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10:36:33

카리용 요새 전투



파일:black-watch-attack2.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프렌치-인디언 전쟁 시기인 1758년 7월 6일 ~ 7월 8일 뉴욕 챔플레인 호수가의 카리용 요새(현재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이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둔 이 전투는 북미 프랑스군 최고의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루이 조제프 드 몽캄의 최고의 승리로 일컬어진다.

2. 배경

1756년 북미 프랑스군 최고 지휘관을 맡은 루이 조제프 드 몽캄은 오스웨고 요새 전투, 윌리엄 헨리 요새 전투 등 수차례의 전투에서 승승장구했고, 영국은 북미 식민지를 상실할 위기에 몰렸다. 이에 영국 수상 대(大) 윌리엄 피트[1]는 북미 식민지를 사수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케이튼 브레튼 섬의 루이스버그 요새, 오하이오 주의 듀케인 요새, 챔플레인 호수의 카리용 요새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그 중 카리용 요새 공략 작전을 이끌 적임자로는 조지 하우 경이 고려되었으나, 그러나 계급이 더 높고 정치적 영향력도 상당했던 제임스 에버그롬비가 총사령관으로 선정되었고 조지 하우는 부지휘관이 되었다. 이후 영국군은 에버크롬비 장군의 지휘하에 윌리엄 헨리 요새 터 근처에 집결한 후 근방의 카리용 요새 공략에 착수했다.

카리용 요새는 1755년 조지 호수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한 프랑스군이 조지 호수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건설한 요새다. 조지 호수의 북쪽 지점 근처에 있는 챔플레인 호수가에 건설된 이 요새는 남쪽으로는 라슈트 강이 흐르는 낮은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요새 근처엔 라슈트 강 건너편 인디펜던스 산 옆에 있는 언덕[2]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프랑스군은 이 언덕 정상에 대포를 설치해 요새를 공격하는 영국군을 향해 포격을 가하게 했다. 언덕은 경사가 심하고 나무가 뺵빽하게 나 있어서 언덕으로 다가오는 적을 상대로 상당기간 버틸 수 있었지만, 반대로 언덕을 빼앗기는 순간 요새 포격이 매우 용이하기 때문에 프랑스군으로서는 이 언덕을 반드시 사수해야 했다. 그래서 1758년 6월 30일 요새 수비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루이 조제프 드 몽캄은 언덕에 주력 병력을 배치하는 한편 샤를 드 부르라마크 대령에게 3개 대대를 맡겨 조지 호수의 북단 도하지점을 점령해 적의 도하를 막게 했다. 그리고 7월 6일 영국군이 상륙 작전을 개시하면서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총사령관: 제임스 에버크롬비
  • 부사령관: 조지 하우
  • 영국 정규군: 6,000명

    • - 제27 에니스킬렌 보병연대
      - 제42 하일랜드 보병연대
      - 제44 에버크롬비 보병연대
      - 제46 머레이 보병연대
      - 제55 하우 보병연대
      - 제60 로얄 아메리카 보병연대 1대대
      - 제60 로얄 아메리카 보병연대 4대대
      - 제4, 제7 로얄 포병연대
  • 식민지 민병대: 9,000명

    • - 매사추세츠 베글리 연대
      - 매사추세츠 도티 연대
      - 매사추세츠 니콜스 연대
      - 매사추세츠 프리블 연대
      - 매사추세츠 러글스 연대
      - 매사추세츠 윌리엄스 연대
      - 뉴욕 딜랜시 연대
      - 뉴햄프셔 하트 연대
      - 로드 아일랜드 밥콕 연대
      - 뉴저지 존슨 연대
      - 제1 코네티컷 라이먼 연대
      - 제2 코네티컷 휘팅 연대
      - 제3 코네티컷 피치 연대
      - 제4 코네티컷 우스터 연대
  • 경보병

    • - 제80 게이지 연대
      - 로저스 레인저 연대
      - 매사추세츠 파트리지 경보병 연대
      - 모호크 인디언 부대

3.2. 프랑스군

  • 총사령관: 루이 조제프 드 몽캄
  • 부사령관: 프랑수아 가스통 드 레비
  • 우익: 프랑수아 가스통 드 레비 지휘.

    • - 제2 라렌느 보병대
      - 제2 베아른 보병대
      - 제2 기옌 보병대
  • 중앙: 루이 조제프 드 몽캄 지휘.

    • - 제1 베리 보병대
      - 몬트리올 소속 프랑스 정규병 400명
      - 제2 왕립 루시용 보병대
  • 좌익: 샤를 드 부르라마크 지휘.

    • - 제2 라사르 보병대
      - 제2 랑그도크 보병대
  • 분견대

    • - 조지 호수와 카이용 요새 사이의 낮은 분지 수비대 200명
      - 조지 호수 측면 숲지대 경보병대 450명
      - 프랑스 식민지 해상경비대
      - 캐나다 민병대
  • 총병력: 3,600명

4. 전투 경과

7월 5일, 영국군은 조지 에버크롬비 장군의 지휘하에 900척의 바토[3], 135척의 고래잡이 배와 다수의 무거운 편평한 보트를 타고 조지 호수를 건넜다. 그리고 7월 6일 아침부터 정오까지 영국군 전체가 조지 호수 북쪽 해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에버크롬비는 선발 부대를 파견해 조지 호수에서 챔플레인 호수까지의 일대를 수색하게 했다. 이때 몽캄 장군은 적의 규모가 너무 커서 상륙을 저지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부르라마크 대령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에 부르라마크 대령은 허겁지겁 철수하면서 물자와 무기를 내팽개쳤다. 이렇듯 적이 상륙 지점 방어를 포기했다는 걸 알게 된 에버크롬비는 군대를 종대로 정렬시킨 후 챔플레인 호수로 진군했다.

한동안 순조롭게 진군하던 영국군은 7월 6일 오후 라슈트 강이 베르니츠 강과 만나는 지점 근처에서 프랑스군과 우연히 조우했다. 이 프랑스군은 조지 호수 근처의 숲지대에 매복했던 450명의 경보병대로, 부르라마크 대령이 철수했다는 걸 뒤늦게 전해듣고 황급히 요새로 후퇴하고 있던 중이었다. 피네스 라이먼 대위가 이끄는 코네티컷 연대가 이들과 교전을 벌였고 뒤이어 근방을 지나가고 있던 조지 하우가 휘하 보병연대를 이끌고 합세했다. 프랑스 경보병대는 수적인 열세로 인해 패주해 약 150명이 죽었고 150명은 포로가 되었으며 가까스로 살아남은 일부 병력은 라슈트 강을 헤엄쳐 캐나다로 도망쳤다. 또한 그들의 지휘관인 트레페섹 대위도 심한 부상을 입고 도주했다가 그날 밤 사망했다. 그러나 조지 하우는 전투를 이끌던 도중 유탄에 맞아 즉사했다. 영국군은 조지 하우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서 더이상 진격하지 않고 숲에서 야영하다가 다음날 아침 상륙 지점으로 돌아갔다.

한편, 몽캄은 요새 근처의 높은 언덕에 목책을 쌓고 밤새 동안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을 경사로 위에 깔아놓은 통나무 더미 위에 쌓아서 은폐시키고 포대를 설치해 적의 다가올 공세에 대비했다. 7월 7일 현장에 도착한 에버크롬비는 조지 하우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으며 뒤이어 프랑스 증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공세를 취소하려 했다. 그러다가 주위로부터 적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권고를 받은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공병 부대 지휘관 매튜 클라크 대령과 측근인 제임스 에버크롬비에게 적의 방비 상태를 살펴보게 했다. 이에 두 사람은 일부 근위대와 함께 요새 근처 언덕을 살펴보고는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간단히 공략할 수 있습니다. 포격도 필요없을 것 같군요.

그 말을 들은 에버크롬비는 마침내 공격을 결심하고 7월 8일 오전에 전군에 출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방비를 탄탄하게 해두었다. 라슈트 강 근처의 저지대에서 강을 거슬러 남쪽으로 챔플레인 호수까지 구축된 방어선엔 두터운 목책과 참호가 파졌고 주변엔 여러 포대가 숨겨져 은폐되어 있었으며 토사를 곳곳에 쌓아뒀다. 그들이 이렇듯 방비를 철저히 해둘 거라고는 예상하치 못한 채, 7월 8일 오전 9시 직후 영국군과 식민지인들은 공세를 개시했다. 먼저 로저스 레인저스와 토마스 게이지 대령의 제80 경보병 연대가 프랑스 척후병들과 짧은 교전을 벌인 끝에 격퇴했다. 그후 영국군은 숲을 헤치며 진군해 오후가 될 때까지 요새 근방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에버크롬비는 오후 1시 경에 총공격을 하기로 했지만 그보다 30분 전인 12시 30분경 좌익을 맡았던 뉴욕 연대가 에버크롬비로부터 명령을 하달받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언덕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에버크롬비는 마땅히 그들을 제지했어야 했지만 그저 상황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별다른 명령을 받지 않은 채 진군한 뉴욕 연대 6천명은 긴 경사로를 따라 언덕 정상의 목책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군이 사전에 깔아놓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가느라 고생하다가 언덕 꼭대기에 있는 프랑스군의 일제 사격으로 삽시간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간신히 장애물을 뚫고 프랑스군 대열을 향해 올라간 그들은 프랑스군이 토사에 뚫어놓은 토공에서 쏟아지는 총탄 세례에 직면했다. 결국 버티지 못한 영국군 병사들은 패주했다.

애버크롬비 장군은 이때서야 적의 방비가 예상보다 강건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포병대를 동원해 적지에 포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포병대를 동원하지 않고 보병대에게 또다시 언덕을 향해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공격 역시 격퇴되었고, 이후에도 영국군은 계속 공세를 펼쳤으나 4시간이 넘도록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보병 제42연대가 "지옥에서 온 아가씨들"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고지로 질주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프랑스군의 방비를 끝내 뚫지 못하고 900명 중 647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담한 타격을 입었다.

오후 5시경에 애버크롬비는 공격을 중지하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어두운 숲 속을 후퇴하는 병력들은 패닉에 빠졌고, 그들 사이에 프랑스가 공격해 온다는 소문이 소용돌이쳤다. 다음날 새벽, 영국군은 조지 호수를 배로 이동하여, 해질녁에 남단 기지에 도착했다. 한편 몽캄은 적을 추격하지 않고 7월 8일 하루 동안 힘들게 싸운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여러 통의 맥주와 와인을 나눠줬다. 이렇게 해서 카리용 요새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5. 결과

카리용 요새 전투에서 영국군이 입은 손실은 1,944명의 병사 및 장교 사상 또는 실종이었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사상자 372명이었으며 프랑수아 가스통 드 레비의 모자는 두 번 관통 당했으며 부르라마크 대령은 심한 부상을 입었다. 에버크롬비는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전장에 서지 못하고 본국에 귀국했다. 하지만 그는 그 후에도 승진을 계속해 육군 대장까지 올랐다. 반면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극적인 승리를 거둔 몽캄 장군은 북미 프랑스군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았고 이후에도 영국의 북미 식민지를 수차례 위협했다.
[1] 소(小) 윌리엄 피트의 아버지.[2] 현재 데비언스 산[3] bateaux. 캐나다에서 주로 사용되는 바닥이 평평한 강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