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17:13:10

플라시 전투

파일:external/www.britishbattles.com/the-battle-plassey-l.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3.2. 프랑스-벵골 토후국 연합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6월 23일 인도 벵골 지방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군과 프랑스-벵골 토후국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영국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벵골 지역에서의 패권을 확보한다.

2. 배경

1756년 20세의 나이로 벵골의 나와브(태수)로 부임한 시라지 웃 다울라는 영국인들이 벵골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고 여기고 그들을 벵골에서 몰아내려 했다. 그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윌리엄 요새 확장 작업을 중지하고 수비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동인도회사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요새를 계속 확장했다. 그러자 시라지는 1756년 6월 16일 자신의 군대를 동원해 윌리엄 요새로 진격했다. 코끼리 50마리를 포함한 5만에 달하는 병력과 화포 50문을 갖춘 그의 대군은 윌리엄 요새를 완전히 포위했고, 결국 6월 20일 윌리엄 요새 수비군 146명은 중과부적임을 인지하고 백기를 들었다.

시라지는 이들을 윌리엄 요새 내의 지하감옥 '블랙홀'에 가뒀고 146명의 포로는 좁은 방에 갇혀 지내다가 대부분 질식사하고 23명만 살아남았다.(캘커타 블랙홀 사건) 이에 격분한 영국은 로버트 클라이브 중령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윌리엄 요새를 탈환하게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캘커타 전투에서 패한 시라지는 영국인들의 재산을 반환하고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표면적으로는 영국과 벵골 나와브 사이에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그러나 시라지는 영국을 반드시 몰아내려 했고 기회를 엿보다가 클라이브가 프랑스 요새인 찬드르나가르를 자신의 허락도 없이 공격하자 이를 명목으로 삼아 평화 협정을 파기했다. 이에 클라이브는 시라지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양측은 1757년 6월 23일 플라시에서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사령관: 로버트 클라이브 중령
  • 병력: 유럽인 보병 950명, 유럽인 포병대 120명, 대포 8문, 곡사포 2문, 선원 57명, 세포이 2,100명

3.2. 프랑스-벵골 토후국 연합군

  • 사령관: 시라지 웃 다울라
  • 병력: 보병 35,000명, 기병 15,000명, 대포 54문.(프랑스 대포 4문, 인도 대포 50문)

4. 전투 경과

6월 23일 새벽, 시라지의 군대는 플라시를 향해 출정했다. 3만 5천 명에 달하는 보병대는 대부분 화승총, 파이크, 검, 활로 무장하고 있었고, 기병대는 힌두스탄 상류층 출신이었으며 그들이 탄 말은 우수한 품종이었기 때문에 전투력이 상당히 훌륭했다. 여기에 40~50마리의 소들이 동원되어 군수품과 탄약 상자들을 운반했다. 시라지의 최측근인 미르 자파르는 그의 군단과 함께 좌익에 배치되었고 챈드르나고르 요새의 수비대였던 생프레아 중령 휘하의 프랑스인 45명은 4개의 대포와 함께 플라시에서 가장 큰 저수지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또한 최선봉에는 시라지의 가장 충실한 장군인 미르 무딘 장군 휘하의 7천 보병대와 5천 기병대가 배치되었고, 나머지 인도군은 800m 이내까지 거대한 전열로 배치되었다.

클라이브는 적이 다가오자 즉시 그의 군대를 숙영지에서 출격시켜 한 개의 대열로 배치했다. 영국군에 소속된 유럽인들은 4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중앙에 배치되었고 각 측면에는 포병대 50명과 선원 57명이 3문의 대포와 함께 배치되었고, 이 대포의 좌측 및 우측에는 2,100명의 세포이들이 2개 사단으로 편성되었다. 또한 세포이의 좌측 사단의 후방 180m에 야전대포 2문이 배치되었다. 이후 3천 명의 영국군은 시라지의 5만에 달하는 대군과 맞서 싸울 준비를 갖췄다. 오전 8시, 프랑스 포병대가 대포 한 발을 쐈다. 이 대포는 영국 척탄병 부대 중 한 명을 죽이고 또 다른 한 명을 부상입혔다. 이에 영국군은 응사했지만 30분 간의 포격전 동안 20명의 유럽인과 30명의 세포이를 상실했다.

오전 8시 30분, 클라이브는 전 병력을 숲 속으로 후퇴시켰다. 그러자 인도군은 적이 달아난다고 여겨 환호성을 지르며 숲으로 진입하기 시작했고 적을 향해 더욱 거센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대포들은 영국군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한 반면, 영국군이 설치해둔 대포들은 개활지에 넓게 펼쳐진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오전 11시, 클라이브는 작전 회의를 소집해 해질 때까지 제 위치를 고수하고 자정에 야습을 개시해 적의 진영을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양측은 서로에게 포격전을 벌였는데, 정오 무렵에 거센 빗줄기가 쏟아졌다. 영국군은 그들의 탄약을 빗줄기로부터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인도군은 그러한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탄약 가루 대부분이 손상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인도군 포병대는 더이상 적에게 별다른 위협을 주지 못했다.

오후 1시 경, 미르 무딘은 영국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곤경에 처해 있을 거라고 믿고 숲 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의 군단은 적의 거센 포도탄 세례에 직면했고, 그는 흩어진 기병대를 수습하려다가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시라지는 미르 무딘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미르 자파르에게 군대를 지휘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파르는 이 요청에 응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전투 전인 6월 5일에 영국 동인도 회사로부터 "우리를 도와준다면 당신을 새 나와브로 추대하겠다."는 제의를 수락하고 이번 전투에서 시라지를 배신하기로 비밀 협약을 맺은 바 있었다. 그는 클라이브에게 밀서를 보내 자신이 군대 지휘권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클라이브에게 계속 밀고 나갈 것을 재촉했다.

한편 영국과의 음모에 가담한 또 다른 장군은 시라지에게 전투를 중지하고 다음 날 다시 싸우자고 제안했다. 시라지는 그 말에 따라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오후 2시경 인도군은 포격을 중단하고 숙영지로 돌아갔다. 클라이브는 밤이 될 때까지 공격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수면을 취하기 위해 사냥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그는 킬패트릭 소령에게 수비에 전념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킬패트릭 소령은 얼마 후 대부분의 인도군이 철수한 상황에서도 생프레아 중령 휘하 프랑스 소규모 부대가 저수지 앞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들을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클라이브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명령 없이 그런 결의를 내린 킬패트릭 소령을 질책했지만 그의 상황 판단이 옳다고 보고 자신은 2개의 경포와 250명의 유럽군을 지휘하고 킬패트릭에게는 나머지 군단을 이끌고 프랑스 포병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생프레아 중령은 처음에는 적의 공세에 맞서 싸웠으나 수적으로 워낙 열악했기에 곧 패퇴했다. 이때 인도군 최후방에 배치된 미르 자파르의 인도군이 그들에게 접근해오자 영국군은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세포이 부대와 야전대포 3문을 배치했다. 오후 3시경 영국군 전 부대는 저수지를 장악한 뒤 천천히 물러나고 있는 적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이에 인도군은 철수를 중단하고 적과 맞서 싸우려 했다. 이후 영국군이 포격을 퍼붓자 인도군은 큰 손실을 입었지만 병사들은 여전히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고 기병대는 영국군 포병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맴돌면서 언제든지 포병대를 공격할 태세를 보였다.

그러나 미르 자파르는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다가 뒤늦게 자신들에게 접근한 인도군이 같은 편이라는 걸 알게 된 영국군이 다른 인도군을 향해 총공세를 개시하자마자 전군에 도망치라고 지시했다. 지휘관으로부터 뜻밖의 명령을 받은 인도군은 동요하다가 마침내 패주했고, 영국군은 오후 5시에 시라지의 캠프와 숙소를 장악했다. 이렇게 해서 전투가 끝나자 미르 자파르는 클라이브에게 축전을 보냈고 그날 밤 휘하 군대를 이끌고 영국군과 가까운 곳에 진을 쳤다.

5. 결과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7명의 유럽인과 16명의 세포이를 잃었고 13명의 유럽인과 36명의 세포이가 부상을 입었다. 반면 인도군의 손실은 500명에 달했다. 플라시 전투 후 시라지는 도주했으나 얼마 뒤 미르 자파르의 부하들에게 체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미르 자파르는 약속대로 벵골의 새 나와브로 임명되었지만 영국인들의 간섭에 시달리다가 175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연합하여 영국을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강제로 물러났다. 이리하여 영국은 벵골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삼아 인도 식민화 작업에 착수한다. 때문에 남아시아 지역에서 미르 자파르에 대한 이미지는 한국에서의 이완용 못지않은 수준이라고 한다.[1]

한편 매국의 대가로 미르 자파르의 후손들은 번창하여 영국의 식민지 시절 뱅골 지역의 나와브직을 세습받는 부유한 봉건 가문으로 자리잡았으며, 1880년 뱅골 지역의 나와브직이 폐지된 후[2]에는 서벵골의 무르시다바드 지역의 나와브직을 무려 1969년[3]까지 세습받았다고 한다. 물론 독립 후에는 토지개혁으로 대대로 상속받은 토지 상당수도 잃었으며, 그 후손들은 자신의 조상이 알려지면 인도인들에게 기피 대상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인력거꾼 등으로 살아가는 신세가 되며 권세를 완전히 잃었다.[4] 그러나 그의 후손 중에는 '미르 자파르는 매국노가 아니다'고 미르 자파르를 미화하는 평전을 쓴 사람도 있다고 한다. 영국 협력자 후손이 거의 공론화되지 않는 인도에서도[5] 그 후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할 정도니 미르 자파르에 대한 인도인들의 증오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1] 대표적으로 2023년 3월 21일 인도의 여당인 인도 인민당에서 (런던에서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비판하는 발언을 한) 인도국민회의 전 대표 라훌 간디를 '현대판 미르 자파르'라고 불렀다. #[2] 참고로 당시 뱅골의 나와브였던 만수르 알리 칸(Mansur Ali Khan, 1830~1884)의 증손자, 즉 미르 자파르의 9대손이 이스칸다르 알리 미르자(Iskandar Ali Mirza, 1899~1969) 파키스탄 초대 대통령이다. 그 조상에 그 후손이라고 미르자도 영국령 인도군 중령까지 진급한 식민부역자에 독립 후에는 동뱅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주지사로 폭정을 휘둘렀으며 대통령 집권 후에는 잦은 총리 변경과 1958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그러나 쿠데타 3주도 안 되어 아유브 칸의 쿠데타로 쫓겨났다) 파키스탄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군부 정권이 창궐하게 하는 데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혹평을 받는다.[3] 인도의 독립으로부터 무려 22년 후이다.[4] 물론 교사 등 나름대로 지식인층으로 사는 경우도 있다.[5] 물론 인도에서도 '영국 협력자들의 자손들이 오늘날에도 엘리트로써 잘 먹고 잘 산다'고 비난하는 여론이 있긴 하나 한국의 친일파 후손 비난 여론에 비하면 그 규모는 미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