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6 03:03:19

마이센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12월 3일 프로이센군오스트리아군작센 선제후국마이센에서 맞붙은 전투. 오스트리아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2. 배경

1759년 11월 21일, 휠젠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막센 지역에서 고립된 핀크 장군을 구원하고자 디폴디스왈드로 진군했다. 그러나 핀크는 막센 전투 후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했다. 이에 휠젠은 즉시 프라이베르크로 철수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휠젠과의 연락을 지속하기 위해 모른 장군에게 4개 보병대를 파견해 휠젠과 합류하게 했다. 한편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핀크 장군 휘하 프로이센군 14,000명을 포로로 잡은 뒤 드레스덴 근처에 있는 오스트리아 본군을 소집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이들 앞에 진영을 갖췄다. 프로이센 선봉대는 케셀스도르프에 주둔했고 본군 첫번째 대열을 윌스러프와 림하흐 사이에 배치했고 두번째 대열을 블랑켄슈타인과 마이센 사이에 배치했으며, 헤르조그스왈드 근처에 새번째 대열을 배치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토르가우에서 베를린으로 통하는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마이센 앞 엘베 강 우측 둑에 있는 쾰른에 디렉 장군 휘하 6개 보병대대와 기병 1,000명을 배치시켰다.

다운 백작은 적의 움직임을 살펴보고는 11월 말에 디렉의 적 분견대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타우에 주둔한 필립 레빈 폰 벡 장군 휘하의 군단에게 이 임무를 맡겼고 5개 보병대대와 500명의 흉갑 기병대를 추가로 파견했다. 이 명령을 입수한 벡 장군은 12월 2일 밤에서 3일 새벽까지 디렉 장군의 프로이센 군대를 향해 진군했다. 12월 3일 새벽 2시, 벡 장군은 디렉의 진지 앞인 바이인보흘라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그는 프로이센군이 고지대를 점거하고 있어서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이때 디렉 장군은 아군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인 반면 적의 지원 부대가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므로 철수하려 했다. 이렇게 해서 양측의 전투가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사령관: 폰 디렉 소장
  • 병력: 보병 3,100명, 기병 1,000명, 야전대포 7문, 중포 6문

3.2. 오스트리아군

  • 사령관: 필립 레빈 폰 벡
  • 병력: 보병 1000명, 중기병 1,300명, 경기병 1,500명, 그렌저 용병 2,200명, 야전대포 8문

4. 전투 경과

12월 3일 새벽, 양측은 서로에게 포격을 퍼부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프로슈비츠에 배치된 오스트리아 포병대는 후르스텐베르크에 세워진 프로이센 2개 대대에게 포격을 퍼부어 후방으로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3:1에 달하는 전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격을 준비했다. 12월 3일 저녁, 디렉 장군이 급파한 괴첸 중위로부터 상황을 전달받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중포 6문과 2개 대대를 파견해 디렉 장군을 지원했다. 이들은 엘베 강 왼쪽 둑을 따라 마이센의 남쪽과 북쪽에 자리잡았다. 이후 프로이센 중포들은 프로슈비츠의 적 포병대를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고, 12월 3일 밤에서 4일 세벽까지 디렉 장군의 군대는 얼어붙은 엘베 강을 가로질러 철수 작전을 개시했다. 그의 기병대가 먼저 출발했고, 뒤이어 보병이 따랐으며 중포는 마지막에 뒤를 따랐다.

12월 4일 날이 밝았지만 전군이 다 건너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이 접근해왔다. 이에 마지막 프로이센 대대는 엘베 강 우측 둑에 있는 쾰른과 로츠웨인베르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벡 장군은 날이 밝자 적을 공격해 우측 둑에 고립된 프로이센군 잔여 부대를 공격하게 했다. 프로이센군은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워 첫번째 공격을 격퇴했다. 그러나 6개의 오스트리아 보병 대대가 재차 공세를 개시했고, 디렉 장군은 몸소 뒤에 남겨진 보병대를 지휘해 2시간 동안 사력을 다해 맞서 싸우면서 나머지 부대가 안전하게 철수할 시간을 벌려 애썼다. 그러나 2시간 후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쾰른을 점령했고, 디렉은 남은 3개 대대를 향한 맹 공격을 받았다. 결국 디렉 장군은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3개 대대와 함께 항복해야 했다. 이리하여 마이센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오스트리아군은 마이센 전투 동안 1명의 장교와 81명의 병사들이 전사했고 3명의 장교와 112명의 부상자를 잃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49명의 장교와 병사 1,490명이 포로로 잡혔고 디렉 소장도 포로로 전락했다. 그리고 8개의 야전 대포와 10개의 탄약 마차를 포획당했다. 막센 전투에 이어 또다시 큰 손실을 입은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력 유지에 애를 먹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했다.