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護送船團전시 상황인 국가가 선박편을 통해 물자를 들여올 때, 한척씩 분할하여 들여오게 되면 통제가 안되고, 홀로 떨어진 선박은 손쉬운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데다가 유사시 구조도 기대할수 없으니, 선박들을 한데 모아다 선단을 편성하여 화물철도처럼 줄줄이 이동하도록 하는 것을 "수송선단(輸送船團)" 이라고 부르며, 수송선단에 해군 함정 등 호위 세력을 더할 경우, 이를 "호송선단(護送船團)" 이라고 부른다.
2. 본래 의미
수송선단이나 호송선단을 구성하면서까지 전시체제에 있는 국가가 해운에 신경 쓰는 이유는,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물자의 양이 지상, 항공, 해상 중 단연 해상운송이 으뜸이기 때문이다. 지상운송의 경우 노반이 받쳐주지 못하면 한 번에 많은 양을 운송할 수가 없어 소규모 열차편성이나 차량 한 대 한 대로 나눈 보급을 엄청나게 자주 보내는 방식을 실시해야 하며, 그마저도 이들 모두 중간중간 멈춰서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한다. 항공운송 역시 활주로와 관제탑, 화물터미널도 있어야 하고, 또 그게 다가 아니라 이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처리하냐[1], 휴식시간은 얼마냐, 그날 비행 후 내일 비행에 대비한 점검이나 정비엔 얼마나 걸리냐 같은 사항으로 인해 화물운송량이 엄청 크게 들쭉날쭉해진다.반면 선박의 경우 화물 선적 및 하역, 입출항, 결정적으로 나르는 것도 모두 세월아 네월아다. 그래서 일정 기간 동안의 지속적 수송량에선 밀리지만, 반대로 화물을 한 번 내리면 어디다 쌓아뒀다가 열차에 실어서 보내도 되고, 바로 그냥 적재한 트럭을 통째로 몰고 검역시설로 가서 검역을 거친 후 고정작업을 거치고 그대로 목적지로 가버려도 되며, 나르는 데 오래 걸리는 만큼 애초부터 내부에 생활시설을 다 갖추고 다닌다. 또한 그만큼 화물운송이 들쭉날쭉해질 이유도 적으며, 노반 그딴 것도 없으니만큼 그저 항만의 깊이와 크기만 된다면 그냥 예인선 불러다 입항해버리면 되는 데다, 그만큼 배의 크기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수송하는 양에선 가히 압도적이다. 그 수송량이 어느 정도인지 비유하자면, 한 척의 대양횡단 여객선과 한 척의 RO-RO선 조합이면 완전무장한 완편 기보사단을, 현재 선박 크기 수준으로 많게는 둘까지 싣고 폭풍우를 뚫으며 대양을 횡단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당장 RMS 퀸 메리 항목만 봐도 알겠지만, 저때 벌써 퀸 메리 한 척에다가 미육군 완편 보병사단 하나를 통째로, 전복 위기까지 올 정도의 폭풍우를 닥돌로 뚫고(...) 실어날랐다. 기술이 발전한 지금은 한 척에 보병사단 둘 혹은 두 척으로 기보사단 둘을 저렇게 나르는 미친 짓도 불가능하진 않다는 것. 그리고 이런 거 수십 척으로 선단 하나를 형성하며, 이런 선단을 많게는 수십 개씩도 굴리니, 당연히 수송량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다. 그래서 전시에 국가가 해운에 그렇게나 신경 쓰는 것이다.
3. 경제학에서
경제학에서 민(금융기업)관(행정기관)이 서로 밀접하게 관여하며 집단적이고 배타적인 국민 경제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2] 원래는 전시에 상술한 자국 해군의 호위 아래 무역 및 항행 안전을 보장받는 상선이나 보급선 여러 척이 모여 몰려다니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를 경제 전략에 비유한 것이다. 호송선단식 경제체제에서 국가는 강력한 규제를 통해 기업을 지휘하며, 기업은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제한되는 대신에 생존과 이윤을 보장받는다.호송선단식 경제는 일본의 경제 성장 모델을 설명하면서 제시되었으며, 지금도 일본의 경제사를 언급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0~70년대에는 미국을 위시해 어느 나라에나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이 어느 정도는 있었지만, 일본은 빠른 성장을 위해 모든 산업을 정부가 조정하여 육성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석유화학, 제철 등의 콤비나트 건설로, 분명히 경쟁 관계에 있어야 할 다수의 기업이 콤비나트 안에서는 파이프라인에 묶여 고정된 분업 관계에 놓이게 된다. 또한 전국의 은행을 감독하는 수준을 넘어 등급과 영업지역을 세분화하여 일일이 지도하였으며, 여기서 산업체를 주거래은행별로 묶어 계열화하면서 모든 산업을 정부가 쥐락펴락하는 체계가 운영되었다.[3]
1990년대까지는 일본이 빠른 경제성장 뿐 아니라 원만한 노사관계, 그리고 두터운 중산층 양성[4]을 이룩한 비결로 이 호송선단식 경제 체제가 지목되었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정경유착과 경직된 경제 구조를 형성했고 부정부패 문제에 취약했다.[5] 이 시기 금융기관은 단 한 차례도 파산한 적이 없으며, 방만한 경영과 버블 확대를 불러 왔다.
결국 버블 경제 이후 이 방식의 경제는 일본에 맹독이 되었는데, 기업이 빠져야 할 때 빠지지 않고 투자해야 할 때 투자하지 않게 되면서 재정 건전화를 꾀하기 힘든 것은 물론이요, 버블 붕괴 후 파산한 은행을 보호하기 위한 예금 보험이 막대한 비용을 잡아먹으며 일본 경제를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설상가상으로 1990년대 중후반에는 구 대장성의 몇몇 관료들이 은행장 및 간부들로부터 이상한 식당에서 과잉접대를 받다 검찰에 걸리는 등 호송선단 체제의 치부가 정점까지 달했다. 이에 일본은 영국의 대처리즘을 모방해 '일본판 금융 빅뱅'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금융 자유화 정책을 펼쳤으며,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외화예금 취급의 합법화, 금융지주회사 설립의 합법화, 증권거래세 폐지 등 여러가지 규제가 완화되었다.
일본의 전자산업이 몰락한 이유로 호송선단식 체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구조조정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지목된다. 일본 전자업계는 지금도 '종합전기 8사'라는 표현이 쓰일 정도로 참여 기업이 많은데, 디지털 시대로 들어선 21세기에 업종을 집중하여 신기술 개발을 하는 결단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기업의 주도와 행정 지도가 모두 작용하지 않은 채 갈라파고스화로 몰린 것이다.[6][7] 예를 들어 1990년대에 이미 삼성전자,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 LG반도체 등 한국 기업들이 집중 투자로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수위에 올라선 상황에서 일본은 주요 전자 기업이 모두 각각의 공장에서 DRAM을 생산하느라 생산력이 분산되어 있었고 1996년 가격 폭락에서 싹 쓸려나가게 된다.[8]
디스플레이 산업 또한 샤프가 선발주자로서 과거 기술인 CRT에서 LCD로 넘어가는 데 앞장섰지만 대부분의 기업이 한국, 대만처럼 과감하게 투자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샤프나 히타치의 LCD를 구매하여 경쟁력을 키우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행보를 보였다. 파나소닉은 이미 한계가 드러난 PDP에 거액을 투자했다 손실을 보았고, 소니는 아예 삼성에 투자를 해서 키워준 데다 경영 난맥으로 경쟁력을 잃었다. 삼성은 스토리지 시장에서도 SSD가 대중화 조짐이 보이자마자 곧바로 HDD 사업부를 매각했다. 카메라 사업부에서도 DSLR 카메라보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미래일것 같아서 DSLR 부문을 전부 철수하고 폰 카메라 사업부에 집중한 반면에, 일본기업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제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끌어안고 있다가 차세대 시장에서 모두 밀려났다. 그나마 호송선단 밖에 있었던 거치형 콘솔 게임기 사업은 소니와 닌텐도가 계속 압도하고 있는 것이 다행.
다만 최근에는 이런 경향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버블 붕괴 이후 일본 정부가 행정 개혁으로 민간 경제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잃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와 민간의 위상이 뒤바뀌면서 2000년대만 하더라도 도쿄대 학생들이 진로로 종합직 국가공무원을 선호하던 것에 비해 근래에는 민간기업 취업이나 창업을 선호하고 국가공무원 채용 경쟁률이 떨어지고 있다. 한편으로 일본 정부는 나름 첨단 산업의 재생을 위해 산업혁신투자기구같은 관민펀드를 통한 과감한 투자를 시도하고 있으나 최대 투자처인 재팬 디스플레이가 파탄 직전 상태에 머무르는 등 큰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다.
[1] =항공기가 내린 직후 얼마나 빨리 화물터미널까지 오고, 만재된 화물을 얼마나 빨리 다 빼고 빨리 다 치우느냐[2] 일반적으로 이러한 모델은 관치금융(官治金融)으로 불리며, 일본 외 국가의 관치금융 모델은 '호송선단'으로 부르지 않는다.[3] 이는 한국의 경제개발에도 거의 그대로 이식되었다. 일본의 것을 거의 그대로 복제한 듯한 시중은행-지방은행 체계나 중공업 콤비나트, 자동차 제조사의 사업영역 규제 등을 예시할 수 있다.[4] 1980년대 일본언론에서는 일억총중류(一億総中流)라고 표현했다. 1억 인구가 모두 중산층이라는 것이다.[5] 호송선단 체제의 전성기였던 1970~80년대만 해도 록히드 사건과 리크루트 사건, 그리고 사가와 규빈 스캔들 등으로 대표되는 부정부패 사건들이 여럿 터졌다.[6] 일본 가정집에 설치되는 스위치와 소켓, LED 등에는 대부분 파나소닉이나 도시바처럼 대기업 회사명이 적혀있다. 아직도 대기업에서 이런 것들을 생산 및 판매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등기구, 스위치, 소켓 등은 대개 이름 없는 중소기업의 몫이고, 삼성과 LG 등 대기업들은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 및 생산에 집중하는 것과 대조적이다.[7] 일본 대기업이 저러는 이유는 이른바 전통을 중시하는 것 때문이다. 파나소닉은 전구 소켓으로 시작한 회사고 도시바는 백열전구(마쯔다 램프)로 시작한 회사다. 파나소닉(당시 나쇼날)의 나쇼날 국민소켓(나쇼날이라는 이름도 이 '국민'에서 나왔다)은 1930년대에 나왔지만 21세기까지 생산되며, 도시바는 비록 LED로 바뀌긴 했지만 지금도 전구, 형광등을 생산한다. 물론 본사에서 직접 하는 것은 아니고 자회사 혹은 외주업체에서 생산한다. 브랜드만 넣어서.[8] 이후 일본의 반도체 산업은 그나마 남은 히타치와 NEC의 DRAM이 엘피다 메모리를 거쳐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산하로, 그리고 플래시메모리는 도시바에서 분리, 미국 주도 자본에 인수되어 키오시아가 되는 등 대부분이 외국계 자본의 지배하에 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