이를 찾아가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알리 베이는 음모를 부인하고 단순히 아흐마드의 충성심을 시험한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얼마후 살리흐 베이는 암살자들의 매복에 당해 살해되었고, 그 일원이던 아흐마드는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다. 동료 암살자인 아부 앗 다하브는 알리 베이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보복을 두려워 한 아흐마드는 가솔들에게 누군가 자신에 대해 묻는다면 아파서 손님을 맞이할 수 없다고 말하도록 지시한 후 마그레브 복장을 하고 카이로를 탈출하였다. 알리 베이는 그가 이스칸다리야 항구로 향한다는 소식에 그를 추격하게 하였지만, 아흐마드는 추격대가 당도하기 불과 몇시간 전에 코스탄티니예로 향하는 선박에 오르는데 성공하였다.

2.2. 베이루트 공방전

이후 1770년까지 그의 행적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연대기 작가 알 자바르티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로 돌아가 베두인들과 함께 알리 베이와 맞섰으나 시리아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1770년 아흐마드는 레바논 산지의 데이르 알 카마르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식량을 구하기 위해 옷을 팔 정도로 빈곤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를 눈여겨본 드루즈 공동체의 아미르 유수프 시하브가 보호해준 덕에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운을 차린 아흐마드는 레반트 해안과 다마스쿠스에서 일자리를 모색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아르메니아인으로 변장, 재차 이집트로 향하여 카이로 북부 아즈바키야에 있는 옛 집에서 재산을 챙겨 돌아왔다. 한편 그 무렵 1771년 다마스쿠스 총독 우스만 파샤 알 와킬을 격파한 아크레의 군벌 자히르 알 우마르의 세력이 점점 확장되고 있었다. 1772년, 이집트에서 축출된 알리 베이와 합류한 자히르는 시돈을 공격한 유수프 시하브에 대한 반격으로 동맹인 러시아 함대를 불러 베이루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유수프는 우스만 파샤에게 베이루트 수비 강화를 의뢰하였고, 후자는 아흐마드를 파견하였다.

마그레브 용병대와 함께 베이루트의 무하피즈(Muhafiz)로 부임한 아흐마드는 도시를 요새화하였다.
무하피즈(Muhafiz)는 튀르키예어로 수호자라는 뜻이다.
한편 이집트의 새 실권자 아부 앗 다하브는 옛 경쟁자인 아흐마드를 죽인다면 20만 스페인 리알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유수프는 이를 거절하는 등 양측의 관계는 가까웠다. 그러나 이내 야심을 드러낸 아흐마드는 베이루트를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으려 하였고, 결국 상호 대립하게 되었다. 유수프로부터 베이루트 퇴거를 요구하였으나 아흐마드는 제국이 부여한 수비 임무를 명분으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였고, 이에 전자는 우스만 파샤에게 고발하였다. 그러나 아흐마드가 (우스만 파샤의 원수이기도 한) 자히르로부터 도시를 잘 방어할 것이고, 그곳을 기반으로 반격에 나설 것을 계획하던 파샤는 유수프의 요청을 일축하였다. 분노한 유수프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베이루트로 진군하였으나, 아흐마드는 분열된 드루즈 부족들을 매수하고 이간질시켜 적군을 와해시켰다. 좌절한 유수프는 기존의 적이던 자히르와 동맹였고, 후자는 재차 러시아 함대의 지원을 얻어내었다. 1773년 7월 6일, 러시아 함대는 베이루트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유수프와의 협상 후 러시아 함대는 8월 2일부터 베이루트를 포격하였다. 항구 일대가 파괴되고 인근 50km 까지 포성이 들릴 정도로 심한 포격이었지만 아흐마드는 항복을 거부하고 버텼다. 이에 러시아 군이 포와 함께 상륙하여 도시를 포위 공격하였고, 수륙 양면으로 봉쇄에 나섰다. 9월 우스만 파샤가 보낸 원군은 자히르에게 격파되었다. 그후 아흐마드는 항복 협상에 나섰고, 러시아 혹은 유수프가 자신을 처형할 것을 염려하여 자히르에게 본인과 수비대의 안전 보장을 받은 후 항복하였다. (1773년 10월 10일)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수적, 질적으로 우세한 러시아 군을 상대로 3개월이나 버틴 것은 그의 명성을 드높혔다. 8백 마그레브인 수비대와 함께 아크레로 호송된 아흐마드는 자히르의 휘하에 들어갔다. 자히르는 그에게 자파-예루살렘의 미리 (핫즈 카라반의 세금) 징수를 맡겼다. 그러나 이미 오스만 측으로의 전향을 결심한 아흐마드는 예루살렘의 산작베이 이브라힘 파샤에게 투항하려 하였고, 그가 도시를 점령하려는 자히르의 간계라 의심하며 거절하자 다마스쿠스로 향하여 징수한 세금과 함께 우스만 파샤의 휘하에 들어갔다.

2.3. 집권

다마스쿠스에서 환영을 받은 아흐마드는 코스탄티니예로 향하였고, 그의 카리스마에 감화된 술탄 압뒬하미트 1세로부터 아나톨리아의 아프욘 산작베이 (태수)로 봉해졌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포르테 (조정)으로부터 정식 관직에 임명되었다. 1775년, 러시아와 휴전한 조정은 그동안 시리아 총독에게 일임한 자히르에 대한 토벌에 중앙군을 동원하여 직접 나섰다. 그해 봄 이집트의 아부 앗 다하브가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하산 카푸단 파샤 휘하의 신식화된 해군이 파견되었고, 8월 22일 자히르는 아크레 근교에서 전사하였다. 9월, 술탄은 아흐마드를 아크레의 무하피즈 (수비대장)로 봉하였다. 하산 파샤는 아크레를 떠나기 전 아흐마드에게 도시를 넘겨주었고, 이후 그의 거점이 되었다.

코스탄티니예의 연줄을 이용한 아흐마드는 1776년 3월 와지르 직위를 제수받았고, 비록 왈리 (총독)는 아니지만 시돈 에얄레트에 대한 행정권을 얻었다. 그 직후에는 파샤 칭호를 얻었고, 이때부터 '제자르 파샤'로 불리게 된다. 부임 직후 제자르 파샤의 지배력은 아크레 일대에 국한되었고, 자히르의 아들들이 갈릴리 각지에 웅거하며 적대하였다. 그중에서도 험준한 데이르 한나를 거점으로 저항하던 알리가 가장 큰 골칫덩이였다. 1776년 봄 티레를 방문한 제자르 파샤는 현지 쉬아 유지의 환영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기존 자히르의 동맹이던 아밀 산지의 쉬아 족장 나시프 앗 나사르가 복속을 표하였다. 초여름 무렵 하산 파샤가 증원 병력과 아크레로 돌아오자 제자르 파샤는 그와 함께 데이르 한나를 포위하였다. 격전 끝에 7월 22일 성채는 항복하였고, 티베리아스로 도주하던 알리는 살해되었다. 이로써 자히르 세력의 잔당은 소멸되었고, 제자르 파샤는 아크레 ~ 사파드 일대를 장악하였다.

2.4. 세력 확장

파일:아크레 오스만.jpg
1781년 그가 직접 설계한 아크레의 제자르 파샤 사원

갈릴리 지역에 이어 제자르 파샤는 레반트 지역의 다른 자치 세력인 드루즈 공동체의 시하브 가문과 맞섰다. 힘의 균형과 상호 견제를 원했던 하산 파샤는 드루즈 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그들에 대한 시돈 총독의 권력은 미리 (핫즈 세금) 징수에 국한되었음을 명시하였다. 그러나 1776년 여름 제자르 파샤는 아미르 유수프에게 3년치 미리를 미리 납부할 것을 명하고, 후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베이루트를 점령해버렸다. 이후 그는 유수프에게 이번에는 (그가 이미 하산 파샤에게 납부했음에도) 시돈 소유를 대가로 연공을 낼 것을 요구하였고, 그해 8월 제자르 파샤와 나시프 쉬아 연합군은 드루즈 군대와 대치하였다. 가을 무렵 티레의 쉬아 셰이크 쿠블란의 중재로 세금 문제는 일단락되었고, 오스만 함대의 개입으로 베이루트는 유수프에게 반환되었다.

한편 시돈 에얄레트의 정식 총독으로 임명되기 위해 뇌물 공작 및 반란 선회 위협 등을 펼친 제자르 파샤는 마침내 1777년 5월 왈리로 임명되었다. 다만 그는 시돈 대신 아크레를 중심으로 삼았다. '시돈' 에얄레트였음에도 시돈 대신 아크레를 중심지로 삼은 것은, 후자가 자히르 통치기를 지나며 번영한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유사시를 대비한 거대한 성벽과 시타델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총독들의 현지 세력화를 통한 자립 혹은 반란을 경계한 오스만 조정은 조속히 그들을 교체하였고, (또한 임명을 위한 뇌물을 얻기 위함도 있음) 따라서 제자르 파샤는 조정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장기 지배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하기 위해 아크레를 요새화하였다. 지위를 공고히 한 제자르 파샤는 다시 시하브 가문과의 대립에 나섰다.

2.4.1. vs 유수프 시하브

1777년 제자르 파샤는 아미르 유수프와의 대립에 있어 다마스쿠스 총독 무함마드 파샤 알 아젬과 후자의 아들이자 트리폴리 총독인 유수프 파샤 알 아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힘의 균형을 깨고 싶지 않던 그들은 시하브 가문의 충성심과 성실한 납세를 거론하며 거부하였다. 이에 단독 행동에 나선 제자르 파샤는 시돈에 주둔하는 마그레브 부대의 지휘관 무스타파 이븐 카라 물라를 드루즈 산지로 파견, 세금을 걷고 유수프를 죽이게 하였다. 사실상 약탈에 나선 무스타파는 격퇴되어 시돈으로 후퇴하였다. 재차 공격에 나선 그는 방비가 덜한 동쪽에서 공격하기 위해 베카 협곡으로 우회하였고, 일대의 수확물을 압수한 후 드루즈 군대의 추격을 뿌리치며 귀환하였다. 이로써 드루즈 공동체 내부에선 아미르 유수프의 능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던 1778년 유수프의 동맹이던 알리 줌블라트가 사망한 후 줌블라트 부족은 아부 나카드 등 여러 드루즈 가문들과 함께 유수프를 폐위하고 그의 동생 사이드 아흐마드와 아판디를 추대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유수프는 쇼우프에서 해안의 가지르로 후퇴하였고 수니파인 라아드와 쿠르드계 미리비 가문의 도움으로 저항하였다. 그해 9월 반군은 레바논 산지의 수조권을 대가로 제자르 파샤에게 5만 키르쉬를 바치며 도움을 청하였다. 이를 수용한 제자르 파샤는 베이루트를 거쳐 북상, 주바일 (비블로스)에서 유수프를 포위하였다. 유수프는 다른 동생 무함마드와 트리폴리 총독 유수프 파샤의 도움으로 포위를 버텨내었고, 결국 제자르 파샤에게 10만 키르쉬를 바치는 대가로 아미르 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자르 파샤는 동맹 나시프에게 아흐마드와 아판디를 습격하게 하여 유수프의 쇼우프 수복과 드루즈 산지 통합을 도왔다. 다만 복위 몇달 후 잠재적 경쟁자인 친척들을 숙청하며 자신감을 얻은 유수프가 세금을 납부하지 않자 대립이 재개되었고, 제자르 파샤는 그를 폐위시켰지만 일시적인 것에 그쳤다. 한편 1780년 에펜디가 전사하자 아흐마드는 줌블라트, 야즈바크 동맹군을 모아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유수프가 30만 키르쉬로 야즈바크를 매수하자 반군은 붕괴되었다. 이후 제자르 파샤는 다마스쿠스 총독 무함마드 파샤 알 아젬과의 대립에 나섰다.

2.4.2. 남레바논 쉬아 세력 일소

1780년 제자르 파샤는 나시프와 함께 무함마드 파샤와 대치하여다. 1781년 5월 나시프는 무함마드 파샤의 공격을 격퇴하였는데, 이로써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제자르 파샤가 그를 시기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나시프의 거점인 후닌 (티브닌) 현지 쉬아 셰이크의 요청에 제자르 파샤가 휘하 맘루크 장교 살림 파샤 알 카비르에게 3천 병력을 주어 파병하자 양측의 갈드이 폭발하였다.[1] 9월 23-24일 야룬에서 벌어진 3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나시프와 470여 메타왈리 기병대는 전사하였고, 이후 제자르 파샤는 아밀 산지에 대한 원정에 착수하였다. 그에 따라 대다수의 현지 쉬아 셰이크들이 살해되었고, 쉬아 자치 세력의 최후의 거점이던 샤키프 아르눈 (보포르) 성채가 항복하며 일대는 평정되었다. 제자르 파샤는 성채의 주민들을 해치지 않았고, 쉬아 잔존 세력은 베카 협곡의 쉬아 세력인 하르푸쉬 부족 측으로 망명하였다.

쉬아 공동체의 와해 이후 드루즈 군대가 아밀 산지의 여인들과 다른 포로들을 잡아 시돈의 제자르 파샤에게 노예로 바쳤고, 하스바야[2]의 드루즈 영주 이스마일 시하브는 보호를 대가로 생존자들을 수탈하였다.[3] 현지 성채들은 크게 파손되었고 많은 약탈이 가해졌다. 10월 중순 나시프의 아들 아키드가 부흥 운동을 펼쳤으나 패주하였고, 이를 마지막으로 3세기간 이어진 아밀 산지의 쉬아 자치령은 붕괴되었다. 기존에 쉬아 세력이 이용하던 티레 항구는 제자르 파샤의 직할령으로 귀속되었다. 한편 오스만 조정은 서사적인 편지를 통해 제자르 파샤의 승리를 축하하며 '불결한 존재의 일소'에 대한 치하와 함께 제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중부 드루즈 산지에는 유수프와 제자르 파샤의 불안한 동맹이 이어졌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하였다.

2.4.3. 북레바논 평정

파일:아크레 오스만 칸.jpg
이 무렵인 1784년 지어진 칸 알 우마단

1783년 제자르 파샤는 마르즈 아이윤의 영주이자 유수프의 외숙인 이스마일을 유대 상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씌워 고발하였고, 유수프가 일대를 장악하게 하였다. 다만 이스마일이 더 많은 세금을 약속하자 제자르 파샤는 다시 그의 영지를 돌려주었고, 아흐마드 및 줌블라트 부족과 동맹하였다. 이에 따라 내전에서 패배한 유수프는 북쪽의 누사이리 산지로 도주하였다. 그후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에게 베이루트로 돌아온다면 안전 보장을 약속하였다. 유수프는 이에 응하였으나 곧장 체포된 후 아크레로 압송되어 감금되었다. 아흐마드와 이스마일은 제자르 파샤에게 유수프를 처형하라며 50만 키르쉬를 건내었으나 유수프는 석방을 대가로 100만 키르쉬를 제안하였다.

늘상 이익에 따라 움직이던 제자르 파샤는 후자의 제안을 택하였고, 레바논 산지로 귀환한 유수프는 이스마일을 체포하고 줌블라트 부족에 막대한 속죄금을 내게 하였다. 이스마일은 곧 옥사하였고, 제자르 파샤가 약속된 보석금 납부를 압박하기 위해 인질로 삼은 유수프의 심복 사드 알 쿠리 역시 병사하였다. 그러던 2년 후 1783년 내전에서 패배한 유수프는 베이루트로 온다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제자르 파샤의 제안에 따라 도시로 향하였으나, 당도 직후 체포되어 아크레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유수프는 제자르 파샤에게 복위시 막대한 배상금 납부를 약속해 석방된 후 드루즈 산지로 돌아가 재집권하였다. 레바논 일대에 대한 패권을 확립한 제자르 파샤는 다마스쿠스 총독위를 노렸다.

2.4.4. 다마스쿠스 총독

1783년 경쟁자 무함마드 파샤의 죽음 후에 다마스쿠스 총독에 임명되려는 제자르 파샤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다만 오스만 조정은 2년간 3명의 총독들을 연이어 선임하였음에도 모두 무능하다고 판단되었고, 결국 관료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친 제자르 파샤를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1785년 3월) 동시에 그의 원로 맘루크이자 재무관인 셀림 파샤 알 카비르를 자신의 후임 시돈 총독으로 봉해지게 하며 기존 근거지에 대한 통제력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원로 맘루크 술레이만 파샤를 트리폴리 총독에 봉하여 사실상 시리아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4월 중순 제자르 파샤는 군세를 과시하며 아크레를 떠나 다마스쿠스에 부임하였다. 부임 직후인 6-7월에 걸쳐 그는 아미르 알 핫즈 (순례 사령관)으로서 5천의 병력을 대동하고 관내의 미리 (순례 세금)를 걷기 위한 다우라 (과세 행진)를 행하였다.

그의 다우라는 전보다 가혹하다 여겨졌고, 기근과 역병이 겹친 팔레스타인에선 많은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 유랑민이 되었다. 다우라 도중 제자르 파샤는 나블루스 현지 투칸 가문을 격파하고 헤브론 일대까지 지배력을 확립, 예루살렘에 기존 니므르 가문 대신 휘하 맘루크인 카심 베이를 무타살림 (조세 징수관)으로 봉하였다. 이렇게 무력으로 팔레스타인을 굴복시킨 제자르 파샨는 10월 핫즈 카라반을 이끌고 다마스쿠스를 떠났다. 한편 그해 오스만 조정은 제자르 파샤에게 이집트의 무라드 베이 휘하 맘루크 정권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조언을 구하였고, 이에 그는 1만 2천 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해 지배력을 회복하고 현지 경험이 있는 총독을 임명할 것이며 정기적인 보너스로 병사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것을 제안하였다.

따라서 1786년 하산 파샤가 파견되어 이집트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듬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귀환하였고, 얼마후 맘루크 정권이 복귀하였다. 그해 1월 순례에서 돌아온 제자르 파샤는 하우란 지역의 곡물을 아크레로만 운송하게 하는 독점에 나섰고, 기존에 하우란의 곡식을 구매하던 다마스쿠스 상인들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제자르 파샤의 세력 확장을 겨계하던 조정은 이를 명분 삼아 해임을 통보하였고, 제자르 파샤는 저항하는 대신 (로비와 협상 끝에) 시돈 총독위에 만족하고 1년만에 아크레로 돌아갔다. 다만 이듬해 13년만에 오스만-러시아 전쟁이 재발하자 제자르 파샤는 조정의 파병 요구에 레반트 해안의 안정 유지를 핑계로 회피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는데 치중하였다.

2.5. 세력 유지

파일:아크레 사라이.jpg
반란의 발단이 된 아크레의 사라이 (관저)

2.5.1. 맘루크 반란과 유수프 제거

1788년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에게 5년 전의 보석금 납부 이행을 촉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제자르 파샤는 유수프의 경쟁자이던 이스마일의 아들 알리 시하브의 반란을 지원하였고, 이로써 레바논 산지는 재차 내전에 돌입하였다. 1789년 5월 4일 제자르 파샤는 원로 맘루크 지휘관인 살림 파샤 앗 사기르를 2천 기병과 함께 하스바야로, 술레이만 파샤에게 8백 보병과 함께 해안로를 통해 레바논 산지로 파견해 과세를 강행하게 하였다. 당시 프랑스 영사 장 피에르 르노도에 의하면 이러한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병력 동원은 사실 드루즈 측에 맞서느라 러시아와의 전쟁에 파병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조정에게 보이려 하는 의도였다고 한다. 다만 5월 8일 휘하 맘루크 중 일부가 자신의 하렘 여인들과 간통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제자르 파샤는 분노하여 사라이와 하렘이 위치한 아크레의 시타데에 배치된 맘루크들의 팔을 자르게 하고 혐의가 인정된 여인들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이번 기회에 맘루크 숙청에 나선 제자르 파샤는 다음날에도 30여명의 (동향) 보스니아인 병사들로 다수의 맘루크들을 체포해 일부를 처형하였다. 이러한 처사에 아크레의 맘루크들은 반란에 나섰고, 유수프의 지원을 받아 아크레 시타델의 보물고에서 농성하였다. 자신이 총애하던 시종이 처형된 것에 분노한 살림 파샤의 동생인 재무관 역시 분노하여 투옥된 맘루크들을 석방하고 반군에 합류하였다. 시타델의 맘루크들은 배치된 대포들의 포구를 사라이로 향하고 그를 파괴하겠다며 협박하였다. 대치가 이어지자 아크레의 무프티 (성직자)가 중재에 나섰고, 제자르 파샤는 80여 맘루크 반군들이 무기와 말을 소지한 채로 도시를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아크레에 남은 미성년 맘루크들은 살해되거나 이집트로 추방되었다. 재무관의 지휘 하에 아크레를 떠난 나머지 맘루크들은 북상하여 살림 파샤와 술레이만 파샤와 합류하였다. 양측 간의 협상이 결렬되자 맘루크들은 유수프와 휴전, (살림 파샤를 죽이라는 제자르 파샤의 명을 거부한) 베이루트의 마그레브 부대 지휘관인 알 주바리와 동맹하였다.

반군은 손쉽게 시돈을 장악, 거점으로 삼은 후 아크레를 남하하였다. 티레에 이르러 처음으로 저항에 맞딱드린 반군은 도시를 점령하였고, 지휘관들의 통제에서 벗어난 맘루크들은 약탈을 저질렀다. 티레의 비보를 접한 아크레의 여론은 제자르 파샤의 지배에 반감을 품고 살림 파샤를 선호하던 이들마저 저항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한편 제자르 파샤는 대부분의 군대로부터 외면당한 채 주와크 우스만이 지휘하는 고작 2백여 알바니아 부대만을 지니고 있었다. 6월 3일, 물라 이스마일 휘하의 하마 출신 쿠르드 기병대를 포함한 1200에 달하는 반군은 아크레 평원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만 그들은 공성전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없었고, 제자르 파샤는 막간을 틈타 시내의 공공 노동자들과 장인들을 무장시켜 수비대를 급조하였다. 아크레의 카디 셰이크 무함마드의 조언에 따라 제자르 파샤는 적진에 대한 야습을 결정함과 동시에 패전 시를 대비하여 항구에 도주용 선박을 대기시켰다. 밤이 되자 수비대는 성벽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습격에 나섰고,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맘루크들은 5시간의 전투 끝에 패주하였다.

살림 & 술레이만 파샤는 드루즈 산지를 거쳐 다마스쿠스로 도주, 제자르 파샤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 맘루크 반란은 제자르 파샤에게 있어 가장 큰 군사 & 정치적 위기였고, 그간 세력 기반으로써 양성해온 맘루크 군부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고 여긴 제자르 파샤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지니게 되었고, 진압 이후 대대적인 숙청에 나서 전 계급에 걸친 처형과 추방을 일삼았다. 19세기의 연대기 작가 하이다르 아흐마드 시하브는 반란의 결과 제자르 파샤는 '길들여지지 않은 동물처럼 변하였고 세상이 자신과 맞선다고 여겼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제자르의 반란 진압 직후 알리 시하브는 베카 협곡에서 총공세에 나섰으나 유수프의 동생 하이다르에게 격퇴되었다. 반란을 지원한 유수프에 대한 복수에 불탄 제자르 파샤는 친히 출정하였고, 그와 알리의 2천 연합군은 베카 협곡 남부 주브 자닌에서 유수프를 격파하였다.

트리폴리로 도주한 유수프는 사임 의사를 밝혔고 드루즈 셰이크들은 그의 사촌인 마론파 기독교도 바시르 2세를 추대하였다. 1789년 9월 바시르는 아크레로 향하여 복속하였고, 제자르 파샤는 그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한편 그 사이에 비블로스 등지에서 세력을 모은 유수프는 복위를 꾀하였다. 이에 바시르는 줌블라트 부족과 제자르 파샤가 빌려준 1천 알바니아-마그레브 용병을 모아 진군, 레바논 북부 무나이타라 구릉에서 유수프를 격파하였고 후자는 트리폴리 총독의 비호를 받으며 도주하였다. 그후 제자르 파샤는 재차 유수프에게 항복한다면 아미르 복위를 돕겠다고 제안하였고, 이에 그는 아크레로 당도하였지만 역시나 연금 상태에 놓였다. 이후 그가 레바논 산지의 부족들 간에 혼란만을 초래할 것이라는 바시르의 설득으로 제자르 파샤는 1790년 결국 유수프를 처형하였다. 이로써 15년에 걸친 둘의 애증 관계는 막을 내렸다.

2.5.2. 다마스쿠스 총독

1790년 10월 제자르 파샤는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다마스쿠스 시타델은 기존 총독 이브라힘 델리 파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아흐마드 아가 앗 자파란지 휘하의 예니체리와 미단 지구의 아가와트 (민병대장들) 휘하 반군의 수중에 있어 위기였다. 다만 반란은 이브라힘 델리 파샤가 하마에서 데려온 용병대와 레바논 산지의 드루즈 병력들로 시타델을 포위, 성직자들과 물라 이스마일 휘하 다마스쿠스 주둔 쿠르드 기병대의 중재로 예니체리 세력이 항복하며 일단락되었다. 첫 임기와 달리 제자르 파샤는 임지로 가는 대신 아크레에 남았고, 참모들 중 하나인 무함마드 아가를 무타살림 (징세관) 혹은 카이마캄 (부총독)으로 삼아 자신 대신 다마스쿠스의 행정을 맡겼다. 그를 통해 제자르 파샤는 다마스쿠스와 하우란 지역의 곡물 교역을 독점하고 아크레에서 수출할 수 있었다. 제자르 파샤는 시돈 총독위를 유지하며 다마스쿠스 총독으로써는 핫지 카라반을 이끄는 역할만을 수행하였다.

한편 18세기 말엽 다마스쿠에선 북부, 남부의 민병대 세력끼리 이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중 북부 세력은 제자르 파샤와 숙적인 아젬 가문의 오랜 동맹이었고, 이에 제자르 파샤는 1786년 곡물 독점에 반발하여 그의 해임 요청에 가담했던 전력에도 불구하고 남부 세력과 동맹하였다. 여기에 아크레와 다마스쿠스의 유대 상인들까지 합세한 상업 동맹은 시리아 남부 곡물의 운송과 수출을 독점하였고, 종종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각지에서 징세관으로 임명되었다. 제자르-아젬 갈등은 제자르 파샤의 명으로 다마스쿠스의 무함마드 아가가 옛 총독 무함마드 파샤의 아들 알리 베이 알 아젬을 독살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며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제자르 파샤는 반란 후 사면된 아흐마드 아가 앗 자파란지를 아젬 가문의 근거지인 하마의 징세관으로 봉하였다. 다만 이내 앗 자파란지의 북부 출신 및 군부에서의 인기를 경계한 제자르 파샤는 1791년의 핫지 카라반과 출정하기 전에 무함마드 아가로 하여금 그를 처형하게 하였다. 그외에도 무슬림 학자, 민병대장 등 도시의 여러 유력자들이 제자르 파샤의 5년 임기 동안 처형되거나 옥사하였다.

희생된 무슬림 학자들 중에는 4대 순니 마드하브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고[4] 아젬 가문과 연관이 있던 하나피 법하파의 세 무프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한 숙청을 전면에서 지휘한 무함마드 아가는 악명이 높았고, 1794년 제자르 파샤는 그를 미단 지구 시나니예 사원의 회계관 아흐마드 아가로 대체하였다. 같은해 제자르 파샤가 핫지 카라반을 이끌던 중 아흐마드 아가는 파샤의 명을 어기고 현지 유대 상인들의 이권을 침해하였고, 제자르 파샤가 순례에서 돌아오자 도주하였다. 2번째 다마스쿠스 총독 임기동안 제자르 파샤는 사실상 자치 지역이던 나블루스 산지의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해 현지 자라르, 니므르 가문과 지속적으로 싸웠다. 그는 투칸 가문을 동맹으로 선택, 1794년 무사 베이 투칸을 나블루스의 징세관으로 봉하였다. 이에 자라르 가문이 반발하자 제자르 파샤는 그들의 거점인 사누르 성채를 포위하였으나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이듬해 제자르 파샤는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장악을 이루지 못한채 다마스쿠스 총독에서 해임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경쟁자인 압둘라 파샤 알 아젬이 부임하였다.

2.5.3. vs 바시르 시하브

한편 레바논 산지의 바사르 시하브와 제자르 파샤와의 우호 관계는 관계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후자의 성향으로 인해 이내 틀어졌다. 드루즈 공동체에서 줌블라트의 라이벌인 야즈바키 가문은 제자르 파샤에게 뇌물을 바쳐 바시르 대신 유수프의 조카 카단과 하이다르를 아미르로 봉하게 하였다. 얼마후 유수프의 아들 후세인, 사드 앗 딘의 무답비르 (후견인) 지르지 바즈가 카단과 하이다르를 설득해 비블로스 수조권을 얻어내었다. 이에 바시르는 카단, 하이다르가 아크레에 약속한 조세 징수에 나서는 것을 막았고 결국 제자르 파샤는 바시르를 도와 바즈와 야즈바키 가문에 맞섰다. 이로써 바시르는 복위하였지만 1794년 바시르가 납세를 거부하자 제자르 파샤는 재차 바즈와 후세인, 사드 앗 딘을 지원하였다.

다만 바즈에 대한 현지 반발로 1795년 제자르 파샤는 다시 바시르를 지지하게 되었고, 후자는 복위하였다. 이렇게 관계가 정상화되나 싶었지만 1797년 바즈는 카단과 하이다르로 하여금 제자르 파샤에게 봉신 서약하게 하며 재차 그의 신임을 얻었다. 제자르 파샤는 그들을 지원하며 바시르로 하여금 더 많은 세금을 내도록 압박하였고, 이에 아미르는 줌블라트 및 이마드 부족과 함께 정적인 아비 나카드 부족의 수뇌부 5인을 데이르 알 카마르의 궁전으로 초대한 후 제거하며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양측의 대결이 임박했다고 여겨진 1798년, 예상치 못한 외세의 등장으로 충돌은 연기되었다. 갑자기 레반트에 폭풍을 몰고온 이는 프랑스의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2.6. 나폴레옹 전쟁

1798년 여름, 영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나폴레옹과 4만 프랑스 군은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무라드-이브라힘 베이의 맘루크 정권은 손쉽게 붕괴되었고 전자는 상이집트, 후자는 시리아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장악 후 다마스쿠스에서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조정은 총독 압둘라 파샤 알 아젬을 해임, 이브라힘 파샤 알 할라비로 대체하였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제자르 파샤가 다시 임명되었다. 휘하의 군대를 파병해 질서를 회복한 제자르 파샤는 다마스쿠스를 방문, 반란에 연루된 현지 민병대장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수급을 시타델 성문에 효수하였다. 다만 그해 8월 호레이쇼 넬슨이 나일 강 하구의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며 나폴레옹을 사실상 고립시키자 오스만 조정은 영국과 동맹하여 수륙 양면으로 이집트 재정복에 나섰다. 술탄 셀림 3세의 지시로 제자르 파샤는 시리아 일대의 병력을 징발하여 3만의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1799년 1월, 수에즈 운하 일대를 시찰하던 나폴레옹은 제자르 파샤가 이집트의 관문인 시나이 반도의 엘 아리쉬에 병력을 배치했다는 첩보를 접하였다. 수륙 양면에서 (거기에 내응까지) 동시에 적을 상대하는 어려움을 타파하고자 나폴레옹은 시리아로 진격해 육군을 먼저 격파하기로 결정하였다. 평소에 자신을 알렉산드로스와 비교하던 나폴레옹은 이번 기회에 동방을 정복하려는 꿈을 가지고 역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였다. (1799년 2월 5일) 1만 3천의 병력과 대포 80문을 지닌 채 출정한 그는 7일간의 행군 끝에 엘 아리쉬에 당도, 3일간 공성전 끝에 점령하였다. (2월 20일)[5] 프랑스 군은 4백의 전사자를 내었지만 오스만 포로들 중 3백여명이 합류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은 주민들이 도주한 가자를 접수한 후 북진, 3월 3일 야파에 당도하고 성을 포위하였다. 야파에는 1천 2백의 포병을 포함한 5천여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압둘라 베이 휘하의 알바니아 용병이었다.

3월 7일 성벽에 틈이 생기자 나폴레옹은 터키인 사절을 보내 항복을 종용하였는데, 수비대장 압둘라 베이는 사절단을 고문한 후 처형하고 결사 저항에 나섰다. 그날 저녁 수비대의 반격은 격퇴되었고 성탑이 붕괴되자 압둘라 베이는 목숨 보장 약속을 받고 항복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가혹히 살해된[6] 사절단의 복수로 이틀 밤낮의 약탈을 명하였고, 사로잡힌 압둘라 베이를 포함한 3천여 포로를 처형하였다.[7] 야파의 주민들 역시 학살 및 강간을 당하였다. 나폴레옹은 수백여 주민들의 피신을 허용하여 그들이 다른 도시들에 저항의 대가를 알리도록 하였는데, 역으로 프랑스 군의 약속 파기와 잔혹한 행태를 접한 아크레 주민들은 결사 항전을 결의하게 된다. 한편 야파와 라믈라의 프랑스 군은 안좋은 위생 상태로 인한 역병으로 병력 손실을 겪었는데, 현지인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나폴레옹은 이를 방관하다가 후일 죄책감이 들었는지 야파의 병동을 방문하는 자신의 그림을 의뢰하였다. 야파를 떠나기 전 나폴레옹은 도시에 디완을 세웠고 카르멜 산의 수도원 자리에 병사들의 치료를 위한 큰 병원을 설립하였다.

2.6.1. 아크레 공방전 (1799년)

파일:아크레 나폴레옹.jpg

야파를 떠난 프랑스 군은 북상하여 하이파를 점령, 그곳을 기반으로 아크레 포위를 준비하였다. 그외에 티레, 나사렛 등에도 병력 일부가 파견되었다. 한편 영국 해군의 제해권 덕분에 아크레는 안정적인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당도하기 전 아크레는 조정으로부터 7백의 니자므 제디드, 영국으로부터 시드니 스미스 휘하 8백의 수병을 증원받아 사기가 높아져 있었다. (총 수비 병력은 5천) 또한 3월 18일 영국 함대는 아크레 포위망에 대포를 가져오려던 프랑스 선박 7척을 나포하였고, 이로써 이틀 후 개시된 포위에서 나폴레옹은 보병대만으로 공격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2주 내로 점령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 달리 수비대는 맹렬히 저항하였다. 제자르 파샤는 친히 성밖으로 나가 프랑스 군과 직접 싸움으로써 사기를 고무시켰고, 포위망과 보급로에 대한 영국 함대의 지속적인 포격으로 프랑스 군은 참호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큰 사상자를 내었다.

제자르 파샤는 유대인 참모 하임 파르히와 대포 전문가인 왕당파 프랑스인 필리포[8] 등의 조언에 따라 효과적으로 수비에 임하였고, 알바니아 부대는 야파에서 학살당한 동족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9] 포위가 한창이던 4월 16일, (명목상의)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된 압둘라 파샤 알 아젬 휘하의 3만 5천 오스만 원군이 아크레 구원을 위하 남하하였다. 그들은 갈릴리의 타보르 산[10]에 주둔하였는데, 나사렛에 주둔하던 프랑스 지휘관 클레베르는 고작 2천의 병력으로 야습을 시도하였다. 다만 현지 지형에 익숙하지 못했던 프랑스 군은 아침이 되어서야 타보르 산 부근에 당도하였고, 오스만 대군에 직면하자 클레베르는 포기하고 도주하려 하였다. 그때 클레베르의 무모한 출정을 전해들은 나폴레옹이 2천의 원군과 나타나 무방비 상태이던 오스만 진영을 습격하였다. 클레베르 역시 반격에 나서자 오스만 군은 놀라 동쪽 요단강 방면으로 도주하였는데, 마침 비가 내린 후라 불어난 강물에 수천명이 희생되었다. 요단강 건너기 프랑스 군은 단 2명의 전사자만을 내었고, 오스만 군은 전투로 수백과 후퇴 중 수천을 합쳐 6천을 잃었다.
파일:아크레 내벽.jpg
파르히와 필리포가 세운 아크레의 내벽. 후자는 승리 직후 아크레에서 병사한다.

이렇게 원군을 격파한 나폴레옹은 아크레로 돌아와 포위에 박차를 가하였다. 5월 초엽 이번에는 육로를 통해 대포를 접수한 프랑스 군은 성벽 일부를 무너뜨렸다. 프랑스 군은 그곳을 통해 진격하였으나 제자르 파샤의 정원 부근에 파르히와 필리포가 세워둔 임시 방벽에서 저지되었다. 수비 측의 준비와 항전 의지를 확인한 나폴레옹은 점점 함락 가능성을 비관하기 시작하였고, 위기가 지나간 직후 로도스에서 파견된 오스만 원군이 아크레 항구를 통해 당도하였다. 여기에 영국 함대의 봉쇄 속에 프랑스 군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악천후와 역병까지 겹쳐 전투 외에도 약 2천의 병력을 잃었다. 나폴레옹은 5월 10일 최후의 공세마저 실패하자 20-21일 포위를 풀고 이집트를 향해 철수하였다. 62일간의 공방전 끝에 아크레는 당대 세계 최강의 군대에 3천의 손실을 안기며 승리하였고, 제자르 파샤는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한편 아크레에서 후퇴하며 나폴레옹은 자신의 모자를 대포로 발사하여 최소한 자신의 일부라도 성 내부에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파일:아크레 프랑스 묘지.jpg
아크레의 프랑스 묘지

후일 나폴레옹은 이때를 회고하며, 아크레를 점령했다면 터번을 쓰고 동방의 황제가 되어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파리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불사 부대 창설은 덤 어찌 되었든 나폴레옹은 아크레에서 가로막혀 이집트로 후퇴하였고, 곧 영국과 오스만 군의 압박으로 프랑스로 돌아가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집권하였다. 만약 그가 아크레를 점령하고 시리아 해안에 더 오래 머물렀더라면 유럽과 중동 역사에 있어 큰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한편 제자르 파샤의 유대인 참모 파르히는 승리할 시에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을 돌려주겠다는 나폴레옹의 제안에도 끝까지 제자르 파샤를 도와 아크레를 방어하는데 투신하였다. 한편 나폴레옹의 유대 국가 약속은 후일 프랑스 등지 시오니즘 운동의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으니, 나폴레옹의 팔레스타인 원정은 짧았지만 중동 역사에 어느정도 영향을 남긴 샘이다. 지금까지도 아크레 동남쪽에 위치한 나폴레옹이 지휘한 언덕을 나폴레옹 언덕이라 부르고, 구도심의 아랍인들은 대대로 세계적인 정복자를 상대로 포위를 버텨낸 것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밤을 틈타 철수에 나선 나폴레옹은 대포를 끄는 말들을 과감히 버리고 남은 말에는 부상당한 장교들을 싣고 자신 역시 도보로 행군하였다. 동시에 그는 카르멜 산의 병원을 야파 병원에 합친 후 부상자들을 다미에타로의 해로, 가자 방면의 육로로 나누어 수송하였다. 후퇴하며 프랑스 군은 마주치는 농경지, 가축, 가옥 등을 초토화시켰고 나폴레옹에 순종적이던 가자만이 파괴를 면하였다. 철수 속도를 높히고자 했던 나폴레옹은 수십여 중상자들에게 치명량의 진통제를 주입하여 안락사시키려 하였으나 종군의사들의 반대로 철회하였다.[11] 나폴레옹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제자르 파샤는 부상자들을 후위에 배치한 채 행군하는 프랑스 군을 추격하는 대신 야파 등지를 수복, 재건하는 데에 치중하였고[12] 1799년 6월 나폴레옹은 무사히 이집트로 돌아와 자신의 사망설을 불식시켰다. 7월 말 무스타파 파샤 (메흐메드 알리의 숙부)가 이끄는 5만의 상륙군을 아부키르 전투에서 괴멸시킨 나폴레옹은 이듬달 프랑스로 탈출하였고, 남겨진 프랑스 군은 분전하였지만 1801년 영국-오스만 군에 항복하였다.

2.7. 말년

파일:아크레 대포.jpg
아크레 성벽에 놓은 19세기 무렵의 대포

오랜 동맹이던 프랑스의 이집트 침공에 충격을 받았던 오스만 조정은 제자르 파샤의 성공적인 방어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무슬림, 기독교도를 막론하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였고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에서는 외세 격퇴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특히 무슬림들에 있어 제자르 파샤는 '신앙의 수호자'로 추앙받았고, 유럽인들은 그를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얼마 안되는 이로 평가하였다. 나폴레옹의 철수 이후 제자르 파샤는 조정에게 자신을 이집트의 지휘관으로 임명, 일대를 수복하는 오스만 군을 이끌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셀림 3세와 고문들은 이를 고려하였으나 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것을 경계, 그랜드 와지르 쾨르 유수프 지야 파샤에게 지휘를 맡겼다. 1799년 중순 유수프 파샤는 압둘라 파샤 알 아젬을 재차 다마스쿠스 총독에 선임하였고, 이로써 제자르 파샤의 3번째 임기는 7개월만에 종료되었다. 압둘라 파샤는 제자르 파샤의 대리로 다마스쿠스를 맡았던 아부 함자 등을 처형하였다.

2.7.1. 레바논 개입과 실패

아크레 포위 동안 레바논 산지의 바시르 2세는 양측의 지원 요청을 모두 거절하고 중립을 유지하며 사태를 관망하였고, 이는 나폴레옹의 좌절로 이어졌다. 다만 제자르 파샤는 아크레 수비를 거들라는 자신의 지시에 끝내 호응하지 않은 바시르에 대해 분노하였고, 그가 철저히 중립을 지켰음에도 프랑스 측에 보급품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레바논 산지에 파병하였다. 원정군은 바시르의 경쟁자인 바즈를 도와 데이르 알 카마르에서 바시르와 줌블라트 셰이크들을 축출하였다. 바시르는 아카르와 크락 데 슈발리에 (알 후슨) 일대로 철수, 영국 제독 시드니 스미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후자는 이에 응하여 트리폴리에서 회동하였고, 함께 이집트 원정을 위해 엘 아리쉬에 주둔하던 유수프 파샤를 찾아갔다. 하소연을 전해들은 유수프 파샤는 바시르를 환대하고 레바논 산지, 와다 앗 타임, 베카 협곡, 아밀 산지에 대한 그의 수조권을 승인함과 동시에 그가 시돈/트리폴리/다마스쿠스 총독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지위를 하사하였다. 다만 레바논 산지는 여전히 제자르 파샤가 지원하는 바즈와 카단, 하이다르 형제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던 1800년, 바시르는 바즈에게 소모적인 동족상잔을 멈추자며 호소하였다. 양측은 제자르 파샤 몰래 회동하여 바시르가 드루즈 산지 및 마론파 다수인 케세르완 지역을, 유수프의 아들들은 비블로스와 바트룬 등 북부 지역을 지배하기로 합의하였다.[13] 사실상 바시르가 주도권을 되찾은 것을 깨달은 제자르 파샤는 분노하였고 야즈바키 부족을 지원하며 바즈와 바시르 동맹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마드 가문 휘하의 야즈바키 부족은 수년간의 노력에도 단합된 시하브 가문을 무너뜨리지 못하였고, 1803년 사태를 관망하던 드루즈 셰이크들 역시 바시르 편으로 넘어갔다. 한편 같은해 여름 열병에 걸린 제자르 파샤는 바시르의 귀환을 막지 못하였고, 이듬해 제자르 파샤가 사망하자 바시르의 레바논 지배권은 공고해졌다.

2.7.2. 야파 문제와 반란

1801년 이집트를 수복한 후 코스탄티니예로 귀환하던 유수프 파샤는 헤브론 출신의 동맹인 무함마드 아부 마라크를 가자와 예루살렘 태수로 봉하며 야파의 통치를 맡겼다. 이렇게 현지 출신에게 남부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줌으로써 조정은 제자르 파샤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했던 것이다. 30여년간 조정에 협력하던 제자르 파샤는 (시돈 총독의 관할 구역 밖인 다마스쿠스 에얄레트 소속임에도) 자신의 영토로 여기던 지역의 통치권을 침해당하자 마침내 반발, 아부 마라크의 축출을 위해 야파를 포위하였다. 이에 조정은 그를 반도로 규탄하는 칙령을 내렸으나 그럼에도 제자르 파샤는 야파 포위를 지속하였고, 마침내 1803년 초엽 아부 마라크는 항복하고 야파를 떠났다. 그후 제자르 파샤는 조정 대신들에게 막대한 규모의 뇌물을 바쳐 자신에 대한 칙령을 철회시키고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는 30여년의 경력동안 제자르 파샤가 유일하게 제국에 정면으로 반발한 경우였다.

2.7.3. 다마스쿠스 총독

한편 1803년 봄 사우드 왕가의 와하비 군대가 메카를 점령하자 핫지 사령관으로의 직무를 다하지 못한 압둘라 파샤 알 아젬이 해임되었고, 제자르 파샤가 대신 다마스쿠스 총독이자 핫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압둘라 파샤는 정적 제자르 파샤의 동맹이자 트리폴리 총독인 무스타파 아가 바르바르를 트리폴리에서 포위하던 차에 해임 통보를 접하였다. 동시에 제자르 파샤의 또다른 동맹이자 홈스의 징세관인 압둘라 아가 알 마흐무드가 아젬 가문의 근거지인 하마를 포위하였다. 해임을 수용하지 않은 압둘라 파샤는 우선 트리폴리 포위를 풀고 하마를 구원, 압둘라 아가를 전사시키며 승리하였다.[14] 한편 아부 함자의 동료이던 무함마드 아킬은 제자르 파샤가 재차 다마스쿠스 총독에 오르자 그와 동맹, 압둘라 파샤에 의해 무프티로 임명된 알 무라디를 감금하였고 후자는 옥사하였다. 다만 국교에 해당하는 하나피 성직자에 대한 지나친 처벌이라 여긴 제자르 파샤는 무함마드 아킬을 아크레로 소환해 처형하며 조정을 달래었다. 그동안 압둘라 파샤는 하마에서 군대를 모아 다마스쿠스의 무력 점령을 꾀하였다.

압둘라 파샤의 군대가 당도하자 다마스쿠스 외곽의 주민들은 두려워하며 성내로 피신하였다. 다만 봉급 체불과 중앙 정부에 맞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병사들이 종군을 거부하며 무산되었다. 무사히 다마스쿠스를 확보한 제자르 파샤는 이번에도 아크레에 머무르며 셰이크 타하 알 쿠르디와 그가 이끄는 쿠르드 부대로 하여금 일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다만 임명된지 몇달만인 1803년 8월 열병에 걸린 제자르 파샤는 제대로 정무를 보지 못하였고, 20년 이상 맡아오던 메카 순례단 지휘 역시 부관 술레이만 파샤에게 맡겼다. 제자르 파샤의 죽음이 확실해지자 사후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조정은 비밀리에 알레포 총독 이브라힘 파샤 카타라가시에게 시돈과 다마스쿠스 총독을 맡겼다. 한편 4차례, 총 10여년에 걸친 제자르 파샤의 다마스쿠스 통치는 높은 세금으로 원성이 높았다. 1804년 제자르 파샤의 부고가 전해지자 현지 주민들은 환호하였고, 압둘라 파샤가 복귀하였다. 다만 후자 역시 2년 만에 와하비 측과의 갈등으로 반세기만에 메카 순례를 이행하지 못하며 해임되었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다.

2.7.4. 죽음과 사후 혼란

파일:아크레 사원.jpg
제자르 파샤가 매장된 알 자자르 (엘 그자르) 모스크

1804년 5월 7일 제자르 파샤는 약 75세의 나이로 아크레의 관저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감금 상태이던 이스마일 파샤가 친한 병사들에 의해 석방되었고, 후자는 조정의 반발에도 아크레에서 집권하였다. 1804년 6월 조정은 이스마일 파샤를 반역자로 규탄하였고, 이브라힘 파샤에게 토벌을 맡겼다. 이브라힘 파샤는 핫지 카라반을 이끌고 귀환한 술레이만 파샤 (1801년 제자르 파샤와 화해, 양아들이 됨)와 함께 아크레를 포위하였다. 다만 요새화된 아크레의 함락은 어려웠고, 포위가 장기화됨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미리 (순례세) 징수와 1805년 1월 출발하는 핫지 카라반을 이끌기 위해 이탈하였다. 포위군을 이어받은 술레이만 파샤는 시돈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이에 공격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해 말엽 술레이만 파샤는 셰파 아므르 부근에서 반격에 나선 이스마일 파샤를 격파하고 아크레를 장악, 명실상부한 제자르 파샤의 후임자로 자리매김하였다.

3. 평가

제자르 파샤는 30여년에 이르는 통치 기간동안 대부분의 시기 조정의 지지 하에, 가끔 대립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다. 다만 그의 치세에 이루어진 사회-경제적 발전과 역동성은 후일 퇴색되었다. 전임자인 자히르 알 우마르와 달리 그는 외국 출신이었고 조정의 대변인이었지만, 아크레를 기반으로 한 자치적인 통치에 대한 야망을 이어갔다. 이는 후계자인 술레이만 파샤와 압둘라 파샤로 이어졌다. 제자르 파샤에 대한 당대인들과 직후 세대의 전기와 시가 상당수 남아있지만 그에 대한 근현대 시기의 저작은 드물다. 특히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에 있어 제자르 파샤는 현지 출신으로서 적극 수용된 자히르 알 우마르에 비해 별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배척되었다. 그렇다고 고향인 보스니아 민족주의에서도 거리상 수용되지 않았다.

60대 무렵 제자르 파샤는 흰 수염이 있었고 근육질의 체형임에도 민첩했다고 한다. 그의 본래 모어는 보스니아어였으나 이집트 억양이 가미된 오스만어와 아랍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또한 그는 본래 애주가였지만 1791년 핫지 이후 음주를 그만두었다. 말년의 제자르 파샤는 검소한 삶을 살았고, 제국 관료들에 대한 뇌물과 아크레에서의 건축 사업 외에는 지나친 지출을 자제하였다. 의복에 있어 그는 일반적인 아랍 옷이나 거친 재질의 천을 둘렀고 터번을 착용하였다. 손님이 오면 그는 대추 야자수 아래에 앉거나 방석 없는 탁자에 걸터앉은 채로 접견하였다. 또한 그는 정원 가꾸는 것을 매우 즐겼고 후에는 취미로 종이 공예를 취득, 손님이나 하렘의 여인들에게 볼거리를 선사해주었다.

필리포는 제자르 파샤가 거듭된 잔인함과 함께 추정컨데 사디즘을 지녔다고 주장하며 통제할 수 없는 성격이라 주장한다. 다만 동시대 프랑스인들에 의하면 잔혹함 외에 총명했으며 교활하면서도 다재자능하였고 관대했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이러한 면모들과 용맹함 및 체력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외에 어디서 습득하였는지 기계와 공학에 대한 능력 역시 뛰어났다고 한다. 필리포에 의하면 제자르 파샤에 대한 국가 정체성 측면에서의 수용은 오스만 시기 맘루크들에 대한 인식의 일부라고 한다. 특히 이집트의 맘루크 군주들은 근대 시기엔 현지 주민들 위에 군림한 고위층 외국인으로 인식되었고, 최근 들어서야 현지 역사가들에 의해 심도 있게 논의되고 있다.

4. 정치와 군대

제자르 파샤는 이집트에서의 맘루크 체계 경험을 바탕으로 아크레에 맘루크 군사 정권을 수립하였다. 1789년 반란 전까지 맘루크들은 제자르 파샤의 근위대 겸 정치 참모와 각지의 지방관으로 기능하였다. 그중 제자르 파샤의 심복은 살림 파샤 알 카비르 & 앗 사기르, 술레이만 파샤, 알리 파샤 카진다르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이집트 시절부터 따랐거나 캅카스 지역에서 구매되었다. 심복들을 매우 아꼈던 그는 (아크레의 프랑스 공사에 의하면) 1786년 첫 맘루크였던 살림 파샤 알 카비르가 역병으로 병사하자 '아이처럼 울었다'고 한다. 또한 반란에 가담했던 술레이만 파샤가 1802년 아크레로 돌아왔을 때도 '잃어버린 아들'처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18세기 말엽 제자르 파샤는 다마스쿠스의 유대인 은행가 가문 출신 하임 파르히를 회계관이자 행정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제자르 파샤는 그를 해임, 체포한 후 실명시키고 코와 귀 일부를 베어 사실상 불구로 만들었다. 그후 파르히는 재차 등용되어 요직을 맡았고, 후임인 술레이만 파샤 시기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한편 아크레에 부임한 직후 제자르 파샤는 셰이크 타하가 이끄는 일단의 쿠르드 인들을 등용, 내부 기밀을 관장하게 하였다. 다만 현지인들은 셰이크 타하를 야지디교도이자 악마 숭배자로 여겼다. 쿠르드 부대는 감옥을 맡아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과 처형을 담당하였다. 비밀경찰 군대의 부대 편성에 있어 제자르 파샤는 민족에 따라 분류하여 단합력을 높혔다. 부대장 대부분의 경우 역시 같은 민족으로서 질서를 유지하였다. 해당 민족은 마그레브 (모로코), 아르나우트 (알바니아), 부스나크 (보스니아), 쿠르드 달라트 부대였다. 마그레브 보병과 달라트 기병대는 고용된 용병대였는데 전자는 본래 자히르 알 우마르의 소유였고, 후자는 오스만 제국군 소속이었으나 18세기 들어 각지의 총독들에 의해 사유화된 민병대로 변모한 경우였다. 아르나우트, 부스나크 기병대는 제자르 파샤가 발칸에서 고용한 부대로, 제자르 파샤의 정예군으로 정착하였다. 그는 또한 개인 맘루크를 구매하였는데, 대부분 조지아 계통이었다. 맘루크들은 상급 지휘관들이었지만 1789년 반란으로 해체된 후에는 달라트 기병대의 지휘관들 혹은 기타 오스만 제국군에서 해임된 장교들에 의존하였다.

제자르 파샤는 또한 하와라 베두인 민병대를 고용하였는데, 맘루크 반란 후부터 더 중용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부대들에 급료를 지급하는 것은 엄청난 지출이 필요했지만, 그는 봉급을 제대로 지급하는 편이었다. 특히 충성과 감사를 얻기 위해 치세 전반부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제자르 파샤는 보통 아크레에 머물며 제장들을 각지의 원정에 파견하였다. 다만 필리포에 의하면 간혹 친히 군대를 이끌 때면 더욱 성공적이었다. 18세기 아랍 연대기 작가들은 제자르 파샤가 각 군사 원정 때마다 새로운 군대를 편성했다고 기록하였다. 필리포는 이를 부정하면서도 패전 시의 많은 사상자 수를 고려하면 부분적으로 사실이라고 기록하였다. 각종 연대기들로 추정해 볼 때에 제자르 파샤의 상비군은 대략 7-8천 정도로 추산되며, 원정 시에는 1-2천 정도를 일시적으로 추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아랍 사가들과 프랑스 영사들의 이러한 기록 역시 종종 짐작에 근거한 것이었다.

제자르 파샤 권력의 절정기였던 1785년 4월 르노도가 기록한 아크레 ~ 다마스쿠스 행진에 동원된 병력은 750 마그레브 보병, 200 마그레브 기병, 540 아르나우트 기병, 300 달라트 기병과 낙타 4백마리, 당나귀 2백마리, 대포와 일단의 포병들로 구성되었으며 각각의 부대는 자체 군악대가 있어 각자의 군가를 연주했다고 한다. 또한 소규모이긴 하지만 해군도 있었는데, 1779년 기준 2척의 갤리선과 2척의 제베크 (범선)로 구성되었다. 함대에는 기본적인 기술 장비가 없었기에 제자르 파샤는 프랑스 선박들에서 훔친 컴퍼스 등을 배치하게 하였다. 함대는 몰타 해적들의 레반트 해안 습격을 방지하는 목적으로 운용되었다. 함대는 1789년 기준 갤리선 3척, 제베크 1척, 달마티아 선박 2척으로 구성되어 아크레에 정박하였는데, 간혹 티레, 시돈, 베이루트, 트리폴리, 라타키아 항구에도 배치되었다. 그외에 제자르 파샤는 아크레와 이집트의 무역항 다미에타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3척의 상선 역시 소유하였다.

5. 경제와 종교

제자르 파샤는 시리아에서의 정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그는 세금, 무역, 관세, 수탈 등의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 또한 그는 자히르 알 우마르가 설립한 목화와 곡물에 대한 (수익이 좋은) 독점을 지속하고 강화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1780년대에 아크레와 야파의 프랑스 목화 상인들을 축출하였다. 18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나타난 농업 기술의 발전과 무역 증대는 지역 경제의 번영으로 이어졌고, 특히 아크레 ~ 베이루트 해안에 집중되었다. 제자르 파샤는 효과적으로 베두인 약탈을 저지함으로써 관내의 안정과 질서를 확보하였다. 또한 그는 기독교도와 유대인을 비롯한 이주민을 유치하려 하였으나, 엄하고 높은 세금 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기존 주민들이 인근 지역으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르노도의 표현에 따르면 제자르 파샤는 폭력적이고 감정에 휘둘렸으며, 가끔 공정하고 관대하였으나 나머지의 경우 광폭하고 잔인했다고 한다.

한편 제자르 파샤는 통치 방법을 거론하며 '지나치게 가혹해서는 안되고, 한 손으로 때리면 다른 손으로는 보상을 줘야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오론테스 강에서 요단강에 이르는 영토를 30년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저술하였다. 제자르 파샤는 아크레의 주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와 친근감을 얻었고, 종종 가난한 주민들을 초청하여 고충을 듣고 위로하였다. 올리비에는 그가 빈자와 노인을 위해 궁전에 항상 쌀로 가득한 큰 솥을 두었으며 매주 거르지 않고 그들에게 돈을 나눠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면모와 함께 제자르 파샤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위해 외출 때마다 이동식 교수대를 대동했다고 한다. 연개소문 뺨치네 1802년 아크레를 방문한 프랑스의 오리엔탈리스트 피에르 아메데 자베르는 제자르 파샤가 견고한 감옥을 지녔으며, 그 문을 열어두어 고문이나 처형 전의 수감자들을 주민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당대 사가 미카일 마샤카흐는 제자르 파샤가 그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종교의 신민들을 공평히 대하여 무슬림 울라마, 기독교 사제, 유대교 랍비, 드루즈 셰이크들 모두를 투옥시켰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이 조화롭게 살던 자히르 알 우마르 때와 달리 제자르 파샤는 금요 예배때마다 무슬림 농민들이 나사렛의 기독교도 주민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1799년 프랑스의 침공 후 무슬림들은 현지 기독교도들에게 화풀이하였는데, 특히 라믈라의 가톨릭교도들이 약탈 혹은 살해를 당하거나 도주하였다. 제자르 파샤는 이러한 습격을 근절시키려 노력하는 대신 대중의 분노를 틈타 나사렛과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다가, 영국 해군 제독 시드니 스미스의 경고 후에야 취소하였다.

치세 초반 무렵 제자르 파샤는 갈릴리의 유대인들과 우호를 유지하였다. 그는 1759년 지진으로 파괴된 사파드의 재정착을 위해 세금과 관세 감면을 제안하며 유대인들의 이주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1799년 나폴레옹의 아크레 포위 이후 제자르 파샤가 전쟁으로 인한 재정 손실을 상쇄하기 위해 유대인 공동체를 수탈하자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6. 건축

파일:아크레 대사원.jpg
제자르 모스크의 내부

1775년 제자르 파샤가 막 부임했을 무렵 아크레에는 4개의 모스크가 있었고, 그중 3개는 자히르 알 우마르의 지배기에 세워졌다. 3년 후 제자르 파샤는 5번째 사원으로 '하얀 모스크' 혹은 '금요 모스크'를 건설하였는데, 현재에는 엘 제자르 모스크로 알려져 있다. 아크레, 카이사레아, 아틀리트 등지의 유적에서 건축 자재를 징발한 제자르 모스크는 1781년 완공되었고,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알 아크사 다음으로 큰 사원이다. 제자르 파샤는 건축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무했음에도 친히 설계를 맡았고, 건설의 전반을 감독하였다. 필리포에 의하면 이는 아크레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모스크였다.

그곳에는 샤으르 앗 나비, 즉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수염 뭉치가 보관되어 있는데 라마단 종료 축제인 이둘 피트르 시의 가두 행진에 쓰였다고 한다. 건축 양식은 코스탄티니예의 모스크들을 모방하였고, 제자르 파샤의 치소이자 거처인 사라이 맞은편에 세워졌다. 전반적으로 사각 건물에 돔이 얹어진 형태이며, 입구의 회랑은 5개의 돔과 아치들을 대리석 기둥이 지탱하는 구조이다. 넓은 안뜰에는 해시계가 있었고 흰 대리석과 화강암 기둥으로 구성된 동, 서, 북면 회랑 뒤편에는 둥근 지붕을 지닌 방들이 있었다. 이러한 방들에는 아크레의 중앙 이슬람 법원, 이슬람 신학교, 도서관, 순례객들과 학생들을 위한 숙소 등이 있었다.

파일:아크레 해자 1.jpg

파일:아크레 해자.jpg
아크레 성벽의 드넓은 해자

1799년 나폴레옹의 포위 이후 제자르 파샤는 자히르 알 우마르가 건설한, 상대적으로 얇고 수직인 아크레 성벽을 보수하였고 새로운 벽을 덧대기도 하였다. 이로써 아크레의 성벽은 훨씬 더 두꺼워졌고 수직이 아닌 경사가 진 형태로 바뀌어 신형 대포의 포격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외에 여러 성탑들과 해자가 추가되었다. 제자르 파샤는 관저인 사라이에 측랑에 해당하는 디완칸카를 건설, 넓은 공간에 3개의 궁전을 배치하였다. 그는 가장 큰 궁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가끔 숙박도 하였다. 또한 그곳에는 하렘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도 있었는데, 하렘은 사라이에서 2번째로 큰 건물이었고 디완칸카와 큰 벽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제자르 파샤 본인만이 하렘으로 향하는 문의 열쇠를 항상 지니고 있었다.

제자르 파샤는 성장하는 아크레의 상업 경제의 중요성에 주목, 1784년 거대한 칸 알 움단 카라반사라이를 건설하였고 1760년대 자히르 알 우마르가 건설한 칸 앗 샤와르다를 확장하였다. 그는 또한 수크 알 자자르 바자르와 여러 소규모 상업 시설들의 건설 또한 지시하였다. 성장하는 아크레에 신선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제자르 파샤는 북쪽 알 카브리의 수원지에서 이어지는 수도교 건설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수도교는 1799년 포위 당시 프랑스 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후일 술레이만 파샤에 의해 재건되었다.

파일:아크레 하맘.jpg
하맘 알 파샤

1781년 제자르 파샤는 아크레 시내에 거대한 하맘 (대중 욕탕)을 세웠다. 하맘 알 파샤로 불린 이는 오스만 시기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가장 크고 화려한 목욕탕이었고, 알 자자르 모스크의 운용 자금을 위한 와크프 (재단)에 헌정되었다. 하맘은 화강암, 대리석, 반암 기둥으로 지탱되었다. 170년 후인 1948년 1차 중동 전쟁 당시 폐쇄되었던 하맘은 1954년 아크레 시가 운영하는 박물관이 되었다가 1990년대에 문을 닫았으나 최근 재개장하였다.

[1] 쉬아 연대기 작가 알리 앗 수바이티의 기록. 제자르 파샤 휘하에서 나시프의 쉬아 기병대는 드루즈, 베두인, 튀르크멘 반군과 싸웠는데 토사구팽 당한 것[2] 레바논 동남부, 나바티예와 헤르몬 산 사이의 도시. 드루즈 산지와 아밀 산지의 중간에 해당함[3] 시돈 주재 프랑스 영사와 쉬아 연대기 작가 하이다르 리다 알 루카이니의 기록[4] 조정에서 임명한 카디 역시 하나피 출신이었음[5] 자세한 전개 과정은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El_Arish 참고[6] 무려 궁형을 가하여 죽인 후 수급을 성벽 위에 전시하였다고 전해진다[7] 이에 대해 포로들을 먹이고 감시할 여력이 없는데 풀어주면 적군에 합류할 것이 뻔하기에 그랬다는 변명이 있지만 역시 정당화할 수는 없다. 3천여 포로들은 식량이나 거처를 제공받지 못한 채로 인근 해안 사구에서 행군당하다가 며칠에 걸쳐 총검으로 살해되었다[8] 본래 나폴레옹의 사관학교 동기였으나 왕당파였기에 영국으로 망명, 시드니와 함께 아크레로 향함[9] 필리포는 인부들을 지휘하여 아크레 성벽을 두텁게 보강하였고 영국 해군이 빼앗은 프랑스 대포를 프랑스 군에게 퍼부었다[10] 구약에서 이스라엘 군이 가나안 군을 격파한 곳이자 예수가 기도 중 빛으로 변용한 장소이며 십자군 시대에 성채가 있었다[11] 다만 이를 실제로 행했다는 증언도 있다..[12] 시드니 스미스 휘하의 영국 수병들은 야파 성벽을 재건함[13] 이때 바시르는 쿠란과 성경 모두에 맹세하였고, 기존에 중용하던 마론파의 다흐다 가문 대신 바즈를 자신의 무답비르 (조언자)로 임명하였다.[14] 다만 이때 하마는 큰 민간인 사상자를 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